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에서

단편소설6

by 강민선

수빈은 아침에는 카페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사서자격증을 따기 위해 강의를 들었다. 사서가 되는 것이 수빈의 오랜 꿈은 아니었다. 수빈은 카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언제라도 다른 자리만 생기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서른이 넘은 카페 알바생은 자기뿐이라고 했다. 밤이면 취업사이트를 헤매던 그녀가 어느 날 문득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간단히 대꾸했다. 우리는 둘 다, 많이 읽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려면 사서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수빈이 말했다.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뜨면 수빈은 이미 없었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공복인 채로 집을 나선다. 전기밥솥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밑반찬이 있었지만 수빈과 나는 아침을 잘 먹지 않았다. 수빈은 매일 오전 일곱 시 반에 문을 여는 카페에 나가야 했고 나는 잠을 좀 더 잤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수빈은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자신이 사용한 그릇들을 설거지한 다음 옷을 갈아입은 후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갔다. 당연하게도 나는 언제나 수빈이 없는 빈 집으로 퇴근했다.

“도서관 사서 말이야, 얘기 들어보니까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 것 같아. 인간들 상대하기 싫어서 카페 그만두고 싶은 거였는데 도서관은 더하다는 거 있지. 책 읽는다는 사람들이 더 심하대. 자부심 같은 거겠지. 나 이런 책 읽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너희들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수빈은 이와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에는 모두 같은 말이었다.

“도서관 사서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그런 조용하고 한가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어쩌지,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고.”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수빈이 정말로 공부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지, 그냥 해본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빈은 주말 내내 숙제에 매달렸고 시험 기간에는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자기야, 이거 좀 재밌고 신기한 분야인 것 같긴 해. 책 속 내용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해도 세상의 모든 책들이 어떤 규칙을 갖고 배열되어 있는지는 알 수 있거든.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거지. 이게 한국십진분류표 강목표라는 건데 이걸 보고 있으면 세상을 수직적으로는 다 알지 못해도 수평적으로는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정도는.”

수빈은 A4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 안에는 수빈이 직접 쓴 낱말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빼곡히 적혀 있었다.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 반 별로 길게 줄을 선 초등학생들 같았다.

000 총류, 200 철학, 300 종교부터 800 문학, 900 역사까지 모두 열 개 종류 아래로 각각 아홉 개의 단어가 줄을 이루고 있었다. 도서관이라면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다녔기 때문에 이것이 책의 청구기호 앞부분이라는 것은 알았다. 도서관마다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분류표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희한한 기분이 들어.”

수빈이 말했다.

“어떤?”

“내가 아주 아주 작다는 생각.”

“작다?”

나는 수빈에게서 받은 강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수빈의 글씨체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머리처럼 작고 동그마했다. 작다?


“그래, 그 많은 것들 중에 나는 참 별처럼 작다는 생각.”


수빈은 이어서 말했다.

“400은 자연과학이야, 거기서 세분화된 410은 수학, 420은 물리학, 430은 화학, 440은 천문학, 천문학 다음은 지학……”

수빈은 이제 막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강목표를 암기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은 600, 특히 좋아하는 사진은 660, 우리가 자주 듣는 음악은 670……”

수빈은 침대에 누워서도 끊임없이 암기했다. 눈을 감고서도 암기했다. 불을 꺼도 멈추지 않았다.

“800은 문학, 810은 한국문학, 820은 중국문학, 830은 일본문학, 마루야마 겐지랑 오에 겐자부로는 830이야, 그치……”

수빈은 얼마 전까지 내가 읽었던 일본 소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생각하고 외우고, 외우고 생각했다. 수평으로 넓게 이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를 바로 앞에서부터 천천히 건너뛰는 모양새가 어린아이 같았다. 중얼중얼 수빈의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멀리 가버리기 전에 나는 팔을 길게 뻗어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내가 예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수빈의 천진난만함이 싫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듣지 않는데도 말이다.



