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일반

단편소설5

by 강민선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점점 쉽지 않아졌다. 그것이야말로 기연이 자신을 위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는 오후 한 시까지 적어도 여섯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일찍 문을 여는 카페에 가서 아침세트를 즐기며 책을 읽어도 되었고, 완성하지 못한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연은 그렇게 해왔다.

새벽 한 시만 되면 둔탁하고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배달이요! 짧고 불분명한 소리에 언제부터인가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부터 시작인 것이다. 새로 이사 온 옆집 사람은 새벽 한 시면 배달음식을 먹으며 텔레비전의 볼륨을 키웠다. 대부분 공개방송 형식으로 진행되는 쇼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의 과장된 목소리와 방청객의 함성은 밤이 깊어도 계속되었다. 기연의 기상 시간은 변함없었지만 한참을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잠을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시간들이 하수구 속으로 그냥 흘러가버렸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기연은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몸은 여전히 이불 속이었다. 간절기가 지나고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기연의 기억에 가을은 없었던 듯하다. 느닷없이 추워졌다. 계절 탓인가. 탓을 돌릴 수 있다면 상대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탓을 돌린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삶에 대한 불만과 무기력은 순전히 그녀가 감당해야 했다. 책을 펼칠 수 없었다. 어떤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쓰다 만 시나리오는 유효기간이 지난 식빵처럼 냉동실 한구석에서 얼어가고 있었다. 매일 새벽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 한집살이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깝고 시끄러운 소리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지.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어.

기연은 이불 속에서 번개의 속도로 무언가를 생각했다. 하루 이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옆집 때문에 자신의 삶이 틀어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수없이 꾸며온 각본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일곱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새벽 네 시가 지나서야 잠잠해졌으니 옆집은 지금쯤 곤한 잠에 취해 있을 것이다. 기연은 라디오를 켰다. 마구잡이로 주파수를 돌리다 가장 크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이 나오자 볼륨을 키웠다. 세탁기를 돌렸다. 돌아가기 시작한 뒤에 빨랫감들을 집어넣었다. 청소기의 스위치를 켰다. 작은 방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청소기였다.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기연은 구석구석 청소기를 들이밀었다. 책장 칸칸이 쌓여 있는 먼지들이 때 아닌 폭풍을 맞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젖은 걸레 하나면 충분히 닦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기연의 목적은 청소가 아니었다.

옆집 사람이 찾아오면?

저 원래 이 시간에 청소해요. 다들 이 시간에 청소하고 살지 않나?

조금이라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새벽에 자신이 한 짓을 알 것이다. 인연 없는 우리가 함께 묶고 있는 곳이 방음이라고는 창호지 수준의 다세대주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된다고 기연은 줄곧 읊조렸다.

옆집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른다. 다시 눈을 떠보니 오전 열한 시였다. 기연은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염색한 지 서너 달은 지났을 것이어서 더 부스스해 보이는 머리카락, 퉁퉁 부운 눈과 비죽비죽 제멋대로 자리잡힌 눈썹, 바짝 마른 입술과 그 주변에 버짐처럼 피어난 저것은 뭐지. 지난 밤 수분크림을 바르지 않은 채 옆집과 면하는 벽만을 노려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지지난 밤에도. 그 전의 숱한 밤들에도.

자기 전에 바른 수분크림이 다음날 아침 피부상태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이제 곧 어떠한 크림에도 아무런 영향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연은 자신이 그 중간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에 하나였다. 그것은 기연을 좌절하게도 만들었지만, 불필요한 욕망들로부터 안전하게 달아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은 직선이라는 점.

