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까운 것으로부터 안녕

단편소설1

by 강민선

첫 장면을 의사와 환자의 대화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 아침 병원 출입문을 나서면서 갑작스레 든 생각이지만 알고 보면 지금껏 숱하게 해온 생각이기도 하다.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 둘 중 누군가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모른다. 그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짐작만 할 뿐이고,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본인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상대는 내가 모르는 나의 상태를 알고 있다. 나의 속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말해주려 한다. 이 얼마나 쾌하고 불길하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인가. 이미 결정나버린 결과에서 작은 희망을 찾는 일이.

그녀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쾌하고 불길하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환자의 자리가 아닌 바로 그 맞은편에 앉고 싶은 것이다.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자신의 입구멍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 오매불망 노려보는 상대에게 하나하나 요목조목 빠짐없이 순서에 맞게 상대가 느낄 놀람과 고통을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나의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냉혹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때로는 희망적이고 달콤할 수도 있다. 어둔 하늘의 틈새로 반짝이는 별처럼. 비행접시처럼. 그것은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것까지 움켜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녀는 손아귀에 다시 한 번 힘을 주고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짚고 넘어가자면 그녀는 요즘 행복했다.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불행했다. 문제는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의 삶을 설명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녀 역시 이 두 줄짜리 설명에 동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하늘에 탄식했다. 탄식하지 않으려면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데 또 다른 설명이라고 해봐야 접근의 차이에 불과할 뿐 인생 자체를 바꾸는 게 아니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생각했지만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의 생과 짐승의 생이 또 어떻게 다를까 역시 그녀의 완고한 뜻이었다. 그녀는 말과 글의 힘을 믿는 쪽이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었고, 표현 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것이 언어였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하여 그녀는 바랐다. 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 더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설명해주기를. 그것이 그녀가 행복함에도 글을 쓰는 이유였다.

하여 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 더 애정을 가지고 다시 말한다. 그녀는 요즘 행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새로운 연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그뿐이었다. 열세 살이나 어렸고, 그래도 알 건 다 아는 스무 살이었고, 참을성은 조금 부족했지만 그것을 견뎌낼 만한 연륜이 대신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에게 스무 살 청년의 불필요한 조바심은 귀엽기만 했다. 무엇보다 그는 건강한 말(馬)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건강한 말은 말(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건강하다는 것은 명료한 것. 그것은 스무 살 청년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허약해지기 때문에 변명이 필요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주변을 돌아볼 것도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말이 많아지고 있는 그녀 자신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말이 많은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그녀 역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종종 잊었다. 자신이 말이 많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에 조심하느라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이미 한 말을 또 하는 것과 아직 하지 않은 말을 평생 하지 않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쁠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이왕이면 덜 나쁜 쪽으로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언제나 중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덜 나쁘고 더 나쁠까를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두통이 몰려왔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말이 없는 조용한 여자였다.

아주 가까운 것으로부터 안녕.


마침표 뒷자리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심장보다 더 빨리 뛰는 것 같아 그녀는 숨이 차올랐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메모해 둔 공책을 다시 들여다봐도 요긴한 수가 생기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것으로부터 안녕’이라는 제목 아래로 다섯 번째 줄에는 ‘그는 떠나고 없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있었다. 그랬다.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 앞에 어떤 문장도 없었고, 대충이라도 끼적이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문장을 처음으로 쓰면서 이 문장을 마지막에 넣으리라고 마음먹은 것이다. 여기, 제목과 마지막 문장이 있다, 이것은 애초에 정해져버린 것이고 변경이 불가능하다, 이제 제목과 마지막 문장 사이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이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 본 적도 없거니와,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다.

여기서 ‘그’는 물론 그녀의 새로운 연인, 건강한 말과 같은 육체를 가진 그였다. 그의 고향은 제주도이고 경기도의 친척집에 살면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일곱 살 때 낙마사고로 새끼발가락을 잃었는데, 그것보다는 아버지가 없는 집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군입대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가 제 스스로 말해준 것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밖의 것은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제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편이었고 그녀는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 관계가 그녀는 편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을 먼저 털어놓는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꺼내놓는다. 그것들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 그런 위치.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했고, 그런 위치를 선점한 자신의 태도에 또 만족했다. 이대로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디선가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처음에 그녀는 자신을 향한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친근한 목소리도 아닐뿐더러 실재하는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라고 믿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 그대로 소리의 근원이 어디일까 빠르게 판단하려 애썼다.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집중력은 무너졌고 자판의 글자들은 낱낱이 흩어졌다.

