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11
은빈의 인생에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굣길, 단짝이었던 하나와 함께 늘 걷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두 여자 아이를 에워싸려 했을 때 단짝인 하나는 용케 뛰어 도망갔지만 은빈은 그대로 잡히고 말았다. 울었던가. 남자아이들 중 누군가가 은빈에게 말했다. 팬티를 내리면 집에 보내 줄게. 은빈은 오줌을 싸려는 듯이 꾸부정한 자세로 앉으며 치마를 걷고 팬티를 내렸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집으로 왔겠지. 엄마에겐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그 후로 그 일로 인해 혼자 끙끙 앓거나 힘들어했던 기억도 없다. 은빈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그날의 하굣길과 단짝 하나, 팬티를 내려 보라던 얼굴 모르는 남자아이들, 울면서 팬티를 내린 자신의 얼굴, 그뿐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은 대학에 다니면서 차츰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스물여섯의 겨울이 되자 차갑게 부는 바람만큼이나 은빈의 살갗에 세게 와 닿았다.
은빈에게 의문인 것은 그날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책에서 읽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아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모를까 그 일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며 은빈은 스스로를 옭아매어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은빈은 우선 그 당시의 일기장을 뒤져 보았다. 은빈에게 남아 있는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이라고는 2학년 때뿐이었다. 강아지와 산책 나갔다 온 이야기, 엄마가 떡볶이를 만들어준 이야기, 자기 전에 줄넘기를 한 이야기, 동생과 인형 옷을 만든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이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팬티를 내려 보인 이야기는 없었다. 가만 보면 일기는 내가 정말 쓰고 싶어서 썼다기보다는 숙제로 내기 위해 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그 사건은 검열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은빈의 담임선생님은 잘 쓴 일기를 아이들 앞에서 낭독해주기도 했었다. 선생님이 고른 잘 쓴 일기란 너무 어른스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기교가 넘치지 않는, 누가 봐도 딱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썼다고 생각할 만한 천진하고 귀여운 일기였다. 매일 저녁 꼬박꼬박 일기를 썼던 은빈에게는 자신의 일기가 아이들 앞에서 낭독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글쎄, 이런 건 다 기억하면서 왜 그걸 기억 못하느냔 말이다.
“그걸 왜 기억 못하는데?”
지혁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여자 친구의 과거 아닌 과거는 은근히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실일 것 같았다. 사실이 아닌데도 저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사실이 아니라면 책의 내용이어야 하는데 지혁이 지금껏 읽은 책 중에 그런 내용이 담긴 책은 없었다. 그러니 사실이 맞을 테고, 그 사실이 지혁을 화나게 했다. 자기도 아직 은빈의 팬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은빈을 만난 후, 그녀를 알기 전의 모든 인생까지도 송두리째 아끼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늘 조금은 과격하게 표현되었다.
“너 바보야? 그걸 왜 기억 못해? 팬티 내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
지혁은 얼굴을 붉혀가며 큰 목소리를 냈다. 은빈은 대단한 죄라도 저지른 양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화를 내?”
은빈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시작은 산뜻했다. 서로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지혁은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었던 이야기, 쫓아오는 소를 피해 뛰어 달아났던 이야기, 서울에서 전학 온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이야기, 알고 보니 그 여학생도 자기를 좋아했더라는 이야기 등 어린 시절다운 순수한 이야기들을 당연히 스스럼없이 꺼냈다. 은빈에게도 기억나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중 가장 의문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은 게 말썽이었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겪은 일인지 책에서 읽은 건지 헷갈리는 일이 하나 있는데…….”
은빈이 하나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광화문의 대형서점의 한쪽에서 공무원 수험서를 뒤적이고 있던 중이었다. 얼결에 고개를 돌린 곳에 유니폼을 차려입은 하나가 보였다. 하나는 까치발을 들고 책장의 위쪽에 꽂혀 있던 책을 뽑고 있었다.
“이 책 맞아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복 입은 여학생은 하나가 건네준 책을 슬쩍 훑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닌데, 이거 아닌데.”를 연발하고만 있었다.
“정확한 제목을 알려주셔야죠. 그것만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요.”
하나는 짜증스러운 말투였고 학생 역시 불쾌해했다.
“언니 여기 직원 맞아요? 알바 아니에요? 지난번 언니는 한 번에 척척 찾아주던데.”
하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아, 됐어요. 되게도 불친절하네.”