수분크림 따위 바르지 않아도 버짐의 흔적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기연에게는 동거하는 사람이 있었다. 함께 밥을 먹었고, 잠을 잤고, 어디든 함께 움직였다. 노트북 한 대로 두 사람이 번갈아 사용했다. 노트북의 주인은 그였으므로 기연은 그가 먼저 할 것을 다 한 뒤에 공책에 메모해 둔 것을 옮겼다. 옮기는 것만으로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번도, 그녀가 기억하기로 단 한번도, 노트북 때문에 두 사람이 다툰 적은 없었다. 자기 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죽자 노트북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은 노트북만이 아니었다. 그의 일상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물건들에게 그녀는 오랫동안 주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품던 베개에게, 몸을 덮어주던 이불에게, 컵과 칫솔에게, 양말과 카디건에게, 안경과 담배에게. 그것들은 고스란히 기연이 완성하고 싶은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안에서 그것들은 주인을 잃은 어린 짐승이기도 했다가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어버이이기도 했다. 기억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게 될 때까지, 그녀는 동거자가 떠난 집에 혼자 남아 그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는 그 일과도 멀어졌다. 기억이 기억나지 않는 때는 없었고,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게 되는 때도 없었다. 기억은 다른 기억을 박차고 일어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죽음은 네 개의 딱딱한 다리를 가진 의자처럼 명백해졌다. 죽음이라는 진원을 중심으로 기억은 수레바퀴처럼 도는 진앙이었다. 기억을 분출하게 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기연은 베개와 이불, 컵과 칫솔, 양말과 카디건, 안경과 담배에 대해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모두 치웠다. 모두 버렸다. 노트북만은 쓸모가 있었으므로 남겨두었다. 안에 들어 있던 그의 사진과 글들을 모두 지우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기연은 출근길 전동차 안에서 깜빡 졸았지만 내릴 역을 지나치진 않았다. 날이 추워진 뒤부터 한결 따뜻해진 의자에 엉덩이만 붙이면 꾸벅 졸았다. 밤에 못 잔 잠을 아침에 더 잔 셈이니 수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수면의 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전동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하자 어디서도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수요일 오후 한 시의 예술영화관은 화요일 오후 한 시와 다르지 않았다. 월요일도 마찬가지였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기연은 문을 열고 두 평 남짓의 매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그녀가 온종일 앉아 있던 자리는 얼음처럼 싸늘해져 있었다. 의자 아래에 있는 히터의 전원을 켜고 매표소 안에 온기가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림은 짧았다. 두 평이라는 공간은 그래서 적당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안에서 그녀가 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의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한 채로 보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 일을 하면서 얻은 습관이었다. 투명한 유리창 안에서 무심히 바깥을 내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관찰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계기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저들 편에서는 자신이 유리창 안에 갇힌 동물 신세였다. 누가 보더라도. 저들은 다수였고 그녀는 단 한 명이었다. 저들이 서 있는 공간에 비하면 이곳은 턱없이 작았다. 벗어날 수 없다면 최소한 거울은 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이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한동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대가 열과 석을 말하며 값을 지불하면 그에 해당하는 표만 내주었다. 무언가를 주고받는 손. 기연은 그것만 보기로 했다. 손만으로도 충분했다. 성별과 나이는 기본, 하는 일과 성향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소소한 재미였다. 손목을 감싼 옷깃의 형태와 거기서부터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향수냄새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의 차를 몰고 왔는지 대중교통을 이용했는지, 애인과 함께 왔는지 친구와 함께 왔는지, 아니면 혼자 왔는지.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상대가 뒤로 물러설 때쯤 그녀는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쯤 되면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었다.

익숙한 사람이 찾아오면 어렵지 않게 눈을 맞추기도 했다.

바로 이 사람. 기연은 하마터면 인사할 뻔했다.

오후 두 시에 상영하는 첫 번째 영화를 늘 혼자 보러 오는 남자였다. 그는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익숙한 인상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상이기도 했다. 검은색 뿔테 안경, 작고 기다란 눈, 눌러쓴 야구모자 아래로 숱이 많아 보이는 더벅머리가 삐죽 삐져나왔고, 배낭은 크고 무거워 보였다. 항상 같은 추레한 차림이었다.

그의 손만은 참 곱다고 생각했다. 창백할 정도로 희었다. 어디 아픈가, 목소리는 남자인데 남자 손이 이렇게 고울 수가 있나, 아직 학생인가, 군대는 다녀온 건가. 상대가 뒤로 돌아서기도 전에 기연이 눈을 든 것은 손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만 치켜드는데 하필 마주칠 게 뭐람.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부주의하게 닫아버린 서랍 사이에 손가락을 찧을 때처럼 부끄러운 통증은 오래갔다.

그는 같은 영화를 꼭 두 번씩 보고 갔다. 기연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빈자리는 언제나 남았고, 그나마 사람이 많이 드는 주말에는 그가 오지 않았다. 평일 한낮에 같은 영화를 두 번씩 보는 사람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E열 6번.

