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2
1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눈이 투명하게 맑기도 했고, 그런 눈으로 자신을 질타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는 잠시 얼어붙었다.
“엄마, 저 아저씨 노래 불러.”
소녀가 말했다.
“앞에 보고 가만히 앉아 있어.”
엄마가 나무랐다.
소녀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가 앉은 쪽을 보았다. 그는 자신조차 잘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창가에 김이 서렸다 지워지기가 반복했다. 소녀가 피식 웃었다. 고개를 돌려 엄마 품에 포옥 안긴 채로 리듬을 타듯 발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노래 가사는 언제 다 외운 거지? 플레이 버튼을 누른 엠피쓰리 파일처럼 자신의 입에서 낯선 노래가 줄줄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기만 했다. 가사며 멜로디가 언제 이렇게 완벽하게 입력된 거야. 그는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자신의 목에서 나온 소리를 귀로 들었다. 서리 낀 창문에 미세한 파동이 부딪혀 진공효과를 냈고, 소리는 증폭되어 그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축가를 부르는 일만은 끝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싫어해서 회식 때면 노래방 입구에서 발길을 돌리는 그였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라면 무엇도 하기 싫었는데, 그 중 노래는 최악이었다. 이 불운을 막을 수 있다면 끝까지 막고 싶었다. 같은 팀원들이 모두 함께 축가를 부르기로 결정 났을 때 그는 분연히 일어서지도 못했다.
“모름지기 축가란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뭐 팀 프로젝트도 아니고, 이렇게 억지로 떠맡아서 하는 거 싫어. 축가는 진심으로 불러야지. 안 그래?”
나직하고도 짜증스럽게 그의 동료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기는 했다.
“진심? 요즘에 누가 그러냐? 하객들도 일당주고 고용하는 마당에. 그냥 잔말 말고 같이 불러. 불러 주자. 거래처 사람들도 많이 올 테고 이미지 관리나 하자고.”
그나마 가장 죽이 맞는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완전히 사기를 잃어버렸다.
그는 사기를 잃은 채 점심시간마다 노래 연습을 하러 회의실에 끌려갔다. 여직원들은 고교 합창단 재결성이라도 한 듯 잔뜩 들떠 있었다. 누군가는 지인에게 부탁해 노래 전문 강사를 초빙해왔고, 누군가는 악보를 인쇄해 인원수에 맞추어 파일에 담아 왔다. 악보를 보는 순간 그는 머리가 멍해졌다. 머리가 멍해진 채 남자 파트를 연습했다. 왜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는데도 노래를 불렀다. 피할 수 없으나 즐기기도 싫으니 그저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라는 의미로 악을 써보기도 했다. 강사가 매우 만족스런 얼굴로 그를 지목하며 칭찬을 했다.
예비신랑은 지난해에 입사한 남자 직원이었다. 선천적 호남형으로 별 노력 없이 첫인상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부류의 남자라는 것을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눈이 서글서글했고 목소리가 좋았다.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었는데 이것저것 아는 게 많은지 이야깃거리가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회식 자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화제에도 기가 죽어 있거나 일부러 아는 체하는 일이 없었다. 알아도 몰라도 고개만 끄덕끄덕 하면서 한쪽 구석에 앉아 시간만 흘리고 있는 그와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예비신랑은 축가 연습 도중에 종종 피자와 치킨을 사다주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여고 합창단원들은 환호했고, 남자 직원들은 테이블 세팅을 도와주었다. 방관하던 그는 묵묵히 피자와 치킨을 집어 먹었다.
아무리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해도, 노래 부르기를 싫어해도,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그의 마음을 괴롭힐 일은 못되었을 것이다. 예비신랑의 신부가 될 여자를 그도 알고 있었다. 거래처 여직원으로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라, 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숱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손가락을 마주 걸고 입술을 깨물고 미래를 계획했던 사이였다. 지은과 헤어진 지도 이미 오래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 애인의 결혼식 축가를 불러도 괜찮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주일 뒤면 현실이 될 것이다.
그의 이런 사정을 회사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알았으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같이 하겠느냐고 의견을 물어보았을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깊은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축가를 부르자는 제안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거 연인의 결혼식이 그의 곁을 조용히 지나갈 수 있도록 입 다물고 배려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와서 신부가 될 여자와 과거에 사귄 적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해 입사한 남자 직원과 거래처의 지은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을 때도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소문에 민감하고 떠도는 말들에 거의 공포를 갖고 있는 지은이, 그래서 그와 사귀는 삼 년 내내 몰래 만나기를 원했던 지은이 왜 이번엔 공개를 허용했을까 의문이 든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데이트는 곳곳에서 목격되었고, 여자친구의 자격으로 회사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 적도 있다고 했으니 만남을 시작할 때부터 결혼을 염두에 두었을지 몰랐다. 그런 지은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다 지난 일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딛은 때였고, 사랑도 처음이어서, 아이처럼 두려워했다.