수빈이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최근에는 거의 없었다. 늘 내가 먼저 곯아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수빈은 카페에 나가고 없었다. 수빈은 하루 여덟 시간씩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벌어온 돈이 우리의 생활비였다.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은 그의 두 배가 조금 넘었는데 절반은 저축을 했고 나머지는 전세대출금을 갚는 데에 쓰였다. 우리의 수입을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함께 계획을 세웠고 이것이 최선이었다. 한동안은 그렇게 잘 지냈었다. 일 년 정도가 지나자 수빈은 취업사이트를 뒤적이며 또 다른 최선을 찾으려 했다. 카페 일을 하기엔 자기가 점점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더 이상 카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육체적으로도 늙겠지만 수빈은 정신적으로도 그렇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점점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했고, 그렇게 해서 시작한 1년 과정의 사서교육이 이제 한 달 남아 있었다.

“사서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모두가 다 사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기본적인 자격만 갖추는 거지. 컴퓨터자격증이나 토익 점수처럼. 도서관에 취직하려면 이 두 가지가 더 필요할지도 몰라. 공부를 하는 건 재밌는데, 이걸 생각하면 숨이 막혀.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

수빈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말했다.

“사실 사서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말야.”

나는 늘 그렇듯 이럴 때 수빈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니까 계속 해봐, 라든가, 정 아닌 것 같으면 차라리 그만둬, 라든가 하는, 여러 대답이 동시에 생각났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답을 제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선택은 어쨌든 수빈의 몫이었다. 수빈이 편한 대로 선택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수빈이 물었다.

“자기, 마트 보안요원에 대해서 알아?”

나는 물끄러미 수빈을 쳐다보았다.

“그거 하려고?”

“내가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럼?”

“나 대신해서 일할 알바생을 뽑으려고 하는데, 지원자 이력서를 보니까 전에 마트 보안요원을 했더라고. 나이도 어리던데, 스물한 살, 어떤 일인지 궁금해서.”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직접?”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본인한테 직접 듣는 게 가장 정확하지 않겠어? 궁금하다면.”

수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이력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사람, 스물한 살, 전직이 마트 보안요원이었던 이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애 말야, 일단 일을 가르쳐주고는 있는데 뭔가 좀.”

수빈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그애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묘사라도 감추어둔 것처럼. 수빈에게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나 손님으로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수빈은 사람마다의 말투에 담긴 개성을 엇비슷하게 재현하려 했다. 포악한 사람은 포악하게, 교만한 사람은 교만하게, 얌체 같은 사람은 얌체 같이. 수빈의 명재연이 있고난 다음에는 당사자에 대한 나의 가차 없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런 쓰레기 같은 새끼. 병신 같은 놈. 커피에 가래침을 뱉어주지 그랬어. 바퀴벌레 한 마리를 쓰윽 헹궈주거나. 그러면 수빈은 “어떻게 그래?”라고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수빈은 그애를 말하면서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았다. 마치 그애의 표정을 흉내 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름은 유림이라고 했다. 스물한 살. 수빈보다 열 살이 어렸고,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어렸다.

“가장 어린 애가 생기를 북돋워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나 같이 늙은 사람 기를 다 빼먹고 있다니까.”

수빈은 잔뜩 지쳐서 말하기도 했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동공은 풀려 있고 입은 살짝 벌린 채로, 어떻게 흉내를 못 내겠는데,”

하지만 수빈은 제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홀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주문은 밀려 있는데 환장하겠더라고. 무슨 스물한 살이 그래?”

수빈은 몹시 화가 나서 말하기도 했다.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간단히 답했다.

“그런가?”

수빈이 혼잣말 하듯 말했다.

“그애 말야,”

며칠이 지났을 때 수빈이 말했다.