기연은 그가 말하기 전에 속으로 생각했다.

E열 6번으로 주세요.

남자가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기연은 발권한 표를 창구 밖으로 내밀었다. 그는 항상 그 자리를 찾았다. 정중앙에서 약간 왼쪽이었다. 정중앙은 일부러 피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도 혼자 영화를 볼 땐 그랬다. 정중앙은 눈에 잘 띄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모습을 눈에 띄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먼 이야기였다. 동거하는 사람이 생긴 이후로 영화관에 혼자 가지 않았고, 그 사람이 떠난 이후로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영화관 직원이 되면서 상영 중인 영화를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근무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갔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도 영화는 볼 수 있었다. 집에는 모아놓은 영화 DVD가 많았다. 좋은 시나리오를 쓰려면 일단 많이 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과 그녀는 삼 년을 같이 살았다. 영화는 주로 고전이었고 주로 흑백이었다. 그런 것들을 다 어디서 구해오는지. 그녀는 거의 보지 않았다. 그녀가 쓰고 싶은 시나리오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도 누구나 쓸 수 있는 작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이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고 가벼운 이야기.

E열 6번의 남자는 이번에도 두 번째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나올 사람은 없어 보였다. 기연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관객의 수를 헤아리면서 노트에 ‘E열 6번’이라고 적었다. 그녀의 무선노트에는 그렇게 의미 없이 적어 놓은 단어와 문장들이 먼지처럼 수북했다. 훅 하고 불면 다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들. 간 데 없이 사라져버릴 것들. 그런 말들은 오직 그녀의 노트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토로한 적 없고, 어디에도 내뱉은 적 없는, 그렇다고 진심이라고 할 수는 없는 말들 사이에서 ‘E열 6번’은 난데없는 단어가 될지도 몰랐다.

간간이 사람들이 표를 사러 왔다. 기연은 잠에서 깬 듯한 눈으로 그들의 손을 바라보았다.



E열 6번 자리에 아직 사람이 있었다. 낮에 본 그 야구모자였다. 기연은 가까이 갔다. 남자는 잠들어 있었다. 옅은 숨소리, 간헐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도 들렸다. 기연은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었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영사실 직원도 퇴근했는지 상영관 안은 온통 깜깜했다. 깜깜할 줄 알면서도 기연이 여기 들어온 것은 순전히 남자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영화가 끝나고, 세 번째 영화가 또 끝나도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불안한 터라 남자가 코를 골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화를 보다가 기절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영화관에서 기절한 채 다시 깨어나지 못한 한 사람에 대해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저, 기요.

기연은 멀찍이서 속삭이듯 불렀다. 한 번 더 불러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남자가 눈을 떴다. 온통 깜깜한 가운데 그의 눈만이 반짝 빛났다. 고요함을 감지했는지 그가 서둘러 일어섰다.

아, 죄송합니다.

배낭을 멘 채로 기연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여기로 나가시면 돼요.

기연이 출구를 가리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그리로 나갔다.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연은 숨을 골랐다.

잠이 든 것처럼, 오래전 그날 그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가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동안 바로 옆에 있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스크린 속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그녀는 울 수도 없었다. 저, 기요, 저기요, 깨어나지 않는 그를 보며 그녀는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음 말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상태를 살펴주던, 그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아채버린, 선뜻 말 못하던 낯선 이의 얼굴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어두웠다.

남자가 나가고, 기연은 얼마간 상영관에 남아 정리를 했다. 칸칸이 둘러보며 떨어진 물건이나 쓰레기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퇴근 전에 늘 하던 일이었다. 든 관객이 많지 않은데다가 음식반입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어서 쓰레기는 적은 편이었다. 오늘은 유실물도 나오지 않았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거울로 전신을 비추어보았다.

집 말고…… 다른 곳에 갈 수는 없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근할 때의 얼굴에는 없던 생기가 느껴졌다. 출근할 때의 얼굴이 하루 일을 마친 사람의 것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한숨 푹 자면서 좋은 꿈을 꾸고 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침에는 그렇게 푸석푸석했던 피부가, 부스스했던 머릿결이, 말라서 버석거렸던 입술이, 근처에 돋아난 버짐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기연은 외투 소매를 길게 빼서 거울을 슥슥 문질러보았다. 이건 착각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조차 없다면 인생이 정말 무의미해져버리기 때문이겠지.

