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 20분 전

단편소설10

by 강민선

공연 시작 20분 전에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고, 손가락 관절을 푸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인이 새로운 책들을 갖다 놓았던가? 책장의 모양이 바뀌었던가? 아니면 책의 배열이? 무언가 다른 기운을 느낀 건 아마도 그 전에 마신 맥주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한겨울인데도 목이 탔고, 나는 클럽에 들어가자마자 맥주를 주문했다. 긴장했나?

긴장감을 완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 하필이면 책을 집어 든 것이 문제였을까? 누군가는 이런 나를 두고 활자중독증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이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증’이라는 말을 유행처럼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니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당연히 병원에 가 본다거나 치료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한 손에 쥐어든 그 책을 읽으면서 어디서든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머리로 의미를 파악하고, 나의 기억까지 끄집어내 가며 되새김질하는 이 ‘증상’을 기필코 없애야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사람이 많은 주말 공연을 앞두고는 말이다.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은 삼십 대 중반쯤 되는 시인이다. 다른 곳과 달리 클럽 안에 상당한 분량의 책들이 꽂혀 있는 건 그 이유다. 클럽을 찾는 이들도 대부분 조용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었고 공연하는 밴드들도 시끄러운 노래는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고정으로 연주를 하게 된 것도 시인과 사람들, 그리고 내 음악의 성향이 어느 정도 통했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운 음악을 하지 않는다기보다, 내가 지닌 악기라곤 통기타와 내 목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곳에서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책. 가끔 그곳의 책들은 음악을 들려주는 스피커나 앰프 같기도 했고, 손님이 별로 없을 땐 그것들이 곧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앞서 나온 밴드들이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늘 책을 꺼내 읽었다. 그저 방문한 손님처럼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다가 내 차례가 되면 그 자리에서 기타를 들고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예전 얘기다. 이젠 웬만큼 팬도 생겼으니 그런 나를 모를 리 없다. 공연 시작 20분 전에 집어 든 그 문예잡지에는 내가 아는 이와 같은 이름이 표지에, 그것도 굵은 글씨로 찍혀 있었다. 이승우. 특집기사로 다뤄진 모양이었다.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다른 소설가의 이름이기도 해서 내가 생각하는 그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 이름 석 자 위에 언뜻 스치는 그의 얼굴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놀란 건 그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승우의 글을 읽는 동안 이미 비어 버린 맥주병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는지 모른다. 더 시키기엔 공연 순서가 코앞이었다.



승우는 시나리오 작가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 왔던 그는 서른이 되자 일찍 영화 쪽으로 발을 돌린 선배를 따라 연출부를 드나들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고 몇 편이 영화화되었다. 물론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진 못했다. 그의 시나리오는 유명 영화감독의 손에 들어가 대대적인 수정 작업을 거쳐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고 자연스레 감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발언권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시종 영화판을 욕하면서도 그곳에 몸담고 있었고, 그곳을 빠져나오기를 원하면서도 그곳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그는 그곳을 늪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늪은, 그를 단련시키기는커녕 점점 나약하고 모자라게 만들었다.

승우는 매번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나에게 보여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시놉시스였다. 그는 소설을 쓰던 버릇 때문인지 시놉시스를 소설처럼 써 내려갔고, 나는 오래전 그의 소설을 읽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담을 안고 그의 글을 읽었다. 그는 입으로는 신랄하게 비판해 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정말 원하는 게 비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좋다, 괜찮다, 쓸 만하다 등의 말 한 마디에 아이처럼 반색을 하는 그의 면전에다 대놓고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럴 경우, 아무리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어도 그는 몇 날 며칠을 우울해했다. 그의 그런 성격을 고칠 수만 있었다면 그는 진즉에 작가가 되었을 거라고 늘 나 혼자 생각했었다.

시작은 제법 진지했다. 승우는 자신의 외부로부터든 내부로부터든 어떤 실마리가 보이기만 하면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필요에 따라 먼 거리도 몸소 뛰어다녔고, 낯선 사람과도 서슴없이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가 되면서부터 말썽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뭐랄까, 새롭지가 않았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실제로 작품이 되어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건 그가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의 머릿속에는 너무나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이야기들이, 이미지들이 넘치게 들어 있었고, 그 많은 것들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실패한 그는 기존의 작품과 자신의 상상을 자꾸만 혼동했다. 그의 글을 읽고 안 좋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사실만큼은 알려줘야 했다. “이거 지난번에 같이 본 영화랑 똑같은 내용이잖아…….” 그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아, 그랬지, 그랬어…….”