학생은 다른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친구의 이름을 부르더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학생의 눈과 은빈의 눈이 순간 부딪쳤다. 학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하나가 은빈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몇 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나는 은빈을 데리고 서점 안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으로 갔다.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지? 십 년 만인가?”
하나가 말했다. 웃고는 있지만 피곤함이 역력히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은빈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까 그 여자애 진짜 싸가지 없지 않냐? 손님만 아니면 그 머리채를 확.”
하나는 분을 대신 풀기라도 하듯 아이스크림을 확 베어 물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과 하얀 아이스크림의 선명한 대조가 은빈의 눈을 어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중학교 때까지의 단짝이었던 하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나는 어릴 때에도 항상 입술이 붉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새빨간 입술을 삐죽 내밀곤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잡아채고 싶다는 머리채의 주인공인 여학생이 언뜻 그 시절의 하나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남자친구는 있어?”
은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나 좀 보여줘 봐. 사진 있어?”
은빈은 핸드폰을 꺼내 메인 화면에 저장되어 있는 지혁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듯 핸드폰을 왼쪽으로 돌렸다가 오른쪽으로 돌리기를 반복하며 사진을 쳐다보았다.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은빈은 그렇잖아도 그 시절의 그 사건에 대해 골몰해 있는 요즘 하나를 만난 게 신기하기만 했다. 진즉에 먼저 연락을 해서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정도로 다급한 일이 아니었고, 또 그럴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편한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단짝이었을 뿐이다.
“하나야 혹시 그거 기억나니?”
“뭐?”
하나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은빈을 바라보았다.
“우리 초등학교 때, 같이 집에 오다가…… 실은 이게 내가 겪은 일인지 무슨 책에서 읽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은빈의 이야기를 다 들은 하나는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있었던 거 확실해?”
“그땐 너랑만 다녔잖아. 집에 가는 길도 같았고.”
“에이, 나랑만 다니긴. 넌 다른 애들이랑도 잘 다녔어. 혼자 다닐 때도 있었고.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내가 널 두고 도망쳤을 리가 없어.”
“그럼, 그때 내 옆에 있던 사람에 네가 아니란 말야?”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만…….”
“만약에 사실이었다면 엄마한테는 못했더라도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을까? 난 너한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어. 걱정 마. 사실이 아닐 거야.”
은빈은 하나의 말에 그동안의 의문이 풀린 듯 안심이 되는 한편, 당시 옆에 있던 사람이 하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 혼자였을 수도 있겠다는 또 다른 갈래의 생각에 빠져 불안해졌다.
“그럼, 혹시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 있어?”
은빈은 내심 하나가 이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여주길 바랐다.
“아니, 없는데?”
하나는 명색이 서점 직원이다. 서점 직원이라고 해서 모든 책을 다 꿰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하나의 말에는 신뢰가 갔다. 어렴풋한 기억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집에 놀러 갔을 때에도 책이 많았던 것 같다. 뭐뭐 했던 것 같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서술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정말 그랬던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의 직업을 잘 택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읽어 온 책들의 축적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한 그녀가 보지 못한 책을 은빈이 읽었을 리가 없다.
“물론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일지도 모르지만.”
은빈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는 은빈의 핸드폰을 다시 집어서는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누른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리자 바로 끊고는 자신의 핸드폰에 찍힌 은빈의 번호를 저장했다.
“혹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알려줄게.”
하나는 은빈에게 핸드폰을 건네면서 이곳에서 일한 지는 이제 이 년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010으로 시작하는 하나의 핸드폰 번호가 보였다. 우리가 단짝이었을 때에는 핸드폰이 없었지. 이러한 우연이 아니었다면 하나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대형 서점의 직원인데 왜 여태 보지 못했을까 의아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만났다는 게 중요하므로 그 의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끔 꼴불견인 손님이 몇 있다, 방금 전의 그 여학생 정도는 새 발의 피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라 참으며 한다, 너도 공무원 수험서나 뒤지지 말고 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좋아하는 마음이 최고의 경쟁력이다, 등등의 꽤 어른스런 말을 보탠 후에 하나는 서점 안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은빈은 하나가 놓고 간 아이스크림 콘의 종이 껍질을 바라보다 불쑥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은빈으로 하여금 자신 안의 질문에 더욱 집착하게 했다.
은빈이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에는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와 있었다. 모두 한 사람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몇 초 간 기다리자 지혁이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지혁은 또 화를 냈다.
“지금 내가 전화했잖아.”
“아깐 뭐 하고?”
