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이야기

단편소설9

by 강민선

나처럼 타인의 불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밤 열한 시에 잠이 들어서 아침 여섯 시면 눈을 뜨는, 비교적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내가, 잠이 깨는 즉시 일 초의 뒤척임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아파트 산책로를 달리는 내가, 아침식사를 거른 적도 없고, 심지어 설거지까지 모두 마무리 지은 다음 느긋하게 출근을 하는 내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확인하는 것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통해 간밤에 올라온 타인의 불행한 일기, 바로 그것이다.


내가 정기구독하고 있는 일기장은 모두 열아홉 권이다. 지난 일주일 사이 두 권이 새로 더 생겼는데, 구독했던 것들 중에 세 권을 취소했기 때문에 전체 수는 줄었다. 열아홉. 그 나이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께름칙한 숫자다. 어서 하나를 더 채우고 싶은데 요즘 올라오는 글들이 시원찮다. 불행을 가장한 행복이 태반이다. 순수하게 행복하다고 말하면 단순해 보일까 두려운 걸까? 지성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죄다 불안과 회의라는 필터를 거치고 있지만 거추장스러운 장식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여과되지 않은 불행의 감정을 쏟아부은 글들도 패스. 자기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이들의 공통적인 오류는 글을 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불행을 기록한 자신의 일기를 보며 기이한 자아도취에 빠진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인간의 특성을 심리치료 연구에 사용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방향이다. 이런 방식이 연습된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불행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리고 말 테니.

단 한 가지라도 감점 사항이 보이면 단칼에 휴지통 행인 운명의 일기장들은 하루에도 수십 권씩 핸드폰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제 막 새로운 아이디로 계정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한 이들의 일기는 그것대로 신선한 맛이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기를 써온 이들은 오랜 기간 숙련된 노하우로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알았다. 어쨌든 두 부류의 이용자들 모두 하나의 사실은 분명히 인지하고 이 세계에 손을 뻗은 것이리라. 이들의 하루, 이들의 푸념, 이들의 사랑, 이들의 시련은 숙성될 새도 없이 ‘전송’ 단추를 누르는 순간 빛의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러 누군가의 메일로, 누군가의 문자 수신함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휴지통 속으로 날아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밤 열한 시에 잠이 들어서 아침 여섯 시면 눈을 뜨는, 비교적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내가,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특별히 불행할 것도 없는 내가 특별히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은, ‘고깔콘’에서 비롯되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고깔 모양의 과자로 다섯 손가락 끝에 끼었다가 하나씩 빼먹는 재미가 쏠쏠한 짭짜름한 옥수수 스낵이다. 이 작고 오래된 스낵 하나 때문에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나는 ‘고깔콘’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으니 ‘고깔콘’의 입장에서도 내가 고맙긴 할 것이다. 우리의 ‘윈-윈’ 관계가 ‘불행한 이야기’에 얽혀 들어가게 된 것은 그래서 더욱 유감이다.



‘불행한 이야기’의 연재는 내가 자청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 일을 끝까지 밀어붙여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기획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행한 이야기? 다들 행복 찾기에 혈안인 마당에 역발상도 정도가 있지 무슨 심보로 불행을 찾아다닌다는 말인가 하며 말들이 많았다. 예상한 대로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부터가 내겐 불행이었다. 여하튼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아이를 보았다. 옆에는 아이의 엄마가 함께 있었다. 둘은 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이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얼굴과 팔에 난 상처도 넘어져서 생긴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는 어딘가 불편하기라도 한지 연신 꿈틀거리며 칭얼대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아이가 제 팔을 입에 가져가더니 있는 힘껏 물어뜯는 것이다. 다급해진 엄마가 서둘러 아이의 입에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욱더 힘차게 팔을 물었다. 마치 온종일 굶다가 모처럼 발견한 인간의 팔을 물고 절대로 놔주지 않는 어린 흡혈귀처럼. 결국 옆의 젊은 남자가 완력으로 아이의 팔을 뽑아냈다. 뽑아냈다는 표현은 내가 사용했지만 참 정확했다. 아이의 팔과 입에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여기까지 들은 사람들은 이 내용이 나의 안건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추리하는 능력이 없다면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나는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그들의 재촉에 발길을 서둘렀다.