승우의 이러한 증상은 무슨 ‘증’일까. 표절 중독증? 의도한 표절은 아니니까, 표절 불감증? 원인을 밝혀 나가보자면, 작품 과다 수용증? 사회적으로 봤을 때에는, 작품 과다 양산증? 그래, 작품 과다 양산증에 걸린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면 그의 혼동쯤이야 당연한 거고 기시감 즐비한 그의 글을 영 이해할 수 없지만도 않을 것이다. 허나 만약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딘가에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지어지고 있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이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천재들은 과연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전부가 사회 탓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가 이야기꾼으로서의 자격 혹은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역시 혼자 생각했다.

승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어느 날엔가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단순히 지적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는 확연히 다른, 기저의 불안함을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늘 그랬듯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는 내 기타 소리가 듣기 좋다며 부탁이니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나는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멜로디에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거창할 건 없고 그저 힘을 내라는 말이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그는 흠뻑 젖은 두 눈을 훔쳐댔다.

“기타는 언제부터 연주한 거야?”

승우가 여전히 젖어 있는 눈으로 물었다. 그를 알게 된 지 9개월 만에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었다. 그는 자기 글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악기상을 하셨어. 어릴 때부터 보고 만진 게 기타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소리도 기타 소리고.”

그가 관심을 보였다.

“처음 듣는 얘긴데?”

“나도 처음 하는 얘기야.”

“지금은? 지금도 하셔?”

“지금은 아니지.”

승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난 듯 물었다.

“공연은 언제부터 하게 된 거야?”

“스무 살. 지금 나 인터뷰하는 거야?”

“인터뷰는 무슨…….”

물속에 푹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그의 곁에 있어본 나는 안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실패하고 다시는 그 어떤 사랑도 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한 사람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또 다른 사랑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밤잠을 뒤척이는 격이었다. 다른 이에게 매번 그렇게 사랑이 찾아오듯 이야기는 그렇게 그에게 매번 찾아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껏 수없이도 그래 왔던 것처럼 이미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지……,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악기상을 하셨다. 많은 악기들 중에서도 유독 기타를 먼저 만지게 된 것은 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 가장 먼저 기타를 만지고 기타 소리를 듣기 한참 전부터 아버지는 기타와 함께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지고 들었던 것도 기타였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딱딱하고 차가운 무생물체와 한 몸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네 예상이 맞다. 아버지에게는 아내가 없었다. 내 엄마가 누구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기타라고 말했다. 기타? 기타 등등할 때 그 기타?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크게 웃었고, 우리는 이것도 농담이라고 심심할 때마다 반복했다.

농담을 하면서 한 차례 웃고 난 밤이면 아버지는 새벽까지 가게 불을 켜 놓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구? 가게 맞은편에 우리가 사는 집이 있었는데, 내 방 창문으로 건너편 가게 안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기타를 품에 안고는 마른 손가락으로 한참 동안 줄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연주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도중에 멈춰서는 또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있었다면 소리가 들렸겠지만 굳이 소리를 꼭 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게에 한 남자가 드나들기 시작한 건 내가 열여섯 살이던 해였다. 그가 맨 처음 왔을 때 아버지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가게에는 나뿐이었다. 그는 줄줄이 놓인 기타들을 휘 둘러보다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넌 누구니? 라는 표정으로. 나는 이렇게 대답한 것 같다. 가게 주인 딸이에요. 그러면 너도 기타를 연주할 수 있냐고 그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등에 매고 있던 기타 가방을 열어 낡아서 다 벗겨진 기타를 나에게 안겨줬다. 해봐. 뭐든. 아무거나. 순간 머릿속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여러 가지 곡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나는 그래도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곡을 연주했다. 그의 경이로운 눈빛이 온몸에, 특히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손끝에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의 신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뮤지션의 블루스 곡이었다. 역시 아버지로부터 배운 곡이다. 그러나 곧 전혀 처음 들어본 곡이 이어졌다. 멜로디도 가사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악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곡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했다. 기타를 연주한다기보다는 정성스럽게 만지고 있는 듯한 모습.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기억을 더듬고 있는 듯한 모습. 그것은 새벽녘까지 불 켜진 가게에서 기타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두 손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귀를 꽉 막아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어 나를 보지 못했다. 눈을 감고 부르는 노래를 내가 대신 눈으로 들었다. 자꾸만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가 연주를 하다가 멈추고는 나에게 왜? 라고 물었다. 물론 입모양으로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계속하세요.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가 기타를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는 귀에서부터 천천히 내렸다. 음악은 귀로 듣는 거야. 그리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블루스 곡에 이어 연주한 노래는 그가 직접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는 악기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만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베껴 쓰는 작가와 다름없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악기로, 또 훌륭한 테크닉으로 새롭게 연주한다고 해도 그건 이미 새로운 게 아니야. 이 낡은 기타로도 너만의 이야기를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어.