“친구 만나고 있었어.”
“친구 누구?”
“넌 모르는 애야. 중학교 친구.”
“…….”
“……끊을게.”
“응.”
은빈은 지혁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팬티 내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라고 말하던 때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순간 지혁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 생각이 왜 지혁을 화나게 했는지 은빈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유로 지혁에게 마음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자신을 위해 주는 남자친구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은빈의 안전부터 챙겨야 했고, 이야기를 털어놓는 심정부터 헤아려야 했다. 닫힌 문에 노크를 하듯, 지혁은 부쩍 은빈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은빈은 요즘 팬티 사건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귀찮고 성가셔졌다.
은빈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광화문에 갔다. 공무원 수험서를 뒤적이다가 하나와 마주치면 씽긋 웃어 보였다. 일부러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맞춰 가기도 했다. 하나의 도시락을 나눠 먹기도 했고, 은빈이 도시락을 싸 갖고 가는 날도 심심찮게 생겼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은빈은 서점 안의 책들을 모조리 찾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다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기억으로 보아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었을 테고, 은빈이 어렸을 때를 염두에 둔다면 출간한 지는 최소한 10년은 넘어야 했다. 다행히 이 대형 서점은 오래된 책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의 도움으로 서점 지하에 있는 서고까지 원 없이 뒤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는 근무 시간 틈틈이 서고에 내려와 은빈을 도와주었다. 지하에서는 핸드폰 수신이 되지 않았고, 은빈은 자신을 찾고 있는 지혁이 떠올랐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지하 서고는 지상의 서점만큼이나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은빈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도서관을 드나든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과제를 할 때에도 웬만하면 인터넷을 뒤졌다. 검색어 하나만으로도 관련 자료들이 다양하게 쏟아지는 인터넷을 두고 왜 굳이 복잡한 일련번호를 찾아 미로 같은 도서관을 헤매야 하는지 몰랐다. 도서관 안에는 늘 축축하고 눅눅한 기운이 감돌았고,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게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하 서고는 은빈에게 더욱 낯설고 기이한 장소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첫날, 처음 서고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을 때뿐이었다. 서고에 들어선 순간 질식이라도 시킬 듯이 훅 다가왔던 먼지와 곰팡이 냄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하고 편안한 향기로 바뀌어져 갔다. 은빈은 새로운 책을 펼칠 때마다 일부러 코에 바짝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런 은빈을 보면서 하나는 쿡 웃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지금은 꼭 그러지 않아도 책마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
“냄새가 다 달라?”
“응, 조금씩.”
은빈은 이 책 저 책을 번갈아 집어 들면서 냄새를 맡았다. 책은 종이의 색깔과 질감에 따라, 두께에 따라, 활자의 크기에 따라, 발행 연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렇겠지. 만약 너의 책이 된다면 또 다른 냄새를 맡을 수 있어.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 너의 경험, 너의 추억이 한데 버무려져서 가장 확실하고 독특한 냄새를 맡게 될 거야. 아마도 넌 지금 그런 책을 찾아야 할 것 같아.”
하나는 마치 학생을 대하는 친절한 선생님처럼 말해주었다. 은빈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부지런히 책을 살폈다. 자신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인생의 의문이 이 책 속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과연 책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모두 누군가들의 기억의 산실, 기억의 창고였다. 그들의 일기를 아무도 모르게 훔쳐보는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관음증도 아니었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책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빈은 이야기를 읽어 나가며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비슷한 경험을 되새겨보았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책의 뒷이야기를 각색해보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은 책 속의 내용과 은빈의 실제 경험의 경계를 묘하게 흩뜨려놓았다.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은빈이 찾고 있는 그 내용도 어딘가에 분명히 숨어 있을 것이었다.
“근데 말야…….”
어느 순간, 책을 뒤지던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 네가 겪은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
“어린 너에게 너무 충격적인 일이어서, 스스로 책에서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 거 아닐까? 어떤 방어 기제 같은 걸로 말야.”
그렇잖아도 약간 싸늘한 서고 안에 돌연 한기가 이는 것 같았다. 은빈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책에서 본 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실감났다. 책에서 읽은 것이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잊히기 쉬울 텐데, 이건 반대이지 않은가. 은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시피, 읽은 걸 기억 못할 만큼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다. 은빈은 창고 불빛 아래에서 하나의 눈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은빈을 마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팬티 내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말 몰라?”