남자가 아이의 팔과 몸을 붙들고 있는 동안 엄마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아이의 입과 팔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아이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아 그 일은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그들 세 사람의 실랑이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이들이 너나없이 혀를 차는 가운데 나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미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 아이가 조금 특별하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나의 방식이 이번에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일단은 늘 해오던 대로 가방 속에서 막대 사탕 하나를 꺼냈다. 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볼래?”

사탕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순조로운 진행의 첫걸음이었다. 작고 신비한 불가사리 같은 손바닥을 천천히 펴서 막대기를 움켜잡는 모습을 아이의 엄마와 젊은 남자는 물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숨죽여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를 동시에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새우깡’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귀를 쫑긋했을 때 ‘새, 우, 깡’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한 아이는 곧바로 사탕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지금 우리가 새우깡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잖느냐고 누군가 작게 발끈했다. 발끈할 만도 한 것이 ‘새우깡’은 경쟁사의 주 제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정답을 맞힌 학생이라도 된 듯 그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바로 그것! ‘새우깡’을 ‘고깔콘’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고.

아이가 사탕을 바닥에 내던졌을 때 엄마는 화난 얼굴로 아이에게 소리쳤다.

“주워! 어른이 주실 땐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 어서 주워!”

되레 내가 민망해져서 대신 주우려고 하자 엄마가 내 팔을 붙잡았다.

“놔두세요. 아이가 스스로 하게 해야 돼요.”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사탕을 주워서 엄마에게 내밀었다.

“먹기 싫으면 엄마가 먹을 거다.”

엄마는 아이가 보란 듯이 사탕 껍질을 까서 제 입속에 쏙 넣어 일부러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먹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얜 밥이랑 새우깡만 먹어요. 오직 새우깡.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말도 ‘새우깡’이에요. 자폐 앓아요.”

엄마의 이 말은 꼭 ‘엉덩이에 점이 하나 있어요’처럼 들렸다. 마침 내릴 역이 되어서 나는 내렸다.

“그러니까 자폐 아이를 내세워서, 꼭 자폐가 아니어도 불쌍한 애들을 전면에 세워놓고 이런 애들도 이 과자를 좋아한다, 뭐 그런 메시지를 전하자는 뜻인가요?”

누군가 내가 원치 않는 방향, 그러나 애초에 우려했던 방향으로 요점을 정리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대학에서의 토론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그때도 그랬다.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은 친구들은 마지막에 꼭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메시지! 그것을 남겨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저는 뭘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메시지 같은 건 없어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요, 꼭 불쌍한 아이들을 내세워서, 혹은 불행한 이야기를 들먹여가면서, 이 와중에도 우리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식의 유치한 광고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유치한’이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방금 전에 내게 질문했던 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치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보여주자는 겁니다. 우리 아이가 자폐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엄마. 저는 그 엄마의 시점을 가지고 오자는 겁니다. 타인이 바라볼 땐 엄연한 불행인데 그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엄마의 시선, 엄마의 서정.”

“지금 문학해요?”

“소설 써요?”

“뭐야 이거.”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나야말로 ‘뭐야 이거’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 사람들은 홍보를 하겠다면서 문학도 모르나? 하긴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조차 주제의식과 메시지 전달을 그렇게도 강조하지 않았던가. 대학 시절에도 내 글은 반응이 좋지 않았다. 어렵지도 않은 내용을 어렵게 쓴다는 거였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게 1급, 쉬운 내용을 쉽게 쓰는 게 2급이라면 나의 경우는 3급, 최악이었다. 사내 기획 회의에서도 내 의견이 반영된 적은 없었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도 없고 가장 중요한 구매욕 증진과도 동떨어진 기획이라는 것이다. 작가를 지망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내 생각이라면 일단 피하는 눈치였다. 그때 어디선가 나의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한 번 해보세요. 불행한 이야기든 불리한 이야기든 한 번 해보시라고요.”

나는 상대가 진정으로 나를 구원해줄 의지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고개를 들고 그의 표정을 잠시 살폈다. 얼마 전 새로 부임한 본부장이었다. 미심쩍어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대신 바로 기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단은 사내 게시판에 올려보는 겁니다. 칼럼 쓰는 카테고리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직접 써보세요. 취재도 하고 글도 쓰고 필요에 따라서는 사진도 올리세요. 블로그 같은 거 해보셨으면 잘 아시겠죠? 시간을 두고 반응을 좀 보도록 하죠.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다들 조용했다. 이런 식의 결정은 모두가 처음 겪었다.