“손님이 와도 인사를 안 해. 오히려 시선을 피하면서 도망가는 거 있지. 어떤 날은 뒤돌아서서 종일 설거지만 해. 설거지할 거리가 없는데도 개수대 앞에서 떠나지를 앉아. 마른걸레질만 하거나……”

“서비스보단 청소에 소질이 있나 보지.”

“그렇다고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니야. 설거지는 물에 슬쩍 헹구는 정도. 머그컵에는 립글로즈 자국이 그대로 있고……”

나는 시선을 수빈 쪽으로 했다.

“그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니야? 그만 두게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번과 달리 수빈은 지쳐 보이지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건,”

수빈이 말했다.

“같이 일하는 다른 애들이 그애를 싫어해. 무척.”

“그래?”

“그애랑은 말을 안 하려고 해.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를 않아. 다들 수다스럽고 외향적인 편인데도 그래.”

유림이만 오면 하던 말을 멈추고 돌아선다는 것이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조차 소름끼친다는 이도 있다고 했다. 고작 스물한 살인데 소름은 과장 아닌가, 반문하면 수빈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수일이 지난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밖에 안 됐는데 그런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수빈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유림이가 나타나면 모두가 유림이처럼 변한다는 것이었다.

“좀비야 뭐야?”

“맞아, 그애의 별명.”



“그애 말이야, 유림이……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 같아.”

일주일 정도 지나서 수빈이 영혼을 잃어버린 얼굴로 말했다. 두 손은 노트북 키보드 위에 놓여 있었다. 달리 놓아둘 자리가 없어서 그 자리를 선택한 것처럼 손가락 끝에는 무언가를 두드릴 만한 의지라곤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어떤 억지스런 힘에 끌려 의미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가 금세 뒤돌아 자취를 지우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혹시 말야, 전에 했다던 마트 보안요원, 그 일이 그앨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수빈이 말했다.

“그 일이?”

“보안요원이 하는 일이라곤 말없이 사람들을 감시하는 거잖아.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에만 신경을 곤두서야 하는 거잖아. 그러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기, 바틀비 알지? 바틀비도 그랬잖아. 배달할 수 없는 우편물을 처리하는 일. 그게 바틀비의 성격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고……”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어떤 건지는 알겠어.”

“알겠지?”

수빈은 조금 흥분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세상의 보이지 않는 어떤 논리를 처음 발견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라도 그애를 이해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수빈의 의도는 선한 것이었다.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유림이는 그걸 스물한 살에 했단 말이지.”

“응. 일 년 동안.”

“그럴 수도 있겠네.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어.”

나는 대답했다. 수빈은 다시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인사라면 나도 좋아하진 않아.”

몇 분 지나지 않아 수빈이 말을 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웃으면서 인사하는 거 나도 못했어. 나도 할 수만 있으면 안 하려고 했지. 그런 내가 다른 사람한테는 웃으라고 말하는 거 웃기잖아. 사람 기분이라는 게 있는데 무조건 밝은 표정 지으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아가려면 그래야만 하는 때가 있잖아. 거의 모든 일이 그럴 수도 있고.”

내가 말하자 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만……”

수빈은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실 나는 지금도 그래, 여전히……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힘들어.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어. 어쩔 수 없는 건 끝까지 어쩔 수 없는 거 같아.”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수빈이 카페 일을 그만두려는 이유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유림이라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빈 역시 그 일을 그만 하는 것이 맞을지 몰랐다.

“숙제는 잘 돼가?”

수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 말이 없었다. 숙제 하겠다고 노트북을 켜 놓은 후로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진도가 그다지 안 나갔다는 것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수빈 씨가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저마다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몫이 따로 있는 거고. 목소리도 크고 표정도 밝은 젊은 사람들도 많잖아? 낯선 사람한테도 싹싹하게 인사 잘 하는 사람으로 다시 뽑아. 그런 다음에 수빈 씨도 그만 두는 거야.”

수빈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다가 그대로 수긍하는 듯 보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게 맞는 걸까?”