순간 은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팬티를 내린 후에 생긴 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은빈 자신도 궁금했다. 왜 그 뒷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겪은 일이었다면 기억 못하는 게 오히려 나을 거야.”
하나는 이제 완전히 그 일을 실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렇게 산처럼 쌓인 책 창고에서 자신의 기억과 동일한 내용을 찾는 일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틈을 비집고 회의감이 파고들었다. 꼭 찾아야 하는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 생각은 묘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그러니까 자신이 기억하는 그것이 책의 내용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 경험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은빈의 마음속에는 그때 그 일이 책의 내용이냐 아니냐, 실제 체험이냐 아니냐 보다 더 궁금한 질문이 솟아나고 있었다.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의 경계가 어떻게 이토록 모호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할까, 아니면 자신만 유독 그런 걸까, 자신과 같은 체험의 착란을 보이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실은 나한테도 비슷한 일이 있어.”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일 분여 정도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은빈은 하나가 앉아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하나는 서가에 비스듬히 세워진 작은 사다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나의 머리 위에 달려 있는 작은 전등의 불빛 때문에 마치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조금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은빈을 마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 화장실에서 넘어졌는데 그대로 깨어나지 않더라.”
은빈은 적잖이 놀랐지만 입을 벌린 채 하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아빠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 정말 인간 말종이었거든, 우리 아빠…….”
그랬던가? 은빈은 중학교 때의 하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붉은 입술을 삐죽 내미는 모습 말고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때 가 보았던 하나의 집을 떠올렸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땠는지까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금 조용했고, 책이 많았다는 것 외에는.
“그때 내가 항상 했던 상상이 뭐였는지 알아? 아빠가 그냥 죽는 거. 늙어서도 아니고 병이 들어서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죽는 거. 한 번은 아빠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질 뻔한 적이 있었어. 엄마한테 욕을 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샴푸 거품이 그대로라고. 근데 그날 이후부터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을 때마다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샴푸를 타일 위로 들이붓는 상상. 린스로 머리를 헹굴 때마다, 그 미끌미끌한 감촉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그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져. 아빠가 죽는 상상까지.”
하나는 더 이상 은빈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은빈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사실이야. 사실인데, 왜인지는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혹시 나 때문이냐고, 몇 번이나 엄마한테 물어봤지만 엄마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안 해.”
하나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건 하나의 머리를 내리비치고 있는 작은 전등 때문이기도 했고, 하나의 눈에 맺힌 눈물 때문이기도 했다.
“난 내 상상이 사실일까 봐 무서워.”
은빈과 하나는 서고를 뒤지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철수했다. 은빈의 인생에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하나의 눈에 비친 눈물 때문이기도 했고, 경험의 사실 여부가 모호한 것은 그 모호함이 바로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모호한 것을 분명한 것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호숫가의 안개를 진공청소기로 말끔하게 빨아들이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헛된 일일 것이다. 그날 누가 은빈의 앞길을 가로막고, 울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팬티를 내려 보라고 했는지, 그날이 은빈의 인생 달력 중의 하루가 분명한지, 그것이 분명한지 아닌지 왜 불명확한지, 이 불명확함은 은빈에게만 특수한 것인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만 골몰했던 은빈은 이제 그 같은 사념에서 벗어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퍼뜩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여덟 통이 와 있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전화를 받은 지혁의 목소리는 무척 지쳐 있었다.
“창고에 있었어. 핸드폰이 안 터지는 데라 그냥 두고 갔어.”
“창고라니? 무슨 창고?”
“음…… 기억의 창고?”
은빈은 말을 마치고는 배시시 웃었다.
은빈은 테이블 위로 지혁이 내민 쪽지와 지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지혁은 꾹 눌러 빚은 만두처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뇌.”
“네가 그린 거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쪽지의 그림 위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말했다.
“해마는 사실이나 경험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곳이래. 해마에서 만들어진 기억은 측두엽으로 전송되어져서 영구 보존이 되는 거래. 아까 기억의 창고라고 말했었지? 측두엽이 이를테면 그런 곳이야. 근데 이 전송은 잠자고 있을 때 일어난대. 잠자면서 꿈을 꿀 때…….”
지혁이 말을 마치자 은빈은 지혁의 손가락에 닿았던 시선을 얼굴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지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밤에 잘 자라고. 꿈도 꾸고…….”
잠시 머뭇거리던 지혁은 은빈 앞에 놓인 쪽지를 슬그머니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잠자코 있던 은빈은 쪽지가 지혁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전에 얼른 뺏었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이게 선물이냐? 그냥 설명해주려고 대충 그려온 거야.”