“방금 나온 의견처럼 실제 사례를 통한 이야기를 모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우깡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은 많은 반면에 우리 고깔콘에 대한 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아까 그 자폐아 이야기도 다른 사람이 봤으면 결국 새우깡에 대한 또 다른 전설로 남아 세상에 떠돌게 되겠지요. 말 못 하는 자폐아가 그래도 새우깡은 말하더라. 그러고 보니 나도 새우깡이 먹고 싶어지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만들 수 없는 광고입니다. 한 가지 꼭 명심하셔야 할 것은, 우리가 결국은 이 과자를 판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로 하여금 마트에 가서 이 과자 한 봉지를 구매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그것만 기억하신다면야 게시판에 소설을 써도 무방합니다.”

게시판의 제목은 ‘이웃 사례 모음’이었지만 사람들은 다들 ‘불행한 이야기’라고 불렀다. ‘어이, 작가 선생님! 불행한 이야기 연재는 잘 되어 가나요? 나중에 책으로도 나오는 거 아냐?’ 그렇게들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기분 좋게 웃고 넘겼다. 내 의견이 제대로 관철되려면 거쳐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본부장이 기회를 주었다. 예전 본부장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운명일지도 몰랐다.

불행한 이야기는 분명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늘 그래오지 않았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남이 잘 안 될 때, 누군가 고통스러워할 때, 나보다 안 좋은 상황에서 내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래도 나는 아직 쓸 만한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나 정도면 행복한 거지, 안심하지 않았냐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속물들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말했듯이 자폐아를 둔 엄마의 편에 서는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불행일 뿐이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의지가 과연 매출에도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결과를 모르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나는 가방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 인쇄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젊은 남자는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는 듯 여유롭고 편안한 목소리로 받아주었다. 자해를 하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엄마가 피를 다 닦아낼 때까지 버텨 주었던 남자였다. 그날 내가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그 남자도 함께 내렸다. 같이 내리는 줄 몰랐는데 내리고 나니 남자가 옆에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대뜸 물었다.

“사탕 하나 더 있어요?”

아이의 가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 시설에서 장애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아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방 속에 군것질 거리가 잔뜩 들어 있는 걸 보고 놀란 남자에게 제과 회사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들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기도 하나요?”

“아뇨, 그냥 나눠주는 거죠. 우는 아이도 달래고 광고도 되고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훈훈한 광고 하나 찍으셨네요. 아이가 이미 다른 과자의 골수팬이어서 아쉽게 됐습니다만.”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 아이, 정말 새우깡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몰라요?”

남자가 대답했다.

“못 하는 거겠습니까? 안 하는 거겠죠.”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세상에 한 가지 말만 하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편하겠어요?”라고 대답하는 남자. 그 아이의 그 엄마의 그 선생이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던져준 날이었다. 그것이 과연 홍보 전략에도 들어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나더러 교회로 와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퇴근하기 전까지는 잠시도 쉴 틈이 없고, 퇴근 후에는 신학대학원 스터디 모임에 바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그에게 갔다. 교회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간 남자는 앞서서 성큼 걸어가더니 식판 위에 밥과 반찬을 담았다. 나도 그를 따라 식판에 음식들을 담았다. 주방에 모여 있던 할머니 몇 분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밥숟갈을 뜬 상태였다. 그의 앞에서 나도 밥을 먹었다. 약간 싱거운 듯한 반찬들은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그가 밥을 입에 문 채 말을 꺼냈다.

“취재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여기 아이들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과 회사에서…… 글 쓰시는 분인가 봐요?”

“그 비슷한 일을 해요.”

“소재거리야 엄청 많죠. 날마다 사건이 터지니까.”

남자는 기분 좋게 응해주었다.

“얼마든지 방문하세요. 저야 어려울 게 없죠. 그쪽이 오셔서 그냥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그냥 보기만 할게요. 대신 궁금한 게 있거나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을 때 여쭤 봐도 되겠죠?”