설마 하던 일은 악보를 받는 순간 보란 듯이 일어났다. 축가곡으로 정한 노래는 오래전 지은이 즐겨 부르던 그 노래가 맞았다.
“우리 결혼할 때 누가 이 노래 불러줬으면 좋겠다.”
지은은 이미 했던 말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말을 했다. 기분이 좋다는 뜻인 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지은의 기분이 좋으면 그의 마음이 편해졌다. 지은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그가 대신해서 그 노래를 불러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늘진 여인의 얼굴에 스미듯 번지는 미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지은은 알까? 축가를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나도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니? 그는 출근길 버스 창문에 기대어 속으로 물어보았다. 몇 번인가는 불쑥 지은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바뀐 핸드폰 번호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무턱대고 회사 앞으로 찾아가도 되었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지은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 이게 다였다.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던 지은은, 새벽이건 아무 때건 전화를 해 그를 자취방으로 불러들인 지은은 그렇게 멀어졌다. 두 사람 모두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던 참이었고, 수시로 다투었고, 감흥 없는 섹스를 하던 무렵이었으므로, 그 역시 지은에게 명확한 대답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런 회상 따위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언제나 고개를 저어왔었다. 감성에 젖는 순간이 싫어 술에 취하는 것도 삼가왔다. 그런데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더, 심지어 지은과 만났을 때보다 더 지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해서 지은의 자리가 그에게 작았거나, 얕은 게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할 용기는 여전히 없었다. 언젠가 꼭 한번은 마주쳐야 한다면 다른 자리여야 했다. 축가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결혼식 축가쯤이야 요즘 누가 신경 쓰고 듣나 싶다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더더욱 우스꽝스러운 자리가 될 게 아닌가 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 하는 거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큼 엄청나게 잘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지금까지도 오합지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축가팀의 상태로 보아 어림도 없겠지 하고 포기했다. 지금이라도 빠질까? 아프다고 할까? 그날 출장 갈 일 없을까? 배편뿐인 제주도 출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버스는 회사 앞에서 멈추었다.
2
우현은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그랬다. 그가 우현을 처음 안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고,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동네에서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그도 모르게 우현이 회사를 다녔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현은 ‘회사라는 괴물’이란 인터넷 독립잡지의 인기 칼럼니스트였다. 서울에 사는 회사원의 팔 할은 출근하자마자, 혹은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그의 글을 읽을 거라고 진보성향의 신문을 통해 말한 사람은 우현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유명한 소설가였다. 모든 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현에게 인생이란.
“내 얘기 쓰지 말랬지?”
언젠가 그는 우현과의 술자리에서 말했다.
한두 번 정도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갑과 을에 대해서, 갑과 을 밑에서 허덕이는 병정들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일하는지에 대해서 쓰려면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해답 없는 고민들을 하소연하는 동안 우현은 그가 아는 한 가장 현명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었다.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는 것. 묵묵히 들어주고 같이 술을 마셔주는 것. 그때 우현은 특별히 메모를 하거나, 뒷이야기를 더 묻지도 않았다.
우현의 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그는 누군가 몰래 등을 밀어 시궁창 쪽으로 몸이 기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찔했다. 한두 번은 넘어갈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그는 답답하거나 무료하거나 분에 차거나 쓸쓸해질 때면 우현을 불렀다. “이런 얘긴 쓰지 마라.” 그때마다 그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 걸 뭐하러 쓰냐?” 말했던 우현은 그런 걸 썼다.
“네 얘기 아니야 인마. 그런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냐?”