나는 날마다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냈다. 그가 가게에 올 때마다 내가 만든 새로운 노래를 연주했다. 나의 노래를 들은 그는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었다. 그가 짚어준 부분은 그 자리에서 매끄럽게 수정되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자신이 하는 공연에 함께 참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며칠 뒤 나는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는데도 기이할 정도로 편안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너를 세상으로 이끈 첫 번째 남자였구나.”

승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승우의 흥이 깨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부정했다.

“두 번째지. 맨 처음 나를 세상에 보내준 건 아버지니까.”

어느새 승우의 손에는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승우의 버릇이다. 무엇을 듣든지 어디에든 적어야 했다. 적지 않으면 기억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 놓은 것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게 문제다. 적어 놓은 것을 다 기억했다면 아무리 작품 과다 양산증에 걸린 사회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고된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적는다는 것은 기억에서 방출한다는 의미도 되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을 자리가 없어서 일종의 보조가방에 따로 넣어두는 것이다. 정말 기억할 만한 것은 따로 적어두지 않아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어 있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 어떤 때에는 그 자연스러움이 숨 쉬는 것 이상으로 자주 찾아오기도 하는데, 사정이 그쯤 되었을 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 주변의 모든 곳에 일일이 촉수를 세워 가며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애써 이어나가는 것만큼 무모하면서도 정신건강에 해로운 게 없다. 펜을 들고 열심히 적고 있는 승우를 보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이 어떤 이야기로 살아날지 내심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가 큰 건 아니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승우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도 공연을 보셨어? 좋아하셨어?”



공연에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가게에 그 남자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남자가 가게에 나타나고부터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학교 공부에도 소홀하고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책을 붙잡고 있는 시간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늘 머릿속으로는 새로운 멜로디를 생각했고 수업 시간에도 모든 과목의 공책에 음표들을 그려 넣었다. 그러는 사이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남자를 알게 되고부터 내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가 좋았다. 아버지의 가게에서 아버지의 기타 연주만을 들으며 지냈던 시간 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제는 주의를 집중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만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음을 기타로 연주했을 때에는 마치 하늘의 것을 훔쳐낸 것처럼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하늘조차 눈감아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사나운 목소리로 “대체 정신을 어디에다 팔아먹고 다니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를 때에는 낯설기만 한 놀라움과 두려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변화는 경멸스러울 정도였다.

남자와 나는 제법 자주 공연을 했는데, 아버지는 공연을 마치고 늦게 집에 오는 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도 그때껏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너무 헤픈 것 아니냐. 여자가 그럼 못쓴다. 아버지는 조용히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잔뜩 화가 난 아버지가 너무나도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고 나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너 그놈이랑 자고 다니는 것 아니냐?

한적한 공원에서 늦도록 기타 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언제부턴가 기타를 붙잡고 있으면 시간이 가늘 줄 몰랐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너 그놈이랑 자고 다니는 것 아니냐. 술에 취해 있었긴 했지만 아버지가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아버렸다. 아버지는 문이 부서져라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저승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같은 이상한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문 열지 못해? 너 정말 그놈이랑 그런 거냐? 네가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난 척 보면 다 안다. 어디 이리 나와 봐. 나와 보라구!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몰려왔다. 현기증이 일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을 텐데, 그 순간 내 감각은 너무나 또렷해서 모든 상황을 아무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가장 예민하고 차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심장까지도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얼어붙어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2층 높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비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옷장을 뒤져 길고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뛰어내렸다. 치마 속에 들어찬 공기 덕분에 물 밑으로 내려앉듯 느린 속도로 땅에 가 닿았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거추장스러워진 치마를 벗고는 있는 힘껏 달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디로 달려간 거야?”

