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구구절절

46. 관람

20170605_am02:41

by 강민선

영화 <최악의 하루>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사직동의 한 카페가 나온다는 말을 블로그 글에서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단 한 줄, 스치듯 읽은 문장이 불현듯 오랜 생각에 잠기게도 하고, 안중에도 없던 영화를 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빠져들었다. 배경이 전부 다 내가 걸었던 곳이었다. 남산 중턱에 있는 여중 여고를 다닌 덕에 연중행사였던 남산꽃길걷기대회를 6년 동안 참가했던 내게 남산은 유별나게 익숙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곳이었다. 은희(한예리)가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와 함께 찾아가던 류가헌 역시 나도 가본 곳이었고 초행이라면 그 근방의 길 찾기가 쉽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료헤이와 헤어지고 약속 장소인 남산으로 올라간 은희는 현 남자친구와 전 남자친구(사실은 현 남자친구를 사귀는 중간에 만난)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두 남자를 각각 만나는 동안 은희가 구축해 놓은 두 개의 공간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연애라는 가상공간. 두 등장인물은 서로 만날 수 없고 만나서도 안 되었다. 안 되는데. 일이 벌어졌고 모든 것은 끝났다. 영화 초반 한낮의 초가을 햇볕이 내리 쬐던 풍경은 후반에 이르자 조용히, 그리고 어둡게 식어간다. 은희가 어둠에 젖어가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건네는 연극 대사.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이 대사는 영화 초반에 나온 선배의 대사였다. 똑같은 대사를 하루가 끝날 무렵 은희의 목소리로 다시 들었을 때의 와 닿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대사는, 은희의 연기력을 나무라던 선배가 아닌 오롯이 은희 인생에 해당되는 은희의 것이었다. 독백이 끝난 후 다시 등장하는 소설가 료헤이. 오늘은 은희에게도 최악이었지만 료헤이에게도 역시나 힘들고 고된 하루였다. 한국에 번역 출간 된 자신의 책이 지난 육 개월 동안 백 권 조금 넘게렸으며, 뒤늦게 출판사에서 주최한 출간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으나 객석에는 지나가던 관광객 두 명이 앉아 있을 뿐이고, 등장부터 불친절한 출판사 사장은 곧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어 출판사를 접어야 한다는 말까지 던진다. 그러면서도 오늘 하루 어땠느냐는 은희의 질문에 ‘낫 배드’라고 표현한다. 번역된 말로는 나도 잘 쓰는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사실 별로 좋지 않은 쪽에 더 가까울 때가 많다. 오늘 하루 최악을 경험한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직 걸어본 적 없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산책길을. 료헤이는 새로운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고 말하고, 은희에게 일본어로 들려준다. 모든 만남의 시작이 그러하듯 둘은 길 한가운데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나는 두 사람이 진심으로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좋은 관계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희가 료헤이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료헤이에게는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으니, 외국인이라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단 밥을 거른 료헤이와 맛있는 저녁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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