“응?”

“항상 고민하는 거 있잖아. 그게 정말 맞는 건지. 어떻게 해서든 그애가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게 더 맞는 것 아닌가, 하는.”

한숨이 나왔다.

“그럴 수 있잖아. 지금까지 아무도 그앨 신경써주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 한 명이라도 다르게 해주면, 친구가 생기면, 응?”

나는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왜 우리는 어떠한 것으로부터 이미 마음과 생각이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만 더’, 혹은 ‘뭐뭐 할 때까지’라는 유예 기간을 스스로에게 두는 걸까. 왜 그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입 속에서 충치를 발견할 때도 그랬던가. ‘조금만 더’, ‘충치가 더 심해질 때까지.’ 몸통을 찍은 엑스레이 필름 속에서 하얀 구멍을 보게 될 그 언젠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구멍이 더 커질 때까지.’ 수빈은 이미 오래 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벅찬 일이었다.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 현재를 견딜 수 없는 가운데 미래를 준비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것마저도 견딜 수 없는 현재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던 걸까. 어디까지나 현재였고, 가까스로 벗어나도 현재였다. 현재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미래는 표류하는 작은 공일까. 태풍이 불어 닥치면 바다가 삼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우리의 미래일까. 공은 다시 떠오를까?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니 수빈이 먼저 와 있었다. 집안이 환했다. 불이 켜진 집에 들어오는 게 얼마만인가 하고 생각했다. 수빈은 실내복 차림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수빈에게서 바디로션 향기가 났다. 다가가 뒤에서 안았다. 수빈이 몸을 움츠렸다. 딱딱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술 냄새나.”

“알았어, 씻을게.”

나는 일어나 겉옷을 벗었다.

“그냥 두지 말고 세탁기 안에 넣어.”

“응.”

나는 속옷차림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세탁기는 비어 있었다. 그 안에 겉옷과 양말을 투척했다. 어두운 통 안에서 술과 담배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입고 있던 팬티도 벗어서 던졌다.

“연말까지만 하고 그만하겠다고 사장한테 말했어.”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털며 욕실을 나오는데 수빈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더러 임신했냐고 하더라.”

수빈의 말투가 어쩐지 퉁명스러웠다. 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에 스킨을 발랐다. 안경을 쓰지 않아 모든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양 손바닥으로 두 뺨을 여러 차례 쳤다.

“새로 온 사람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수빈은 조용했다.

“유림이라고 했던가? 그 여자애 말야.”

나는 스킨 뚜껑을 닫고 수빈을 쳐다보았다. 수빈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내 말을 끊어?”

수빈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순간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사태를 파악했다.

“말을 끊은 게 아니라……”

“그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어제까지 같이 얘기했었으니까.”

“지금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잖아. 병신 같은 사장 새끼가 결혼도 하지 않은 나한테 임신했냐고 물었다고! 근데 왜 갑자기 그애 얘기가 나와?”

나는 침대에 앉았다. 눕고 싶었지만 수빈의 기분이 더 나빠질까봐 참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수빈 씨 말 끊었다면 미안해. 그러려던 거 아니었어. 알지?”

수빈은 대답 없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했다.

“870번이 뭐야?”

침대 위에서 내가 물었다. 그냥 한 번 물어보았다. 생각나는 숫자였고 답은 나도 몰랐다. 수빈은 대답이 없었다. 불이 꺼져 있어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아직 안 자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실은 잘 몰랐다. 한 침대에 누워 있기는 했지만 수빈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안 자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수빈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늘 침대 저 끄트머리에 바투 붙어서 잤다. 자다가 떨어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나더러 침대 밑에서 자라고 하면 나는 군말 없이 그렇게 할 텐데 그런 요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수빈에게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는지 살피려고 귀를 기울여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옆에 누군가 있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을 때,


“870번, 스페인 및 포르투갈 문학.”