그녀는 그가 일하는 카센터 맞은편 카페에 앉아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한낮의 커다란 통유리가 그와 그녀의 존재를 서로에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는 일하던 중에도 종종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팔을 뻗어 크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저런 건 스무 살이니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뿐 그녀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제 주인을 알아본 개처럼 혼자 신나게 뛰어다녔다. 사실 그녀는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에는 병원에 있었다. 만성두통의 원인을 찾고자 MRI를 찍어볼 것인가에 대해 의사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환자들을 너무 오랫동안 많이 봐왔는지 의사의 태도는 그저 당신 뜻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신이 정 궁금하면 한 번 찍어보시든가요. 그녀에게는 그렇게 들렸고, 그렇게 말한 사람이 의사였다. 어떻게 의사라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당황해하다가, 의사라고 해서 모든 환자를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건 불가능하겠지, 하고 이해도 해보다가, 아니지, 그래도 의사인데, 내가 이렇게 아프다는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아프다는데, 같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의사이지 않은가, 하고 슬퍼했다.


저 알지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불러보았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녀의 동그랗게 튀는 입술 때문인지, 만나면 안 될 사람과 마주치고야 만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금 떨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인지 그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금세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에 그도 안도했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 전에 앉아도 되는지 묻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녀는 이 사람은 여전히 예의 바르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요.

그가 그녀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바라보면서 물었고,

아, 아니에요.

그녀는 서둘러 대답한다는 것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부끄러워졌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인데도 참 여전하다는 말로 그녀에게는 들렸다. 자신 앞에서 말을 더듬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네, 오랜만이에요.

그는 그녀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삼분의 이 가량 남은 레몬에이드. 구형 12인치 노트북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음 같은 것이 들리고 있었다. 제목과 마지막 문장, 단 두 줄 말고는 휑하기만 한 공책. 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그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터였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가끔씩 열어보는 폴더형 휴대폰.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델이었다.

뭔가를 쓰고 계시는군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사실이었다. 쓰는 일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소일과 다름없었다. 기다리던 그 사람이 오면 멈출 일이었다.

약속이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네. 당신도요?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물었고,

아니요. 저 길을 걷고 있는데 창으로 당신이 보여서요. 비슷한 사람이면 그냥 나오려고 있는데 당신이 맞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도 대답과 동시에 또 물었다.

네.

그렇게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땅한 이유도 없는데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지만 이미 번진 미소를 적당히 거둘 만한 이유도 없었고, 그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기만 했다.


이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나는 방법은,


문득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그것은 그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입술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것은 먼 기억 속의 소리였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고 그녀가 그에게서 들은 첫 말이었다. 이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나는 방법은, 하고 그가 운을 떼었을 때 그녀는 그 말이 주는 힘에 억눌린 채 그가 자신의 심장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서울의 한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실시한 사회불안증 인지행동치료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녀가 스물네 살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구 년 전의 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던 것도 당연하겠구나 싶었고, 그럼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은 당혹스러우리만치 시간의 흐름을 건너뛰어 있었다.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도 그렇게 보였을까. 궁금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원래도 질문이 없었지만 그런 질문은 정말이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녀를 억지로 프로그램에 참가시킨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육 개월 만에 돌연 일을 그만두어버린 것이 아버지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을 하여 일찌감치 안심을 하던 참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껏 딸에게 폭력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무엇이 딸을 위하는 것인지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물네 살, 지금 교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아버지는 굳게 믿었다. 그녀가 여섯 살 무렵 자폐를 앓는 것 같다며 특수치료를 받게 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였다.

저는 아내가 적극 추천해주더군요.

그녀로부터 아버지에 관한 대답을 들은 그가 말했다.

