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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Feb 22. 2021

대한大寒

01.20.(양력), 태양 황경 300°

‘큰 추위’라는 뜻을 가진 절기이다. 일 년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소한 무렵이 가장 추워서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대한 끝에 양춘陽春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대한을 지나면 추위가 물러간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밖에는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송국 11층 건물에서 내려다본 상암동은 어느 장난꾸러기가 잔뜩 흔들어 놓은 스노우볼 속 세상처럼 눈보라로 가득 찼다. 나는 전면이 유리창인 복도 한쪽 소파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며 아직 오지 않은 진행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런 진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바깥에는 눈이 오고, 갑자기 내리는 눈 때문에 차가 막혀서 도착하지 못한 진행자가 있고, 초조한 마음으로 진행자를 기다리는 작가와 피디가 있는 방송국 풍경 말이다. 다행히 생방송이 아닌 녹음 방송이었고, 녹음 시간을 겨우 빠듯하게 남겨 놓은 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진행자는 이런 순간에 비로소 발휘되는 프로의식을 보여주듯 몰아쉬던 숨을 감쪽같이 삼킨 채 편안한 목소리로 오프닝 멘트를 읽었다.   


녹음 하루 전에 보내주겠다던 질문지는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A4 열 장짜리였다. 열세 개의 질문 중에 두 개의 답변만 빈칸이었고 나머지는 채워져 있었다. 작가가 진행자를 위해 미리 넣어둔 것 같았는데, 채워진 답변을 보니 내가 쓴 책과 인터뷰 했던 것 등등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찾아본 모양이었다.


방송작가도 적잖이 힘든 직업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노력의 산물을 실제로 받아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대본 쓰는 동안 지루하지나 않았다면 다행일 텐데. 아무튼 작가 덕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게 답변을 준비했지만 자려고 누우니 새벽 두 시였다. 감기 기운이 느껴졌고 생리까지 시작하는 바람에 팬티 속에 수면용 패드를 끼워 넣은 채 침대에 누웠다. 여유가 있다면 몇 번 더 연습하고 싶었지만 이런 건 사실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하므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오전 열 시 녹음을 위해 아홉 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버스 타고 가면 넉넉하게 도착해서 대본을 두어 번쯤 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류장에 거의 다 왔을 때 지갑을 놓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시 집으로 갔다. 지갑을 챙겨왔지만 급격히 피로해져서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그 전에 휴대폰으로 택시 앱을 다운로드 받았고,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했다. 입력 중에 카드 앞면을 스캔해야 하는데 카드가 지갑에 낀 채 나오지 않는 걸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뺐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택시를 타자마자 스멀스멀 멀미기가 올라왔다. 달리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는 사이에 상암동에 도착했다. 익숙한 길이었다. 지겹게 다녔던 운전면허시험 코스. 제일 길고 난이도도 높았던 D코스였다. 신호등 없이 점멸등만 깜빡이는 도로 위를 근처 직장인들이 테이크아웃 음료를 든 채 횡단하는 바람에 비보호 좌회전 구간만큼이나 어려웠다. 여기만 오면 무조건 속도를 늦추고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구경하는 것만 같았다. 구역질을 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멈췄다. 아홉 시 반. 녹음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방송국에 도착했다.


승강기를 타고 11층에 올라가자 눈이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건물 한쪽 면이 전부 유리창이어서 더 그렇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좌우로 긴 띠를 이루며 흩날렸다. 흡사 언젠가 눈여겨보았던 솜사탕 만드는 기계 속 같았다. 네모나고 투명한 기계 안에 설탕 한 스푼을 넣고 작동시키면 빠르게 회전하면서 가느다란 실이 마구 뽑아져 나오고 그 실이 젓가락을 휘감고 돌다 보면 어느새 솜사탕이 완성되었다. 솜사탕의 맛보다도 만드는 과정이 놀라웠던 게 기억났다.


작은 통 안의 세상을 지배한 원심력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눈을 바라다보았다.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는 건 이런 걸까. 하염없다는 말은 어떤 걸까. 멍 때리는 모양과 크게 다르않은 것 같은데 말이 참 예쁘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메스꺼운 속도 내려가고, 긴장감도 가라앉았다.


녹음하는 동안에는 대부분 내가 준비한 답변을 그대로 읽었다. 진행자가 즉흥적으로 건네는 질문도 있었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방송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게 그대로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나 역시 부스 안에 달려 있는 커다란 전자시계를 2초 간격으로 주시하며, 하려던 말의 일부분은 덜어낸 채 대답하고 넘어갔다. 작가가 가져다 준 녹차 한 모금 마실 틈 없이 생방송 같은 녹음을 마쳤다기보다는 해치운 기분이었다.


녹음 중에 딱 한군데에서 예상에 없던 말을 먼저 던진 사람은 나였다. 어떻게 도서관 사서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오랫동안 도서관 이용자로 지냈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자주 들었던 방송이 십 년 전 진행자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는 대본을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진행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진행자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단편 소설을 극으로 각색해서 성우들이 들려주고 저자가 게스트로 출연해서 진행자와 대화를 나누는, 작가 지망생이던 나에겐 보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¹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생경한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선뜻 하겠다고 한 건 그때 그 진행자였기 때문이었지만, 그 말은 부담이 될까봐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라는 말로 수줍게 마무리 지었다.  


녹음을 마치자 피디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진행자가 내 옆에 붙어 섰다. 찍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진행자가 내 오른팔을 살짝 붙잡고 있었다. 왠지 다정해 보였다. 매일 새로운 게스트와 만나는 일을 이십 년 가까이 해온 사람은 이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걸까. 진짜 프로다움은 이런 데서 나오는 걸까. 이렇게 일별하고 나면 나를 얼마나 기억할까. 진행자 옆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한결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느 새 눈이 다 그쳐 있었다. 짧고 요란한 눈이었다. 집으로 올 땐 버스 대신 전철을 타기로 했다. 전철역까지는 십오 분 쯤 걸어야 했지만 눈이 차곡차곡 쌓인 조용한 길을 거닐어보고도 싶었다. 걷다 보니 택시 타고 오면서 보았던 D코스가 다시 나타났다. 그렇게도 주행을 방해하던 테이크아웃 음료를 든 사람들은 눈 때문인지 날이 추워선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 좋을 것 같은 오전이었지만 어서 익숙한 동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무리 반복해서 연습해도 끝내 익숙해지지 않던, 여기는 D코스니까.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작가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출연 요청 메일에 쓰여 있던 ‘약소한 출연료’가 얼마인지, 언제 받을 수 있는지, 이걸 꼭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녹음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입금 내역을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이런 건 제안하는 쪽에서 먼저 알려주면 참 좋겠지만 누굴 탓하랴. 누가 알아서 해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다. 메일을 쓰자. 별 수 있나. 출연료 언제 주냐고 정직하게 묻는 수밖에. 아무리 반복해서 연습해도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이거야말로 난코스다. <끝>



1. 1985년 4월부터 2016년 5월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됐던 《라디오 독서실》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들은 기간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였고 김경란 아나운서가 진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방송에서 인사할 때 나도 같이 뭉클했던 게 기억난다. 오랜 친구 목소리처럼 듣고 있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진행자도, 작가도, 성우들이 연기하는 극중 인물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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