먼별에서부터 울려 퍼진 듯 수빈의 목소리가 한참 만에 들려왔다.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고 최근에 더욱 확고해진 나의 생각을 수빈에게 들려주었다. 사서교육과정도 마치고, 카페 일도 끝나면 긴 일정으로 같이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겨울이라 많이 춥겠지만 그래도 남해안은 여기보단 따뜻하지 않겠느냐고, 부산도 좋고 통영도 좋고, 여름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좀 길게 다녀오자고, 나도 남아 있는 휴가를 다 쓰겠다고…… 수빈은 좋아하는 듯 보였다. 보이지 않았지만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내게서 등을 돌린 채였지만……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나를 죄의식으로부터 꼼짝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수빈의 말을 끊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수빈이 가 닿으려고 하는 생각의 끝을 살짝만 틀어주고 싶었다.

수빈은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는데 유산을 했다. 그 과정에서 자궁이 손상을 입었다. 몸속에서 꺼내야만 했다. 당시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도, 아이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그것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유보하고 싶은 일이었다.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 일에 관한 후회나 연민에 대해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가끔씩 수빈이, 마치 과거로부터 어느 날 툭 튀어나온 사람처럼 물어볼 때가 있었다. 느닷없이.

“만약에 그때 그 아이를 낳았다면……”

그럴 때마다 나는 수빈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다른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거나 그 즈음에서 멈추었다.



사위가 컴컴한 가운데 나는 잠에서 깨었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보다는 공간에 압도된 채로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 수빈이 없었다.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독서용 스탠드를 켰다. 언제 다시 일어나 읽은 것이었는지, 수빈의 책이 펼쳐진 채로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잠든 것일까.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가늘고 기다란 불빛이었다. 그 사이로 찬공기가 불었다. 11월이었고 난방을 켜 놓았기 때문에 그 작은 틈으로 불어오는 미세한 찬바람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냉장고 문을 닫지 않은 채로 오래 두었을 때 들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냉장고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수빈을 보았다. “수빈아, 거기서 뭐해?” 나는 수빈의 어깨를 잡았다. 수빈의 뒷모습이 하도 낯설어서 마침내 마주칠 수빈의 얼굴까지도 낯설까 잠시 두려웠다. 수빈은 가볍게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닫자 빛도 소음도 사라졌다. 나는 거실 불을 켰다.

“수빈아, 왜 그래?”

수빈은 말없이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수빈아.”

“물 좀 마시려고. 근데 물이 없네.”

그리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 보리차 티백 두 개를 담갔다. 가스레인지 위에 놓고 불을 켰다. 보통 때의 물을 끓이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묻자 수빈이 나를 쳐다보았다.

“출근 준비해야지?”

출근해서도 나는 수빈이 걱정되었다.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볼까도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계만 보았다. 지금쯤 카페에 있겠구나. 이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겠지.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가는 중이겠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일했다.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들은 이메일로 전달되었다. 퇴근해서 다음날 출근 전까지 거래처로부터 도착한 이메일이 오십여 통. 근무 시간 동안 도착하는 이메일이 백여 통. 한 통의 이메일을 처리하게 위해 평균 세 곳과 통화를 해야 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한 곳과 일곱 번 통화했다. 한 곳과 일곱 번 통화하는 동안 상대편 담당자가 세 번 바뀌기도 했다. 얼굴은 모른다. 목소리를 아는 것도 아니다. 모르는 편이 일을 하기엔 수월했다. 나는 간간이 수빈을 생각했다. 수빈은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이루는 선과 색을 안다. 목소리의 억양과 강세를 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수빈은 없었다. 카페 일을 마치고 집에 다녀간 흔적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개수대는 물기 없이 깨끗했다. 모든 게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풍경 그대로인 것 같았다. 침대 옆 독서용 스탠드 아래 펼쳐진 채 엎드려 있는 책의 위치까지도. 나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침대에 앉아 펼쳐진 장 가운데 눈이 가는 곳부터 읽기 시작했다. 몇 줄을 읽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조한 문장 때문인지 공기 때문인지 목이 텁텁했다.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새벽녘에 수빈이 보리차를 끓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는 언제나 그런 식이지?”