결혼하셨어요?

그 말은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건가요? 아니면 결혼 같은 건 못 할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가요?

그녀는 어리둥절하여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질문에 담긴 깊은 뜻은, 결혼을 했다니 정말 아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생각이 깊어지면 결국 질문거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그랬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채는 순간 모든 것은 불필요해지는 것이다. 그에게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녀는 묻지 않았다. 칠 주간의 프로그램 동안 그와 그녀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일부러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원형 탁자의 가장 먼 자리, 서로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주 앉았고, 자주 눈을 마주쳤으며, 둘 다 그것에 익숙하지 않아 바로 딴청을 피우기 일쑤였고, 마지막 모임이 끝났을 때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구 년 전의 일이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녀가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돌아보는 사이 잠자코 기다리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

그녀는 그런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문득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이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방치했다. 다시 어디론가 흘러가 사라질 때까지.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모르는 산란한 빛 때문에 길을 틀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을 것이라 여겼고, 그녀에게 그는 그런 존재였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는 산란한 빛.

전화번호가 바뀌어 있더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게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참을 수 없어 번호를 바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면 털어놓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라면 그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번호를 바꾼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번호를 바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를 괴롭힌 누군가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가 자신이었다고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 카센터에는 그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한 직원이 자신의 차의 보닛을 열고 안을 살피는 모습이 그의 자리에서도 다 보였다. 며칠 전부터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을 때 직원은 손을 펴서 보닛 위에 가만히 얹고는 얼마간 있어 보는 것이었다. 마치 청진기로 환자의 뱃속을 살피는 듯이 매우 심각한 태도로.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 쯤 되었을까 하는 젊은 청년이 오래 산 사람처럼 미간에 주름을 잔뜩 지은 채 그러고 있는 본새가 귀엽기도 했고, 지금껏 만나본 여느 카센터 직원들과는 다른 진지한 태도가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뒤에 오시겠어요?

서글서글한 인상만큼이나 경쾌한 목소리를 지닌 젊은이였다. 이제 삼십 분쯤 지났을 것이다.

헤어진 지 구 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눈에 그녀는 그대로였다. 스물넷과 서른셋은 여자의 생에서 한 카테고리에 들기 쉬운 연령대이기도 했다. 크게 달라진다고 해봐야 취업과 결혼, 출산과 육아와 같은 것일 텐데 이처럼 생성되고 자라는 것들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소멸이 있어야 한다. 상실이 있어야 하고 사라짐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유심히, 그러나 드러나지 않도록 살펴보았다. 무엇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는지.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그녀에게서는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왜 문득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럴 만한 용기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모르는 용기가 어느 순간 발휘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그녀를 알고부터 깨닫고 있었다. 프로그램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그의 아내였다. 같은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는 그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슷한 증세를 가진 낯선 이들을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가 앓고 있는 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것이 병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하루, 퇴근 후에 들르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따랐다. 그곳에서 그녀를 본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자신의 나이가 스물넷이라고 수줍게 밝힌 그녀는 지금껏 그가 보아온 스물넷의 여자들과 조금 달랐다. 그렇지, 여긴 조금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지, 라는 생각과, 그가 지금껏 보아온 스물넷의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 여직원의 당찬 모습들이 겹치면서 그녀를 특별한 무엇으로 우뚝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보자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특별한 무엇이었다. 동대문 새벽시장 장사꾼, 광화문 증권회사 간부, 24시간 편의점 직원, 초등학교 교사, 모두 그가 지금껏 보아온 일반적인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과 어쩐지 달라 보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한데 묶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왔으나 한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일을 했었던 사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여기는 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아버지가 음, 이걸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진솔하게 털어놓는 타입이 아니었다기보다 그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그녀는 반대였다. 누구보다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방법이 모든 상황에서 적절하고 유용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녀의 심사숙고에서 나온 말 한마디,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그의 눈에, 마음에, 그대로 용해되었다.

큐라소블루.

발음하는 그녀의 입술도.