그는 당황했다. 우현이 그런 식으로 응수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야, 미안하다, 좀 쓰자, 뭐 어떠냐, 누가 해코지할 것도 아니고, 라는 정도였다면 그도 못 이기고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실명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했던 말을 그대로 담은 것도 아니었다. 말은 축소되거나 보태어졌다. 순서가 바뀌거나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한데 뒤섞이기도 했다. 내 이야기인가 하고 보면 다른 이야기가 끼어 있었다. 모르는 인물이 등장해 없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회사라는 괴물’ 속 우현의 글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아주 닮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매순간 숨을 쉬고, 매일 걸으며, 누군가로부터 돌을 맞기도 하고, 발에 차이기도 하면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그였다. 우현의 글 속에 자신인 듯 보이는 이가 나타나 그러고 있다. 그가 아닐 수도 있다. 이름도 다르고, 다니는 회사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들도 다르다. 하지만 자기가 어떻게 자신을 못 알아보겠는가. 그런 심정으로 저기, 그 안에서 그와 똑같이 숨쉬고, 걷고, 맞고, 차이는 이를 매일 본다. 펜을 든 신은 손끝으로 그를 이리 까딱 저리 까딱 움직이다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페이지의 끝에 이르러 구원의 사다리를 세워주기도 하지만 실제의 그는 달라지는 게 전혀 없다.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당하는 대가로 글 속의 그를 연명시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의 그는 글 속의 그를 위한 숙주인 셈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을 거머쥐는 것과 다름없다고 우현은 말했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는 우현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 말을 생각할 때면 어쩐지 자신의 운명이 우현의 손에 달려 있는 것만 같아 오싹했다. 언제나 우현 앞에서 그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현은 중학교 때부터 학교 내외에서 글짓기 관련 상을 휩쓴 재주꾼이었다. 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어울리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우현을 좋아하는 한두 명의 조용한 녀석들은 매년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우현을 좋아했다. 당시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생이되 별칭을 부르거나 부르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 가운데서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자 행복이었다. 그것은 또래집단에서 가장 우월한 정신세계를 지녔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글을 계속 써보지 않겠니? 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어” 라는 선생님의 말을 우현은 밥 먹으라는 어미의 말보다 더 많이 들어왔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 우현의 곁에서 그의 시간도 이십 년이 흘렀다. 만약 그에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것과는 애초에 담을 쌓고 사는 인간이 그였다면, 운명을 저당 잡힌 것 같은 미묘한 감정을 지닌 채 우현의 곁에 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역시 같은 시간 동안 우현의 곁에서 글을 썼고, 책을 읽었고, 같은 공모전에 투고했다. 잘 되지는 않았다. 학교를 졸업했고, 일을 시작했고, 나이를 먹었다.
그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새로 올라온 우현의 글을 읽으며, 이제는 거의 모든 이야기와 문장이 자기를 두고 한 말이라는 절반의 착각에 사로잡혀 하루를 시작했다. 자기일 수도, 자기가 아닐 수도, 아니라고 발뺌한데도 할 말이 없는 어정쩡한 경계에서 얼을 놓아버린 채 스크롤바를 천천히 하락시켰다. 우현의 대학 선배이자 유명한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그도 서울에 사는 직장인의 팔 할 속으로 풍덩, 스스로를 잠수시켰다.
그가 물을 뿜으며 고개를 번쩍 치어든 것은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점점이 흩어져 떨어진 건 물이 아니라 차가운 아메리카노였다. 티슈를 뜯어 대충 닦는 동안에도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우스를 움켜쥔 손등 위로 미처 닦지 않은 커피 방울이 흘러내렸다. 자기일 수도, 자기가 아닐 수도, 아니라고 발뺌한데도 할 말이 없기는 왜 없단 말인가. 그와 함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지은이었다.
그는 지난 어느 밤 우현을 만나 술을 마셨고 축가라는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기억했다.
“축가라는 근황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정말 미치게 하는 근황.”
우현이 관심을 보였던가. 그렇지도 않았다. 하긴 녀석은 늘 그런 식이었다. 관심 없는 척, 딴 짓하는 척하면서 죄다 듣고 보고 기억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거머쥐는데 그 정도의 수고는 수고도 아닐 것이다. 그때 그는 지은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던 것이고……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은과의 일은 더 오래 전부터 우현에게 말해왔다. 지은과 사귀는 동안에, 지은과 사소한 일로 다툴 때, 지은과 함께 갔던 여행지에 대해, 지은을 처음 만난 날의 떨림에 대해서도. 지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그는 우현 앞에서만큼은 그 약속을 깼다.
이번 글의 주된 내용은 사내 연애와 결혼, 그리고 결혼식에 관한 단상이었다. 같은 회사가 아니어도 일로써 맺어진 커플, 일 때문에 헤어진 커플까지 모두 아울러서, 회사와 일이 개인의 연애와 사랑, 결혼에 미치는 미세한 영향에서 시작해 인간의 고독과 우울, 파산과 죽음까지 확장시켜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우현의 기본 관점은 연민과 희생이 분명했지만, (우현과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내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회사라는 괴물’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그 속에서의 사랑에 대한 서술은 개인의 욕망과 이해타산에 치중해 있었다. 그 한가운데 그와 지은이 있었다.