차가운 보리차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데 불현듯 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언가 잘못한 표정이 되어 물통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았다. 저 말은 수빈이 화났을 때 자주 하는 말이었고, 정확하게는 화남의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런 식’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나의 모습 중에 그녀를 화나게 할 만한 ‘그런 식’들. 그러나 ‘항상’이라고 했으니 ‘항상’ 하는 ‘그런 식’. 그런데도 나는 답을 몰랐다.

“얘기 그만 하고 자자.”

수빈이 단호하게 내뱉고 돌아누우면 그것으로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대화가 갑자기 멈추거나 유연하지 못하게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견딜 수 없어하는 쪽은 언제나 수빈이어서 나는 늘 조심하는 편이었다. 항상은 아니었는데 수빈은 그럴 때마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했다.

“무시는 무슨!”

수빈은 내 말은 듣지 않고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 자신이 카페에서 커피나 만들고 사람들 시중이나 든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로선 억울한 노릇이었지만 수빈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일이 몇 번 있고부터 나는 애써 조심했다. 어떤 때에는 대화에 너무 신경 쓰느라 두통이 오기도 했지만 수빈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보다 나았다. 그러나 얘기 그만 하고 자자고 말하는 수빈은 내게 그렇게 조심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런 마음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수빈이 갑자기 저렇게 나오면 나는 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할 걸까 복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수빈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껐다. 피곤하겠지. 피곤할 거야. 나는 그러고 만다.



“왜? 여행 가고 싶다고 노래를 했잖아.”

수빈은 대답이 없었다.

“여행이란 건 말야,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가는 거야.”

얼마 뒤에 수빈이 말했을 때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견딜 만하다는 거야?”

수빈은 나를 노려보았다.

“그 뜻이 아니잖아.”

“그럼 무슨 뜻이지? 아니, 같이 여행 가자는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나는 아무래도 수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이해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시비를 붙이고 다투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두 손 들었다. 하지만 내가 수빈을 위해서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저렇게 나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좋은 맘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여행은. 알겠어? 그건 절망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잔뜩 설레고 부풀어서 계획하고 가는 게 아니란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나는 얼마간 멍한 상태로 그게 무슨 말인지 헤아려보려 했지만 너무나 멍한 상태여서 머리에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 분여의 정적이 흘렀을까, 내가 물었다.

“내가 여행에 대해 설레고 부풀어서 계획하는 게 맘에 안 든다는 거지?”

수빈은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노력하고 있는 건 안 보여?”

더 이상은 나도 힘들었다. 수빈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에 이력을 지나쳐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넌 내가 하찮게도 여행에 들뜨고 여행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러니까 뭐 즐기러 다녀오자, 그렇게만 말하는 것처럼 보여?”

수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아니야? 그런 거잖아.”

찰나였지만 내가 정말 그러했는지 돌아봐야 하나 싶기도 했다. 내가, 여행을, 하찮게, 놀러나……

“아니, 우리가 왜!”

싸울 게 없어서 이런 것으로, 여행의 정의를 가지고, 그것도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누구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다퉈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다툴수록 나는 오류에 빠졌다. 심각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내 입에서 무엇인가가 발화되어 나가는 순간 그것이 오류라는 것을, 내가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은 이해가 되었고 그런 점에서 어쩌면 다툼은 좋은 일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다. 다투면 다툴수록 좋았던 기억은 점점 더 고대의 화석이 되어가고, 나쁜 것들은 계속해서 그 강도를 높여갔다. 나는 내가 무어라고 지껄이는지 알 수 없을 말들을 수빈에게 쏟아 부었고 수빈은 딴청을 피우며 대꾸하지 않았다. 수빈의 침묵이 나의 반응을 더욱 유치하고 철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을 때 가는 게 여행이라고? 여행이고 뭐고, 이젠 그런 맘 다 사라졌다.