푸른빛의 레몬에이드를 보고 놀란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큐라소블루라는 시럽을 넣은 거예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이렇게 파랗게 변해요. 시원하게 예쁘지요?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한 잔을 통째로 푸르게 변화시키는 큐라소블루가 그녀,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아닌 단 둘이 만난 시간이었다. 8월이었고, 그해 들어 가장 더운 날들이 열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아스라이 하늘거리는 빌딩들 위로 부서질 듯 파랗게 쨍한 하늘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음음음, 이어지는 허밍. 따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눈 마주침. 미소. 딱 한 방울의 분량이었지만 한 사람 전체를 푸르게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때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억났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오래된 문을 열자 작고 아늑한 비밀의 화원이 펼쳐지듯 당시 그녀의 배경이 되어준 장면들이 고스란히 나타났고, 그녀는 그 속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들어갈 수 없었다. 구 년 전이다. 지금 눈앞에 앉은 남자는 구 년 전에 알던 사람이다. 지난 시간 동안 그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지금에 와서 그녀는 뚜렷하지 않았고, 굳이 돌이켜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 창 밖에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기다려야 할, 현재의 사람이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아스라이 하늘거리는 빌딩들 위로 부서질 듯 파랗게 쨍한 하늘 아래에서 그을린 어깨를 드러낸 채 누군가의 부주의로 고장나버린 차를 손보느라 러닝셔츠가 흠뻑 젖도록 분주한 젊은 청년을 그녀는 사랑하고 있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그녀에게 청년은 전부였다. 과거에 아버지가 있었고, 그가 있었다면, 지금은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었고, 그녀가 머무는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청년뿐이었다. 휴대폰은 구 년 전과 동일한 기계였지만 번호가 달라졌고, 머무는 장소가 달라졌지만 여전히 누군가 예고 없이 방문을 두드릴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 없다고 건강한 어깨로 다독여주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을, 고개만 돌리면 당장이라도 볼 수 있는 연인을 차마 보지 못했다.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고 알리는 것만 같아 그러지 못했다. 그곳을 바라보는 즉시 눈앞의 남자는 눈치 채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두 사람일 거라고, 그녀는 조금 과장된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껏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형체 없는 무엇이 혹시나 아마도 눈앞의 남자라는 육체를 통해 지금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불안의 근원은 미래에서 올 리가 없고, 현재는 행복하고, 그러니 그것은 과거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는 게 분명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덮어놓고 모든 불안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따른 건 순전히 그녀의 잘못이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스물넷의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의 싹이 될 만한 상처가 아직 그녀에게 없었다.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이 다라면 다였다. 여섯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온갖 것들은 그녀를 일찌감치 언어의 세계, 숫자의 세계, 그림과 도형, 소리와 동작의 세계에 진입시켜놓았지만 그녀라는 프리즘 안에서, 여섯 살 여자아이의 작은 체구만큼이나 압축된 프리즘을 통해서, 그것들은 마구 부딪히고 뒤엉키고 조각나고 부서져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세계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린 그녀는 아버지에게 손을 잡혀 하얗고 차가운, 곳곳에 알 수 없는 표식들로 가득한, 빈 방에 갇혀 하루 종일 무언가를 익히고 진단받아야 했다.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는 그녀가 일반 학교에 입학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벙어리로 오해받을 정도로 말을 안 하는 그녀에게 날마다 책을 읽어준 아버지였다. 집을 비우는 날이면 미리 녹음을 해두어서 언제라도 딸이 듣게 했다. 그녀의 공간을 채운 것이 책의 내용인지 아버지의 목소리인지, 그것은 그녀를 채웠고, 그녀를 붙잡았고, 그녀를 가두었다.