그는 우현의 글을 읽는 내내 자신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가 차디차게 식었다가 또 다시 활활 타오르면서 괴물처럼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다가 하늘을 보고 울고 싶다가 당장이라도 우현을 불러내 땅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싶었다. 우현의 글에 따르면 그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감정을 숨기고 헤어진 전 애인의 결혼식 축가를 부르는 것마저 감수해야 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말단노동자’였다. 이것은 사실과 달랐다. 축가를 부르기로 한 것은 ‘회사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었다. 팀원들의 의기투합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감정을 숨기고 헤어진 전 애인의 결혼식 축가를 부르는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이 일의 주체가 ‘불쌍하고 가련한 말단노동자’인 것은 억지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쌍하고 가련한 말단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불쌍하고 가련한 말단노동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 지은의 결혼식은 별개였다.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않았다. 개인의 사정이고, 감정이라고만 여겼다. 어떤 해결책이 필요해서 우현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배출이었다. 감정의 배설. 그것이 그대로 먹잇감이 되어 우현의 뱃속에 들어가 이런 식으로 소화되어 나올 줄은 몰랐다.
우현은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소화한 것이었다. 그의 고민을, 그의 상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는 생각할수록 속이 뒤틀렸다. 배신감 때문이었다. 만약 우현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글을 쓰기에 앞서 그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다. 대중에게 선포하기에 앞서 당사자인 한 사람에게, 공동체 안에서 처절하게 묵살된 개인의 감정에 대해 말했어야 옳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히죽 웃으며 뭘 그렇게까지 오바하느냐 대꾸했을 것이다. 우현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가 고쳐주었을 것이다. 대화는 거기서 멈추거나 조금 더 깊어졌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번쯤 우현의 말을 떠올려볼 수도 있었다.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다가 무심결에 바라본 하얀 거품 속에서. 그는 약간의 고마움을 느낄지도 몰랐다. 자신이 속한 곳과 그 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점에서. 그런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해주는 친구를 두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을지도 몰랐다. 우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만의 술자리 대신 인터넷 신문이라는 광장과 확성기, 그리고 익명의 다수를 선택했다. 거기에 친구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휴게실로 향했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교적이지 못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았다. 다가오면 받아주었고 말을 걸면 들어주었다. 관계는 언제나 타인에 의해 어느새 맺어져 있었다. 중학교 삼 년 내내 우현과 같은 반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친해진 것도 그런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면에서 비슷했다. 두 사람이 친해질 무렵에는 이미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조용한 우현이 글을 쓸 때면 대범하고 과감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우현의 이중자아를 그는 부러워했다. 페르소나를 덮어쓴 채 무대 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한 명의 연극배우 같았다. “글을 쓰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을 거머쥐는 것과 다름없어.” 이 말은 그가 우현에게서 들은 가장 위협적인 문장이었다. 평소의 우현답지 않으면서도 어느 때보다 우현다운 말투였다. 그때 우현의 입술과 그 눈빛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했다. “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써서 그 사람이 상처받을 게 두렵지 않아?” 그가 물었을 때 우현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상처받을 게 두렵다면 글을 쓰면 안 되지. 글을 쓸 자격이 없지.”
그는 입에서 담배를 떼었다. 우현에게 전화해 왜 그런 글을 썼는지, 그 글을 읽을 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우현에게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현에게서 연락이 온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받아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예전과 같은 마음이라…… 그는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우현에게서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껴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의 어떤 말도 우현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거라는 의심도 함께 자라났다. 그런데도 그는 우현을 만나면 고해소에 들어간 신자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신자와 사제가 긴밀해질 수는 있어도 친해질 수 없는 것처럼, 그와 우현이 그런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제오늘의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같은 마음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우현에 의해 그의 인생이 다시 써지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기로 했다.