이것이 수빈과 나의 모습이었다. 안 좋은 것일수록 더욱 빨리 물들고 전염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가장 싫은 점들만을 골라내 닮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 누가 누구보다 더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함께 이상해져가고 있었다. 뒤죽박죽으로. 노력? 노력은 살 길이 아니라 퇴락의 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상대의 입에서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말을 수빈이 먼저 해버릴까 봐 조바심 났다. 두 개의 느낌표로 존재했던 우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것 좀 봐.”

수빈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숙제를 프린트한 것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글자가 작아서 눈에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 수빈이 종이를 도로 뺐었다.

“이상해. 원래는 마침표를 분명히 찍었는데 다시 보니까 모조리 쉼표로 바뀌어 있는 거 있지.”

“그럴 리가.”

“이걸 보라니까. ‘다’로 끝나는데 다 쉼표로 되어 있잖아.”

“수빈 씨가 잘못 누른 거 아니야?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내가 쉼표랑 마침표도 구분 못해? 두 개가 뭐가 비슷하게 생겼어? 쉼표에는 이렇게 꼬리가 달려 있잖아. 징그러워. 어떻게 이러지? 분명히 마침표였는데……”

그리고 얼마 후 수빈은 카페 일을 그만두었다. 예정보다는 일렀지만 수빈에게 누적된 오랜 피로의 지층에 비하면 한참 늦은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에, 도서관에도 취업하기 힘들면 어쩌지?”

수빈은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그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너무 급히 생각할 것 없이 천천히 준비해보라고 말했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어서 최대한 마음을 담아 전했는데 그대로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수빈이 무엇을 하든 나는 괜찮은 게 사실이었다. 수빈이 다시 예전의 온화한 미소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빈이 사서교육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 나는 마트에서 화이트와인 한 병을 사들고 왔다. 비스킷 위에 치즈와 방울토마토 반쪽을 얹었다. 와인 잔을 꺼내며 수빈이 감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빈은 금세 취했다. 기분이 좋아서 그렇다고 했다.

“언젠가는 신나는 내리막이 나올 줄 알았어. 지금까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활용만 하면서 살아가는 때가 올 줄 알았어.”

“수빈 씨, 질문이 너무 무거우면, 해결은커녕 그 안에 빠져버리고 말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데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모두가 그래. 어쩌면 모두가.”


“만약에 그때……”

“또 무슨 얘길 하려고……”

“내가 말 안 했지? 의사가 그랬어. 그때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킬 자궁이었다고. 아이가 유산된 것은 그래서라고. 그러니까 순서가 바뀐 거야. 유산을 해서 자궁이 망가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망가져 있던 거였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수빈이 차분하게 말했다. 후회나 연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는 말했다.

“지긋지긋해.”

수빈이 와인 잔을 들고 건배를 청했다.

“우린 평생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나는 수빈의 잔을 맞받아쳤다. 수빈은 잠시 틈을 두어 고개를 저었고 다시 말했다.

“우린 평생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죽을 거야.”

“그 아이는 잘 살겠지?”

나는 잠깐 그 아이가 누군가 생각하다가, 수빈에게서 ‘그 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때가 떠올라 자동으로 긴장이 되었다가, 수빈이 말한 그 아이가 다름 아닌 유림이라는 알바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일편 안심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 거라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실은 잘 모른다. 그 아이가 정말 잘 살 수 있을지 어떨지.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곡절을 만나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수빈에게서 들은 그대로의 성격이라면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덧붙인 것 같다. 그러니 그 아이가 ‘바틀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바틀비’로 살다가 이내 ‘바틀비’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해줄 은총 같은 사건이 생겨주길 바랄 뿐.