무의미에 대해서라면 이골이 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으로도 삶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의미를 경험한다. 무의미라는 것은 무언가를 증명해내고 싶은 이들에게 매달 날아오는 카드명세서 같은 것. 무의미를 견디기 위해 또 다시 다른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는 것은 카드돌려막기 같은 것이겠지. 무의미란 결국 증명하고 싶은 내 욕망의 값이다. 반드시 치러야 하고, 어떻게도 면제받을 수 없다. 결제를 미루면 이자가 분다. 그 동안 모르고 미뤄두었던 것들이 저마다 체납고지서를 내밀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모두 같은 얼굴. 나의 얼굴. 기연은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늘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집밖에 없을 거라고 체념했다.

탈의실에서 나오는데 야구모자와 다시 마주쳤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옆으로 비켜서자 남자가 같은 방향으로 주춤 다가왔다.

저 혹시, 잠깐만 시간 좀 내줄 수 있나요?

기연은 흠칫 놀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복도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라고는 둘뿐인 것 같았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물건이라도 놓고 간 건가.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데요?

기연은 복도 끝을 주시하며 말했다. 건물 출구와 연결되어 있어 바깥이 내다보였다. 지나다니는 차들의 빨갛고 노란 불빛이 간간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좀 창피한데, 제가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거든요. 같은 일을 하시니까, 몇 가지만 물어보면 되는데요, 일부러 기다렸어요.

기다리다 잠이 든 건가.

기연은 생각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누구도 이런 일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영화를 보다가 잠든 사람을 깨운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일이 전에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누군가 영화를 보다 잠이 들어 그녀가 깨울 때까지 나오지 않고, 집에 가려는데 할 말이 있다며 붙잡았던 적이 전에도 있었다면 그녀는 뻔한 수작이라 생각하고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호기심이 동했다. 숙련된 절제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막았을 뿐.

기연은 대답했다.

너무 늦었는데요.

시계를 확인할 것도 없이 열 시 반은 넘었을 터였다. 열한 시 전에는 집에 도착해 더운 물에 몸을 씻고 수분크림을 듬뿍 바른 뒤에 잠을 청하는 것. 내일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늦었구나, 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뒤돌아섰다.

그때 불쑥, 긴 터널 같은 복도와 그 안을 메운 정적을 뚫고 무언가 휙 지나갔다. 사람은 아니었다. 바람이었나. 그것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무게가 만들어낸 웜홀을 빠르게 통과해 마침내 두 사람이 이곳에서 만나기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오르려는 것처럼, 같은 공간에 먼저 와서 기다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시간은 직선이라는 기연의 신념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기연은 알지 못했다. 자기를 겨냥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만 모르는 일들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감각을 일찍 차단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평소에 통증을 자주 호소하진 않았나요?

의사의 물음에 기연은 대답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연이 기억하는 한 그는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의사의 무표정이 기연을 꾸짖는 것만 같았다.

협심증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지요?

협심증, 이라고 기연은 속으로 꾹꾹 발음해보았다.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놔주지 않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꽤 오랫동안 앓으셨어요. 항고혈압제도 꾸준히 복용하고 계셨던데.

정말 몰랐어요? 하는 듯한 의사의 얼굴. 기연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가 약을 먹는 모습도 기연은 보지 못했다. 머릿속이 의사 가운처럼 하얘진 기분이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정말 몰랐어요. 왜 몰랐을까. 우리는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았던가.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움직이고, 그게 우리가 함께하는 일이었고, 함께하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알지 못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곳, 그가 살아 숨 쉬게 하는 그곳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말 몰랐어요. 그가 죽고 나자 알게 되었다. 번뜩이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왜 항상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는지. 방청소와 쓰레기분리수거를 왜 늘 도맡아 했는지. 깊은 밤 깨어 있는 그를 보면 뭔가 생각이 나서 옮겨 적고 있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구나. 허기가 져서 뭔가를 해먹는구나. 바람을 쐬는구나.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러고 말았던 자신의 무신경함. 무감함. 무심함. 그리고 배신감. 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가. 왜.

기연은 자신이 평생 동안 해야 할 ‘왜’라는 질문을 그때 다 해버려서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어진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궁금한 것이 생겨도 그때처럼 간절하지 않았다. 정확한 대답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질문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직선으로 흘렀다.