참지 못한 승우가 또다시 수첩을 들이대며 질문을 했다. 나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차원에서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다음 대답했다.

“그 남자한테.”

“이야, 영화 제대로 찍었는데?”

승우의 얼굴에 희색이 띄워졌다. 얼마 전까지 낙심한 표정으로 내 노래에 눈물을 흘리던 승우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일단 뛰면서 그 남자한테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난 그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던 거야. 연락처도 집도. 당장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거야.”

“그래서?”

“공연장으로 갔지. 같이 갔던 곳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있었어?”

이번에는 승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연출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나를 본 남자는 크게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나는 그 앞에서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고, 그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했냐면서 내 뒤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아마 누구였더라도 그 상황에서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면 오직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그의 손은 내 어깨에 닿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 기운은 내 몸을 그대로 뚫고 들어가 심장까지 보듬어주었다. 심장은 조금씩 제 기온을, 박동은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어?”

“너도 아버지처럼 나를 생각하는 거야?”

승우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하지만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나는 지금 보통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우린 음악으로 알게 된 사이이지 이성의 감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서운해?”

“서운하긴!”

하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새벽 두 시쯤 되자 공연장은 조용해졌다. 악기들을 챙기고 무대 뒷정리를 마친 밴드 멤버들은 군데군데의 테이블에 앉아 남은 음료수와 컵라면을 먹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와 나도 그들 가운데 끼어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라면 국물을 들이키는데 집에 있을 아버지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누군가 배경으로 들리고 있는 음악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가사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한 사람이 말했다. 작가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으로 글을 쓸 수는 있어도 가수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노래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에 또 다른 사람이 작가들도 알고 보면 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응수했다. 목소리만 다를 뿐이지 거짓말은 아니라고. 그러자 누군가가 이어서 대꾸했다. 그렇게 따지면 노래도 그와 같다고. 이별을 해보지 않아도 이별 노래를 쓸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거짓말은 아니라고. 왜?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모든 인류의 경험과 역사가 우리 내부에 잠재돼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아직 겪지 않은 일이라도 거짓말이 될 수 없었다. 누군가 이미 경험했던 일이라면 말이다. 반대로 생애 처음 겪는 일이라고 해서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도 없다. 그 일은 이미 누군가의 경험이다. 답은 나와 있다. 예술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잠깐, 그럼 판타지는? 먼저 번 사람은 못 들은 척 반복했다. 예술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듣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화자에게 또 무슨 궤변을 읊는 거냐고 퉁을 놓았고 나머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어 남자의 눈치만 살폈다. 이런 식의 대화에는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가리켰다. 네 생각은 어떠니?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모든 게 꿈같았다. 집 앞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는데 어쩐지 영원히 그 손을 놓는 것만 같은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버지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언제라도 다시 두드리게 될 때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시간은 달력에 박힌 숫자처럼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어느 새 훅 찢겨 있었다. 그 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버지와 대화하지 않는 대신 나에게는 몰래 아버지를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게 문밖에서, 내방 창문에서, 손님과 대화할 때, 값을 흥정할 때,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오랜 시간 기타만 안고 살아온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기타는 그저 기타일 뿐이었다. 기타 등등할 때의 그 기타. 아버지는 그저 수많은 곳에서 다른 수많은 악기들을 판매하고 있는 악기상 주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왜소하지만 거칠고, 순한 인상으로 상술에 능한. 공연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비가 되면서 아버지의 존재가 작게만 느껴졌다.