3
“그날 고향 내려가 봐야 해서 그래요. 집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미안한 낯빛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붙잡지 않는 것 같았다. 재고의 여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확고부동함으로 이대리는 똘똘 뭉쳐 있었다. 지난밤에 수차례의 각오와 연습을 다진 사람처럼. 결혼식은 내일이다. 그는 결승선 앞에서 간발의 차이로 역전 당한 마라토너 같은 심정으로 동료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렇게도 축가를 부르기 싫어했을 때 회사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참고 하라며 부추기던 이였다. 회사 안에서 그나마 죽이 잘 맞는다고 여겼고,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고맙고 애틋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고독한 축가 연습 시간에는 또 얼마나 위안이 되어주었던가. 이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동료의 꿍꿍이를 그는 모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빠질 생각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마음을 돌릴 때까지 끊임없는 재촉과 독려를 견뎌야 했을 것이므로 의중을 감추고 있다가 결혼식을 하루 앞두었을 때 밝히는 것이다. 비근한 수법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동료를 향해 눈을 흘겼고, 그것을 동료에게 들켰다. 동료는 그에게만 보이는 둥 마는 둥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 금기된 작당을 꾸미다 결정적인 때에 혼자서만 빠져나가는 자의 얄궂은 정서가 숨겨진 몸짓이었다.
휴게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그는 곧장 팀원들에게 가서 축가팀에서 빠질 것을 고하겠다고 (세상에 축구팀도 아니고!) 마음먹고 있었다. 모든 고리, 감정적이면서 육체적이기까지도 한 고통의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매듭을 짓고 싶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는 대신 침묵을 선택하겠다고, 짐짓 진지한 태도로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우현의 글과 반대되는 이야기, 아니 현실, 그 자신만의 진짜 삶을 살겠다고, 타인이 쳐놓은 그물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겠다고.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할 수 없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와서 분위기를 바꾸어버리는 것, 그 중심이 자기가 되는 것, 주목을 받는 것, 잠깐이라 할지라도 힐난의 눈초리를 겪어야 하는 것에 그는 몹시 약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바로 뻔뻔한 사람이었다. 새치기 해놓고 시치미 떼는 사람, 돈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 개인적인 통화를 여럿이 있는 데서 버젓이 하는 사람, 그에게 그들은 모두 능력자였다.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는 능력을 가진 자. 동료도 빠지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자기마저 그렇게 한다면, 그 뒤의 상황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결혼식을 없애는 게 빠르겠군.
문득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말도 안 되었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좀 더 확장시켜보기로 했다. 결혼식이 없어지는 것이다. 신랑이 다치든, 예식장이 무너지든, 지은이 크게 곤란하지 않는 선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혼식이 없어지는 것 자체가 지은에게 곤란한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들었어요? 결혼식 취소 됐대요.” “왜?” “무효래요, 무효.” “결혼이 무효라고?” “신랑이랑 신부가 싸웠다나.” “신부될 여자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던데요.” “보통은 아니지.” “네? 아무튼 그래서 결혼이 무효? 아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더 늦기 전에 잘 된 거죠 뭐. 그나저나 축가 연습한 거 아까워서 어쩌나.”
그의 입가에 실실 웃음이 번졌다. 그는 이런 상상이 자신에게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주변의 것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있고 무너진 상황은 그에게 꽤 유리한 편이 된다. 생각이 노력이자 행동이고 결과인 셈이었다. 나무 위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상상 속에서 사과는 얼마든지 떨어져 그의 주변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고, 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이 구체적이고 치밀할수록 허무는 더욱 잔인하게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누군가는 들어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그는 맥락 없는 한탄을 하기도 했다. 지은은 그의 이런 면을 아주 싫어했다.
“병신 같아!”
“뭐라고?”
지은은 방금 자신이 뱉어 놓고도 아닌 체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로서도 자신의 입에서 그런 엄청난 말이 터져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적이 이어졌지만 없던 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뿅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너무 세게 맞아서 상대가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차마 지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너무나 생생한 언어였다. 인간의 몸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그것도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내장기관과 같은 언어였다. 그것이 방금 터져나간 것이다. 폭발의 시기로 보나 세기로 보나, 그 말이 지은 안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농축되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껏 지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신 ‘같다’는 것이지 병신은 아니라는 것일까. 그래서 다행인가.
지은이 싫어하는 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는 지은이 싫어하는 그것을 자주 했다. 자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쪽으로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것을 하필 지은이 싫어한다는 게 도리어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질이란 무엇인가. 본인만 인정해서 될 게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그는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개발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그의 소질이고 그가 유일하게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며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느냐고 주장할 만한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안해.”
지은이, 정적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지은의 배 부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지은의 왼손이 배 위에 살포시 얹어 있었다. 터져 나간 내장기관이 아마 저기쯤 있었을까.
“틀린 말은 아니야.”