“그래도 줘.”
은빈은 뺏은 쪽지를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혁의 입술은 다시 만두가 되어 있었다.
“창고에서 책을 찾지 못했어.”
“…….”
“더 이상 안 찾기로 했어. 이젠 정말 잠이나 좀 자야겠어.”
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다시 입술을 뗐다.
“……있잖아.”
은빈은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지혁은 상당히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나도 내가 겪은 일인지 책에서 읽은 건지 헷갈리는 일이 하나 있는데…….”
은빈이 하나를 만나러 다시 광화문에 간 것은 서고에서 나온 지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부랴부랴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같이 밥을 먹을 생각으로 간 것이었지만 미리 연락을 하지 않은 건 좀 더 반갑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도 어릴 적에 알던 친구와는 다시 금세 통하게 되는 것 같았다. 억지로 약속을 만들거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면서 형식적인 선물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하나는 은빈에게 지하 서고의 세계를 열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은빈은 더 이상 하릴없이 공무원 수험서만 뒤적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 말고도 읽을 책은 많았다.
하나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은빈이 읽기 시작했던 책은 어느새 중반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판매대와 서가를 오가며 책을 고르고 있었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만났고, 계산을 마친 사람들은 서점 로고가 그려진 종이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도 여럿 보였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은빈은 한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하나라는 직원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어쩐지 미심쩍어하는 직원의 표정을 본 은빈은 말을 덧붙었다.
“……제 친구거든요.”
그리고는 즉시 후회했다. 유치하게 들렸을 것 같아서였다. 직원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수험서 쪽 담당했는데.”
은빈은 팔까지 뻗어 보였다. 그때 마침 다른 직원이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수험서 쪽 아르바이트생 말씀하시는 것 아니에요? 얼굴 하얗고 입술 빨간 분.”
새로 다가온 직원이 맞췄다.
“아, 그 알바생?”
먼저 번 직원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직원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분 어제 그만뒀어요.”
“그래?”
놀란 얼굴로 되물은 사람은 은빈이 아닌 먼저 번 직원이었다.
“아니,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둬?”
“한 달도 안 됐을 걸? 다른 일 구했나 보지 뭐.”
“근데, 걔 좀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은빈은 두 직원 사이에 우뚝 선 채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판매대와 서가를 오가며 책을 고르고 있었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은 서로를 만났고, 계산을 마친 사람들은 서점 로고가 그려진 종이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은빈은 핸드폰을 꺼내 하나의 번호를 눌렀다. 한참 동안 연결음이 이어졌다.
“여보세요?”
한 아저씨 목소리였다. 은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었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은빈은 묻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일리는 없을 거야. 은빈은 나중에 다시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서점을 나섰다.
“괜찮아…….”
은빈은 지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렇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지. 은빈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지혁에게도 사실인지 꿈인지, 실제의 경험인지 책에서 읽은 내용인지 헷갈리는 일이 있었고, 최근에 부쩍 많이 생각났고, 그 일이 은빈의 이야기와 연결되어서이기 때문이라는 말. 어릴 적,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한 여학생을 괴롭혔던 이야기.
“너도 그 여자애한테 팬티 내려 보라고 했어?”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말이 아니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거짓말도 아니고 비밀도 아니야.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런데……”
그날 밤 은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은빈의 인생 달력 중 하루, 팬티 사건이 있던 바로 그날이었다. 이상한 점은 꿈속에서 만난 은빈의 모습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것. 스물여섯의 은빈은 하나와 함께 그때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다가오자, 은빈은 재빨리 하나의 팔목을 붙잡고 말한다. 도망가지 마. 하나는 붉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은빈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도망가지 마. 은빈은 거의 울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이거 놔! 얘 왜 이래 정말. 남자아이들은 그 광경이 재밌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은빈은 자신의 허리만큼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들을 내려다본다. 너희들이니? 은빈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꼭 먹이를 기다리는 참새 새끼들 같다. 참새들이 하나 둘 은빈에게 다가와 치마를 들치고 다리를 만진다. 은빈은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어내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아이들의 손이 너무 많다. 그 순간에도 은빈은 지금의 상황을 반드시 일기에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선생님이 이번 일기는 아이들 앞에서 읽어줄지도 몰라. 그때 지혁이 나타나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런 얘기는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은빈이 묻는다. 왜? 지혁이 대답한다. 왜냐고 묻지 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