상류에서 하류로.

지상에서 지하로.

기연은 매일매일 건물 꼭대기에서 눈을 떠 지하 주차장에서 잠드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았다. 어떤 층은 멀미가 났다. 어떤 층은 전망도 좋고 안락하기도 했다. 머무는 시간은 짧았다. 어떤 시간은 길었는데, 멀미가 나는 층이 그랬다. 그래도 견뎠다. 곧 다시 내려갈 것이므로.

땅이 꺼졌나.

자리에 누우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땅이 꺼진 건가. 자신이 누운 자리만 너무 밑으로 빠져버린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지만 역시 견뎠다. 내일이면 또다시 꼭대기에서 눈을 떠 미친 듯이 비상계단을 내려와야 할 테니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일정하게, 일정하게.



문을 연 곳이 얼른 보이지 않았다. 밤은 낮보다 훨씬 추웠다. 어디로든 들어가야 했다. 두 사람은 영화관 근처 24시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동안 기연은 스스로가 낯설었다. 낯선 사람과 자신이 동행하고 있다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는 남자를 붙잡은 사람은 기연이었다. 어떤 게 궁금한데요?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주 낯선 사람은 아니었지만, 처음 볼 때부터 익숙한 느낌의 남자였지만,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게만 느껴졌다. 느낌으로서만 존재했던 것이 불현듯 실제로 나타날 때의 당혹감과 마치 자신의 내면이 보란 듯이 펼쳐진 것 같은 부끄러움이 보태어지면서. 기연은 그것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관찰자의 상태가 되어 남자 앞에 앉았다.

커피나 차 좀 드실래요?

남자가 먼저 물었다.

차가 좋겠어요.

밤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잤다. 남자가 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그렇다고 녹차나 홍차를 고르면 곤란한데. 기연은 오늘 밤에도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씨름해야 할 것이 생각났다.

계산을 마친 남자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개의 종이컵을 간이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민트고, 하나는 캐모마일입니다.

기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민트를 골랐다.

학생인가.

기연은 묻지 않았다.

밝은 곳에서 가까이 보니 짐작보다 어려 보였다. 양 볼이 턱 주변까지 빨갰다.

글을 쓰는 사람인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질문을 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라고 재빨리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잠자코 앉아 있는데, 오랜만에 남자를 소개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라고 할 것도 없이 기연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는 다소곳한 자세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탈의실 복도에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던 남자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수줍어했다. 이곳이 너무 밝아서일까. 기연은 더욱 자세히 남자를 관찰할 수 있었다. 다시 보니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단해 보였다. 오늘 하루만의 피로는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남자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을 맞추었다. 눈이 작았다. 작고 가늘었지만 못생긴 눈은 아니었다.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라인도 뚜렷했다. 순간이었지만 기연은 남자의 눈매가 제법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어느새 기연은 너그러워져 있었다.

유리창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기연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다른 곳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제자리를 더듬듯 기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온갖 것을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라고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남자의 질문이 하도 묘해서 금방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진 것이라고, 그러나 걸려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무엇을 하는지…… 수요일이 쉬는 날이지요?

휴일에는 하루 종일 창문을 머리에 두고 누워 해가 들었다 나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라고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남자가 자신의 휴일을 알고 있는 것이 어쩐지 자연스러워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해가 들었다 나갔다 들었다 나갔다, 해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일 때도 있고 비행하는 새처럼 역동적일 때도 있어요. 그것을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비오는 날에는 방안에 혼자 있기 울적해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 하루가 길게 느껴질 때도, 짧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라고, 진짜 시간은 정해진 속도대로 오차 없이 흐르고 있다고 여기고, 또 다지면서, 묵묵하게.

죄송합니다. 너무 사적인 질문들이네요.

기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쯤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서야 상상으로도 쓸 수 있지 않나요?

기연이 천천히 물었고 남자가 조금 뒤에 대답했다.

저는 상상을 못합니다.

기연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으로.

상상이 안 됩니다. 내가 그 안에, 유리창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요.

…….