“아직 스물한 살이잖아.”

“그래, 스물한 살.”

“창창하지.”

“그럼, 창창하지.”

“우리가 누굴 걱정해.”

수빈이 웃었다.

“근데, 내 스물한 살은 너무 어두워서 생각도 안 나는 거 있지.”

수빈은 이런 말을 했다.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들이 실은 나를 지탱해주고 있던 거였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것들이 정작 끝나버리면 정말 모든 게 끝나버리는 거였어.”


“끝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해?”

“벗어나고 싶어서 한참을 발버둥치고 마침내 벗어난 뒤에야 그것이 내 일상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런 생각 들면 참 어이없어. 진짜 나는 다른 곳에 있다고 늘 생각했는데.”

“진짜 수빈 씨는 어디에 있는데?”

“어딘가에.”

수빈은 이런 말도 했다.

“잠들기 전에 했던 대화, 눈으로 본 것, 생각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꿈으로 나타나는 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그렇게 해서 꾼 꿈은 꿈일까 현실일까.”

“요즘 그래?”

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들 많이 보자. 잠들기 전에.”

나는 말했다. 잠들기 직전에 수빈은 내 옆에 누워 말했다.

“근데 자기야, 나 너무 무서워.”

수빈이 내 팔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수빈을 한 팔로 감쌌다.

불행을 느끼기 이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수빈의 머리카락의 감촉을 오롯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을 오롯이 느낄 수 없음에 절망하며 생각했다. 상처라고 해봐야 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난 찰과상이 고작이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길목에서 해거름마다 서성이던 우리. 흔적들. 그래, 그것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는 어떤 서사가 기다리고 있을까.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저 끝은 어디일까.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것 따위 생각하거나 말거나 삶은 멋대로 흘러가는데,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아직도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각이 달라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수빈에게 팔 하나를 내어줄 때마다.



수빈이 일했던 카페에 가보았다. 퇴근길이었다. 수빈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송년 모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수빈에게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면서 재밌게 놀고 오라고 말했다. 수빈이 익살스런 딸아이처럼 두 손으로 돈을 받으며 “감사합니다.” 했다.

마지막으로 와본 게 육 개월쯤 전이었을까. 반 년 만에 카페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요즘 프랜차이즈 카페는 계절마다 인테리어와 메뉴를 바꿔줘야 한다던 수빈의 말이 떠올랐다. 수빈이 일하지 않는 카페는 내게도 다시 낯선 장소가 되었다. 나는 메뉴는 보지도 않고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우유가 들어가지 않으면 이 매장 음료는 조금 쓴 편이라고 했던 수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림이라고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찾지 못했다. 내 주문을 받고 카드로 결제를 해준 사람은 아주 상냥하고 깍듯했으므로 유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 손님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도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음료를 만들었고 다른 누군가는 컵 쟁반을 닦았고 재료를 담았고 설거지를 했고 쓰레기통을 정리했다. 누가 유림일까. 그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었지만 자세히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유림이 될 수 없었다. 수빈이 말한 유림은 저렇게 생동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주문하신 카페라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내게 두 손으로 쟁반을 내민 사람도 유림일 리가 없었다. 저 세 문장을 발음하는 동안 솔음을 기본 축으로 해서 억양의 높낮이가 열 번은 달라졌을 것이다. 좀비처럼 일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피를 들고 바에서 멀찍한 자리로 가 앉았다. 바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 안에서도 홀이 잘 보인다고, 이상한 손님의 행동 하나하나 다 관찰할 수 있다고 했던 수빈의 말이 퍼뜩 떠올라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은근슬쩍 다시 바 쪽을 쳐다보았다. 누구라도 눈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서, 그것에 신경 쓰느라 눈앞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일부러 멍한 표정으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듯이 흐릿한 눈빛으로, 좀비 같다고 했던 그 아이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