시궁창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그녀는 없었다. 시궁창이라 불릴 만한 곳에라도 가 보았던가. 가 보았던들 그녀는 알았을까. 여기가 시궁창이구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라도 했을까. 아니었다. 아니므로, 인생이라는 것에 빗댈 수 있는 수식어로 성립되지 않았다. 모르므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동의도 반박도 할 수 없는 그 말이 주는 기괴한 감정에 현혹되었다면 그 책임은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 왜 현혹되었을까. 모든 현혹에 책임을 묻기는 쉬워도 왜 현혹되었을까, 그 대답은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었다. 인생을 시궁창에 비유했는데, 시궁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그 말에 현혹되어버린 이유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얼마든지 시궁창이었다. 그녀가 살아온 스물네 해 동안의 삶, 그녀가 만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작은 성취 혹은 체념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하나하나가, 그녀가 읽은 책, 보았던 영화, 다른 누군가의 상상력, 완전한 동의도 완전한 반박도 불가능한, 알게 모르게 피어난 작은 상념들, 그것이 아무리 연기와 같은 것이라도 그것은 그녀의 상상력 세계를 위한 성벽을 쌓았고, 허물었고, 쌓이는 중이었다.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뒷걸음질 치다가 제대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고, 전화를 받지 않자 집으로 찾아오고, 그녀가 없는 집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딸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산부인과였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나는 네 말을 못 믿겠구나. 의사의 말을 들어봐야겠어. 그렇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겠어. 그 순간 그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틀린 것이다. 사랑은, 시궁창 같은 인생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은, 시궁창 같은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는 일이었다. 그 길로, 그대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절대로,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모두 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현재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헤어지지 않았을 뿐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구 년 전에 만난 스물네 살짜리 여자에게 남은 생을 다 걸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다. 생을 거는 도박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이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만이 구 년 전 자신의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기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과거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다른 기억을 더 보태지 않는 것이었다.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과거 사랑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것은 과거였다. 짧은 한 때,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손을 내밀어 작은 뺨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말았을 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때껏 해본 적이 없었던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그녀 앞에서 울고 싶었다. 파란 하늘, 파랗게 질린 그때 그 하늘, 몸 안의 모든 수분을 그녀에게 내쏟고 싶었던 그날이 어제처럼, 눈앞에 놓인 파란색 레몬에이드 빛깔처럼 선명했다.

이제 가봐야겠군요.

그가 말했다. 에이드가 담긴 유리잔 속의 레몬슬라이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네.


그를 보지 않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돌이킬수록 그와 시선을 맞추는 일이 힘겨웠다. 그녀는 창밖을 의식하고 있었다. 커튼이 있다면 잠시나마 가리고 싶었던 시간이 이제 물러나려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눈앞의 그가 사라지고 만다면 얼마간 아쉬움이 남겠지만,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올라 그것이 새어나올까 억지로 입을 틀어막아야 하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잠잠하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일어서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 밖 연인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던 남자에 대해서 물어온다면 어떻게 대답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 알았던 사람. 그렇게 대답한다면 연인은 또 물을지 모른다. 전에 알았던 사람 누구? 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상담 받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알았던 사람. 상담 받아본 적이 있어? 있어. 무슨 일로? 응, 무슨 일로. 그렇게 그렇게 질문의 방향은 휘어질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도 다시 휘어지고, 소실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기도 전에 소실될 것이다.


그는 일어서면서 창밖을 보았다. 그의 차는 나갈 채비를 완벽하게 끝낸 것처럼 카센터 한쪽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마치 저쪽에서도 이쪽이 훤히 보여서 정비를 마쳤으니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만족스럽게 정비되어 있더라도 다시 저 카센터에 차를 맡길 수 있을까. 대면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카센터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아는 사람으로 지내도 좋을 것 같았고, 자신의 차를 손봐줄 믿음직한 카센터 직원 한 명쯤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그녀가 있는데. 있을지도 모르는데. 없으면 서운할 텐데. 이제 없을 텐데.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 대를 마칠 때마다 잠깐씩 앉아서 쉰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새끼발가락 하나가 없으므로, 연인은 오래 서서 일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건강한 육체를 가졌지만 새끼발가락 하나가 없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다리를 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 새끼발가락이 없는 자리에 나머지 네 개의 발가락이 균등하게 버티고 있는데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아무도 빈자리를 못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연인과 함께 밤을 보낸 날 아침이면 꼭 그의 발가락의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없는 것이 있다. 이 말이 주는 아이러니. 없어진 새끼발가락은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 먹었을까. 그의 몸에 붙어 있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쓸모없는 그것이 말의 먹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가고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