제가 궁금한 건 이런 것들이에요. 그 안에서 당신을 웃게 하는 건 무엇인지, 슬프게 하는 건 무엇이고, 웃음과 슬픔을 어떤 식으로 표출하고 다스리는지. 당신은 온종일 유리창 안에 있는데, 누구든 당신의 얼굴과 표정을 볼 수 있는 곳에서 당신도 자유를 느낄 수 있는지. 그저 초연함인지. 당신의 일이 당신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지. 반대로 당신의 일상이 그 일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기연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이런 평범한 것들인데, 저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어요. 상상하는 순간 머릿속이 깜깜해져요. 상상해버리는 순간 당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기연은 할 말이 없었다.

남자도 할 말을 다 했는지 말을 멈추고는 몹시 곤혹스러워 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럴 만도 하다고, 무척이나 난처할 거라고 기연은 생각했다. 동정일까. 속을 들켜버린 사람을 향한 연민인가.

사적인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개인에 대한 관심 맞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마세요. 오해 말고 들어주세요. 사실은 당신을 알고 있어요.



종이컵에 든 민트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기연은 전동차에 올라탔다. 다 식어버린 민트차는 더 이상 향이 퍼지지도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지도 않았다.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캐모마일차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거기도 다 식어 있겠지, 생각하며 기연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동차는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물 위에 별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잔뜩 떨어져 빛나고 있었다. 남자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창에 비친 두 사람의 눈이 슬쩍 마주치다 어긋났다. 기연은 창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바투 다가섰다. 창에 입김이 번졌다.

이제는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여전히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한 남자 옆에서 기연은 희한하게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불편한 상황인 것만은 맞았다. 그것을 억지로 해소하기 위해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질문을 하고, 웃음을 유발하고, 오늘의 만남에서 의미를 찾고, 좋은 인상을 남겨준다거나, 훗날을 도모하는 식의,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허무한 의식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말이 없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자의 커다란 배낭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왜 나를 기다린 걸까. 누군가를 기다려서 얻어야할 정도로 그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오늘일까. 그 많은 날들 동안 왜 모른 체 했던 걸까. 그리고 왜 오늘에서야…… 기연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영화관에 나타나지 않을까. 다시는 못 보게 될까. 기연은 생각을 지웠다. 그런 생각들을 지워야 할 시간이었다. 이미 많이 늦었다.

한강을 지나고 두 번째 역에서 기연은 내릴 준비를 했다.

남자가 기척을 했다.

기연은 남자를 향해 목례를 했다.

남자도 기연을 향해 목례를 했다.

전동차 문이 열렸다.

기연은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닫힌 문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전동차가 다음 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편의점 간이테이블에서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기연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게 왜 미안한 일인가요.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니까요.

그게 어떻게 안 좋은 기억인가요.

남자는 해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된 그날, 잊을 수 없는 그날, 기연이 영화관에서 도움을 청한 사람이었다. 기연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119로 전화를 걸어 준 사람도, 찾아온 요원에게 상황을 말해준 사람도 그였다. 넋을 잃고 허둥대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제든 그녀를 붙잡아줄 준비를 하던 사람도 그였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영화관은 이듬해 봄에 문을 닫았다. 기연은 인터넷 기사로 소식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덧글을 남겼다. 서울의 명소로 손꼽을 만한 장소 중 하나였다. 대형 멀티플렉스관이 이곳저곳에 지어지고 또 지어지던 시기였다. 문을 닫기 일주일 전 고별 상영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전영화들을 개봉했지만 기연은 가지 않았다. 갈 수가 없었다.

거기 가면 혹시 당신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안부가 궁금했어요.

기연은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공포에 질렸을까. 죽음의 문턱에 오른 사람처럼. 이미 저 편으로 간 그는 차라리 평온했을까. 그곳에서 나를 보았을까. 그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있는 힘껏 부정하며 눈을 떠보라고,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외쳐대던 나를 그는 보았을까.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던 걸까. 그날, 또 다른 누군가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수년이 지난 오늘 기연은 알게 되었다. 오늘은 정말 놀라운 날이구나. 잠자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연은 유리창 저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스라한 기분에 잠겼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안 좋은 기억인가요.

이렇게 대답하는 자신이 기연은 조금 놀라웠다. 내릴 역에서 걸음을 멈춘 것도 순식간의 결정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거나, 이미 자정을 넘었을지도 몰랐다. 기연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전동차가 어느 역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미로 속에 갇힌 기분으로 어두운 창밖만 내다보았다. 밖은 온통 어둠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자기 얼굴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망설이는 얼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