“그거야 상관은 없지만, 보는 것 이상으로 좋은 글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남자는 장담하듯 말하며 된장국물의 마지막 한 모금을 홀짝 들이켰다. 시래기가 들어간 된장국도 상당히 맛있었다.

“오늘도 가방에 과자 좀 들어 있어요?”

“사탕이랑 초콜릿 같은 거 있어요.”

“좀 줘 봐요. 식당 밥 공짜로 얻어먹었잖아요.”

남자는 눈짓으로 주방의 할머니들을 가리켰다.

“참, 여기 오실 땐 그런 옷은 입지 마세요. 얼룩지고 찢어져도 되는 걸로 입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불행한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기획 회의에서 제안했던 지하철 사건으로 정했다. 지하철 안에서 있었던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새우깡’을 ‘고깔콘’으로 바꿔서 작성하는 것이 양심에 걸리긴 했다.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준 사람은 인어공주인데 엉뚱한 사람에게 찬사가 돌아갈 때 느꼈던 박탈감이 떠오르면서 나 자신이 치명적인 가해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인어공주 편에 섰을 때의 얘기이고, 엉뚱한 사람 입장에서는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왕자는 결국 그 엉뚱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두 사람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선 ‘고깔콘의 운’을 믿어보는 수밖에. 생애 최초로 간접 경험한 비극 동화의 결말이 이 와중에 생각나는 것도 우습지만, 나의 입지를 바꾸어줄 회사 업무라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두 개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 모습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두 개의 마음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시간이 당분간 이어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 아이는 교회 안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가장 어렸고, 그래서 비교적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기특하게도 얌전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멍하니 창문을 바라볼 때면 평범한 아이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다른 아이들은 덩치도 산만하고 행동도 산만해서 정신이 없었다. 가지고 간 과제들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물론 과자 상자 속에 새우깡은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지하철 꼬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이가 가엾기도 했고 평소에 애사심이 남다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새우깡을 한 봉지씩 챙겨 넣었다. 발달장애 1급인 지하철 꼬마의 팔과 다리에는 압박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갑작스런 자해 행동을 막을 수 없어 택한 방법이라고 남자가 말해주었다. 심할 땐 무릎 보호대는 물론 머리에 헬멧도 씌운다고 했다. 작은 체구에 온갖 장비를 갖춘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귀엽죠? 꼭 어릴 때 저랑 비슷하다니까요.”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 번째로 찾아갔을 때였다. 그 전까지 남자는 내가 와도 목례만 할 뿐 말을 걸지 않았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나도 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도 내가 편안히 관찰하고 가도록 배려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명의 대학생 봉사자가 아이들 곁을 돌아다니며 도와주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아이들이 아니라 여대생들에게 가 있는 것 같았다.

“저분들 말이에요?”

남자가 웃었다.

“아니요. 새우깡이요.”

아이는 헬멧과 무릎 보호대를 착용한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교회 마당에는 바람결에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을 못 그리나요?”

내가 물었다.

“우리도 수업 시간에 딴짓 많이 했잖아요. 그게 어디 못해서 그랬나요?”

나는 끄덕끄덕했다.

“저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예요?”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요. 저렇게 권태로운 표정으로 두 손 놓고 있는데 크레파스를 쥐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면 저 아이는 뭘 하죠? 저렇게 창밖만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건가요? 뭔가가 나타날 때까지?”

“그때까진 새우깡이 저 아이의 전부겠지요.”

남자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이 어머니가 안 해본 게 없어요. 여기저기 좋다는 곳은 다 데리고 가봤대요. 아이에게는 복잡한 심리 이론이나 값비싼 교육 치료가 아니라 끈기 있게 지켜봐 줄 한 사람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대요.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에게만 닿아 있었다. 저야 뭐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끈기 있게 지켜볼 수는 있거든요. 돈도 안 들고. 저한테도 공부가 되고요.”

“신학이랑 같이 공부하시는 건가요?”

“신학은 가족이 원해서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목사거든요. 형제 중에 한 명은 신학을 공부했으면 하세요. 특수교육이랑 같이 공부하고 있어요.”