“고집스럽게 악기를 닦고 만지는 모습을 보는데, 이젠 전혀 다른 사람 같았어. 아니, 이제야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 거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악기상 안의 모든 풍경들이 정확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 거야. 한 꺼풀 들춰내자 악기상에 음악이 사라졌어. 예전에는 귀를 막고 들어도 들리던 음악이 사라진 거야. 낭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탐욕으로 보이기 시작했어. 아버지는 음악인이 아니라 그냥 장사꾼일 뿐이었어.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치사한 장사꾼. 아버지는 악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불렀어. 기타 하나를 사기 위해 힘들게 돈을 모으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적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나는…….”



기타를 훔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헐값에 팔아넘기는 일에 비하면. 기타를 알아본 사람들은 내가 불러주는 전혀 엉뚱한 값에 다들 의심스러워했다. 겉만 보아도 좋은 악인지 아닌지, 제 값이 얼마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의 이름을 댔다. 그 근처에서 아버지의 악기상을 모르는 음악인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입에서 거친 욕이 나올 정도로 좋아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는데 마음이 무척 흐뭇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까지 했다. 아버지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겠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승우는 기가 막혔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기는 게 뭔지 궁금해졌어. 기타가 사라진 뒤의 아버지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어.”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악기가 없어진 걸 아버지가 금방 눈치채셨을 텐데.”

“당연하지. 아버지는 악기에 묻어 있는 먼지 개수까지도 기억하실 분이니까.”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건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악기가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걸 알고 당황해할 사람은 아버지여야 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기타를 만지고 안고 닦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내가 당황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희한하게도 내가 악기를 하나씩 훔쳐다가 팔아버릴 때마다 아버지는 기력을 잃어갔다. 열 번째 기타를 무명 밴드의 기타리스트에게 반값에 팔았을 때 아버지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열한 번째 기타를 같은 방식으로 팔았을 때 아버지는 자리에 누웠다. 열두 번째, 열세 번째 기타는 아버지 몰래 훔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가게에서 기타를 꺼내다가 낯선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모습을 길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 누운 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열세 번째 기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버지의 기타에 손대지 않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며칠 사이 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았고 내가 팔아버린 기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대신 예전보다 더 자주 늦은 밤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기타를 품에 안고는 마른 손가락으로 한참 동안 줄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를 연주하고 있는 것 같다가도 도중에 멈춰서는 또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듯한 모습을 나는 내 방 창문을 통해 바라보아야 했다. 역시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확실히 달라졌다.

거리상으로 아버지의 기타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기도 했지만, 예전과 달리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면서 느끼고 있을 무언가를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기타를 붙잡고 있는 노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폭삭 늙어버린 노인은 여전히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내인지 딸인지 기타인지 기타 값인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일지도 모른다. 흘러간 시간의 열 배속은 될 앞으로의 세월은 기타 현의 진동보다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그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의 진동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아버지는 점점 연주 속도를 늦추더니 결국에는 더 이상 기타를 연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직한 소리로 나를 불렀다.

악기를 미리 팔아둔 건 잘한 일 같구나. 건물 주인이 가게를 허물고 빌딩을 지으려나 봐. 가능하다면 이 악기들 모두 처분하고 싶은데 방법이 있겠니?

텅 빈 가게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너는 그 남자에게 가거라. 너는 재능이 많은 아이야. 가서 마음껏 키워 나가렴. 네가 부르는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줘. 그 사람들은 네 노래 때문에 행복해질 거고 살아갈 힘을 얻을 거야. 그게 네 몫이야.

아버지는요?

나는 더 이상 힘이 없어.

……엄마는요?

보고 싶니?

혹시라도 여기를 찾지 않을까요?

아버지는 가게를 휘 둘러보았다. 엄마는 여기에 있단다. 이제 내가 떠나는 거야.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나는 그와 함께 연주했던 기타를 챙겨 등에 맸다. 공연장에 갔을 때 주인은 남자가 어딘가로 멀리 여행을 떠난 것 같으니 일부러 찾지는 말라는 말을 해줬다. 주인은 남자가 전에도 자주 이런 적이 있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해줬다. 내가 물었다. 언제 오나요? 주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그거야 본인만 알겠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주인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공연장의 풍경은 남자가 있을 때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무대 뒤쪽에서 기타를 맨 남자가 나타날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튜닝을 하고 있는 남자의 환영이 설핏 보인다. 나는 물었다.

다시 오긴 오나요?