그가 무기력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현재의 그가 순응하듯 대답했다.
축가 연습 일정을 담당하는 팀원에게서 메일이 왔다. 축가와 관련해서는 마지막일 것이다. 내일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추신. 오늘은 연습 없습니다. 목 관리 잘 하시고 집에서 푹 쉬세요.’
18시 정각. 컴퓨터를 껐다.
4
그해 3월 초는 몹시 추웠다. 순천만의 무성한 갈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한파 때문에 안개도 물러가 빈약하고 앙상한 모습만 여지없었다. 두 사람은 그 한가운데 서서 두리번거렸다. ‘이건 아니잖아?’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그런데도 둘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엉뚱한 곳에 다다른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대는 어딨어?”
지은이 그를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글쎄…….”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한 것도 아닌데 과중한 책임을 안고 얼버무렸다.
“넌 이런 것도 모르고 여길 오자고 했어?”
“갈대 베는 시기가 있는 줄 몰랐지.”
“아는 게 뭐 있냐? 아휴 추워.”
지은이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는 뒤따랐다. 나무판자를 엮어 만든 기다란 산책로를 걷는 동안 드물게 원형으로 남겨 놓은 갈대가 보이기는 했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위치였다. 그가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었다. 이곳에 데려오면 지은의 기분이 풀릴 것 같았고, 도착하기 직전 쯤 되자 지은의 눈가에 기대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실망. 산책 코스를 중간까지 걷다가 지은은 되돌아섰다.
길게 이어진 방죽 길을 걷다가 김승옥 문학관에 들러 전시된 사진들을 보았다. 그도 뒤따라서 사진들을 보았다.
“남자가 봐도 참 멋있게 생겼단 말야.”
그는 분위기를 띄워볼까 혼잣말인 것처럼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지은은 잠자코 있었다. 지은은 김승옥 부부의 사진 앞에서 멈추었다. 부인이 남편을 뒤에서 다정하게 끌어안듯 팔을 둘러 함께 카메라를 붙잡고 있는 포즈였다. 지은은 그 앞을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지은과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지은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곤 온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같이 산 것은 아니었어도 왕래가 잦았으므로 그의 집에 있어야 할 많은 것들이 지은의 집에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 지은은 한 마디도 없었다. 버렸을까. 어떻게 했을까. 그의 집에도 지은의 물건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권의 책들. 구석구석 다 모아보니 스무 권이 넘었다. 올 때마다 한 권씩 챙겨와 뒹굴 거리며 읽다가 가져가는 걸 잊은 것이다. 책 중에는 어이없게도 지은의 집 앞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것도 있었다. 밀린 연체료를 대신 지불하고 도서관을 빠져나오는 길에 그는 두어 번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청첩장을 열었다. 지은의 이름이 흐릿하게 보일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떤 대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저만치 멀어지는 때가 온다. 대신에 주변의 것들이 반전되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은의 얼굴이 아니라 지은이 바라보던 김승옥 부부의 사진이 불현듯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단서가 되어 돌아온다. 그는 지은과 헤어진 오래 전에 이미 몰두했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생각들을 지금 다시 끄집어냈다. 자, 보자, 오래도 시간이 지났으니, 이만큼의 거리 밖에서 그때를 한번 들여다보자. 순천만 갈대가 무성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질문은 늘 같다는 사실에 그는 조금 놀랐다. 탄성을 내지를 만큼 아름답고 풍요로운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이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그를 조금 슬프게 했다. 그랬다면. 조금만 덜 추웠다면. 차지 않은 공기가 우리 몸과 마음을 조금만 더 가볍게 해주었다면.
우현의 글대로라면 그는 내일 결혼식에 간다. 축가를 부른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노래하는 기계처럼. 신부와 눈이 마주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우렁차게.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몇 번이나 그 장면을 생각했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 장면은 엄청난 부력을 동원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내일 만약 축가를 부른다면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장면이 연출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현의 글이 이렇게 힘이 좋단 말인가. 때 아닌 감탄이 느껴지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우현에게 전화해 물어볼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어떻게 할까? 그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런 병신!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더워져 창문을 조금 열었다. 숨을 몰아쉬다가, 담배를 꺼내 입안에 물고만 있다가, 곧 빼냈다.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왕 고민하는 거 날계란이나 삼키면서 할까. 혹시 모르니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우습고 낯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아직도 노래 가사를 외우고 있는지 점검해보았다. 그의 입에서 흥얼흥얼 노래가 새어 나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