제14회 - 오늘의 커피 <중세 유럽>
오스트리아 빈 포위 전 이후 중세 유럽 사람들은 검은 원두를 낙타와 말의 먹이로 생각했었다. 또한 먹어보니 맛없고 쓰고 독한 음료였다. 그런데 독한 커피에 우유와 휘핑크림을 넣어 먹어보니 이것이 기가 막힌 맛이었다.
커피 위에 휘핑크림을 올려 마부들이 말을 타면서 마셔도 쏟아지지 않는 아인슈패너가 탄생하였고
우리에겐 비엔나커피로 유명하다.
중세의 유럽은 술에 만취한 에코올의 시대, 몽환의 시대였다.
오스트리아 빈 전투 덕분에 프랑스도 커피에 의한 각성의 시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카페는 백과사전을 편찬했었던 드니 디드로와 장르 롱 달랑베르 의해서 기획되었다.
르 프로코프는 계몽사상가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 술에 취해 있던 유럽이 정신이 드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계몽주의로, 그것이 다시 혁명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풍자와 해학으로 부조리를 폭로하던 볼테르 Voltaire와 루소가 매일 토론하였다고 한다.
장 자크 루소가 커피를 좋아하긴 했나 보다. 루소는 평소처럼 아침 산책을 다녀와 카페올레를 마시려다 넘어져 죽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말이 있다. "아! 이제 더 이상 커피잔을 들 수 없구나..."라는 말이 남았다.
하지만 루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볼테르의 테이블이 있다.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철학자 루소와 볼테르는 파리에서 최초로 생긴 카페 프로코프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치, 경제,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예술과 삶을 이야기하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프랑스 시민 혁명의 사상적 근간이 이곳의 두 사람의 커피 향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해질 정도로 두 사람에게 모두 커피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루소는 카페에서 철학자들과 함께 사상을 나누는 커피 타임보다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감성을 나누는 커피 타임에서 더 행복감을 만끽했다.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바랑 부인과 산책을 나가 우유를 탄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곤 했는데,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
‘이때가 하루 중 우리가 가장 평온하고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연인과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곳을 ‘지상낙원’이라고까지 표현한 루소는
삶의 행복을 다름 아닌 커피에서 발견한 것이다. 또한 르 프로코프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이 루이 16세와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논의했다고 한다.
"커피가 오고 있다. 커피가 오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은 와인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원두는 나에게 60가지 영감을 준다”라고 말하며 늘 원두 60알을 세어 한 잔의 커피를 내려 마셨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값비싼 커피 값을 마련했을 베토벤을 생각하면 그의 커피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1981년 학림사건이 일어났던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로 불렸던 학림다방이 있었다.
학림다방은 문리대 축제이름 학림제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혜화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있다. 학림다방은 지금도 비엔나커피가 유명하다. 지금도 남녀노소 많이 찾는 곳이다.
영국은 다른 나라와 조금 다르다. 커피하우스 입장에 계급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남녀 차별은 있었다. 커피하우스에는 여자들이 못 들어갔다. 이때 가난한 영국으로 시집온 케서린 왕비가 있었다. 케서린은 우아하게 티가든에 앉아 홍차를 마셨다. 영국의 상류층들은 티가든에서 홍차를 마셨다. 에프터눈 티도 그때 나온다.
미국은 단연 커피 소비 1위의 나라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이전인 1726년 미국은 이미 브라질에서 커피 들어와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인이 커피를 마시는 것은 독립과 개혁의 상징이었다.
커피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역사인데 비해 신생독립국이었던 미국은
유일한 식민지였던 하와이에서 세계 3대 프리미엄 커피인 하와이안 코나를 생산한다.
프랑스는 아이티에서 커피 인플레이션을 만들었다.
아이티에서는 지금도 커피를 '흑인의 눈물'이라고 부른다.
유럽 열강들은 한 번쯤은 사과하고 반성하여야 할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