슬슬 성가셔지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확신할 수 없어서인지 주인은 말없이 마른 수건으로 유리잔만 닦고 있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 계속 연주할 수 있을까요?

그제야 주인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전과는 달리 약간 매섭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혼자서 해 왔는걸요.

주인이 턱으로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노래 한 번 불러보든가요.

나는 기타를 등에 맨 채 성큼성큼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등에 달린 기타의 그림자가 내 키를 훌쩍 덮었다.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클럽의 벽을 이루고 있는 책장의 책들을 모조리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내가 활자중독증에 걸리게 된 데에는 이곳 주인의 일조가 컸다. 시인이기도 한 주인은 수시로 새로운 책들을 클럽 안에 들여놓았다. 새로운 책들이라고 해봤자 클럽 안에서 못 보던 책일 뿐이지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타 잔뜩 낡고 헐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오래된 책들이어도 클럽에 있던 책들과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클럽 안에 있는 책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내가 읽은 책과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내 지문과 채취가 묻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 이건 클럽 밖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클럽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아쉽게도.

공연 시작 20분 전에 내가 집어 든 문예잡지에는 오랜 시간 나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승우의 글이 실려 있었다. 십여 페이지 분량의 자전 에세이였다. 그는 최근에 그 문예잡지를 발간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장편소설을 펴냈다고 했다. 악기상을 하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 결국 그 이야기를 썼군. 신세대 젊은 작가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예술과 인생의 재발견을 꾀했다는 어느 평론가의 평이 뒤따랐다. 어쩐지 억지스런 말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둘째 치고, 문단에서의 삼십 대는 그래도 아직 신세대인가 보다는 생각이 앞섰다. 글에는 그가 태어나서 한 권의 소설을 내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단 한 권의 소설로 이렇게 집중 조명을 받을 수 있다니 그가 영 운이 나쁜 젊은이는 아니었나 보다. 이번 소설로 인해 지금껏 그가 썼지만 빛을 보지 못한 숨겨진 시나리오까지 공개되었다. 심장이 대신 박수를 쳐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의 글에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땐 기타를 쳤다. 음악은 나의 두 번째 창작 활동이다.


이 부분에서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뱉을 뻔했다. 승우는 코드도 잡을 줄 모른다. 그가 생각을 짜내느라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마다 항상 옆에서 기타를 쳐주고 노래를 불러 준 사람은 나다. 다 큰 남자애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는 언제고. 가만 보니 나에 대한 언급은 한 군데도 없었다. 꼭 바라는 건 아니지만 왠지 괘씸하다. 그동안 그의 습작들을 읽느라 보낸 시간이 얼마고, 해준 말들이 얼만데.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그에게 계속해서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 곁에 있는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이지만 그래서 더욱 진심을 다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의 작가적인 자질조차 의심스러웠으니까.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다. 나에게 과연 작가적인 자질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의심스러워서 쓰기 시작했다. 의심스러워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을.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나왔다. 이 소설을 완성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자신감이다. 나는 나를 믿게 됐다. 내 안에는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언제라도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나 말이다…….

클럽 주인이 다가왔다.

어서 준비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클럽 안에는 어느새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에 가려서 책장의 책들이 잘 안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혼란스럽다. 이 작은 클럽에서 부르는 노래가 뭐 그리 좋다고 사람들은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왜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걸까. 클럽 주인의 장사 수완이 좋아서는 분명 아니다. 주인은 시를 쓰지 않으면 잔만 닦았다. 처음에는 승우도 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휘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나를 이곳으로 이끈 그 남자가 오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일지도 몰라. 혹시 아버지는? 아, 그 두 사람이 나타나 준다면 승우가 날 모른 척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데. 그래도 어쨌든 공연은 해야 한다. 게다가 오늘은 주말이고 손님이 꽤 많다. 이 중에 나의 팬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기다렸다면 그에 대한 보답은 해줘야 한다. 아버지 말대로 그것이 나의 몫이니까.


……그것은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처럼 숨도 쉬고 말도 하고 사랑도 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나 노인일 때도 있고, 이번 소설에서처럼 십 대 소녀로 나타날 때도 있다. 글을 쓰는 동안 그 소녀는 내 옆에 붙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나는 수첩을 펼치고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다. 다 기억하기에 그녀는 조금 수다스러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