아직도 부모가 자식의 직업을 선택한단 말인가. 게다가 목사라는 것은……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남자에게 묻지는 않았다. 괜한 참견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숙명 앞에 자신 있어 보였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남자와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느꼈던 인상을 그대로 표현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해 보이는 한 아이. 수업 시간이면 늘 먼산바라기를 하던 꿈 많은 소년. 의젓하고 사랑이 많아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엄격한 목회자 아버지 밑에서 하고 싶은 것을 애써 눌러야 하는 불우한 환경. 아이의 꿈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잠든 밤, 아이가 책상 서랍에서 꺼내 먹는 ‘고깔콘’. 대체로 이러한 줄기였다. 남자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은 바는 없지만 문장은 술술 이어졌다. 이것으로 다섯 번째 에피소드를 사내 게시판에 올리고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건 바로 다음날부터였다. 재밌다, 괜찮다, 이대로 TV광고 들어가도 되겠다 등등의 말들이 들렸다. ‘이것도 실화야? 원래는 새우깡이었던 거 아니야? 아니면 감자깡? 고구마깡?’ 사람들은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했다.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느 부분이 상상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한 제스처만 취해주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은 더 묻지 않았고, 사실 여부를 따져야 할 정도로 희귀한 일도 아니었으며, 사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즐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교회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갔다. 회사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면 아이들의 점심시간에 맞추어 방문할 수 있었다. 갈 때마다 과자선물세트를 챙겼고 아이들은 너나없이 나를 반겼다. 지하철 꼬마만큼은 다른 아이들처럼 내색하지 않았지만 새우깡 봉지를 흔드는 이상 나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했다.

나는 처음부터 가장 의아하게 생각했던 아이의 엄마에 대해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퇴근 시간인 일곱 시쯤 아이를 데려간다고 했다. 그때쯤이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간 뒤였다. 남자는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학교에 간다고 했다. 엄마의 사정이 딱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엄마의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스터디 모임에 참석한 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문화센터에서 포크 아트를 가르친다고 했다. 포크 아트? 나무나 점토 제품에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혀 장식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교실 입구에 있는 우체통과 거울을 가리켰다. 나무를 깎아 만든 우체통에는 빨간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거울 가장자리에는 분홍색 장미꽃잎이 띠를 이루었다. 모두 아이 엄마의 작품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실력도 좋고 성격도 쾌활해서 부르는 곳이 많다고 했다. 엄마의 인생은 불행하지 않아 보였다.

아빠가 없다고 가정해 본다면? 엄마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엄마와 아이, 단 둘이 사는 작은 집.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일을 하러 가는 엄마. 학창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된 엄마는 현실과 타협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문화센터에서 아주머니들을 대상으로 포크 아트 강좌를 진행한다. 센터에 모인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어려운 속내가 있지만 암시로만 처리, 모두들 그 시간을 통해 삶의 기쁨과 웃음을 찾는다. 수업이 끝나고 다함께 모인 휴식 시간, 누군가 ‘고깔콘’을 펼치면 다들 아이처럼 ‘와아!’하는 함성. 이것으로 일곱 번째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홍보팀장에게서 지시가 떨어졌다. 홍보팀장은 본부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내가 쓴 에피소드 중에서 몇 가지를 각본화하겠다는 것이다. 감독과 배우를 낙점했고, 광고 촬영 날짜가 정해졌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남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광고가 나가고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광고 잘 봤습니다.”

그가 전화로 건넨 첫인사였다. 그는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까지 와주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린 것도, 함께 저녁을 먹는 것도. 그동안 나는 오로지 일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메뉴로 샤부샤부를 고른 것은 나였다. 달리 생각나는 메뉴가 없었다. 남자도 괜찮다고 했다.

“오늘은 스터디 모임 없는 날인가 봐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요. 목사 고시가 끝났거든요.”

“목사 고시요?”

“목사 되려고 보는 시험 있어요.”

“그럼 이제 진짜 목사가 되는 건가요?”

“모르죠.”

남자가 냄비에 담긴 국물까지 완전히 다 마실 때까지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오늘은 그리 춥지 않으니까 좀 걸을까요?”

남자는 산책을 제안했다. 하얗게 쌓인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어 한밤인데도 사위는 밝았다.

“다음 편도 구상해 놓았어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가 나간 후에 나는 더 이상 억지로 무언가를 짜내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것들을 적당히 재구성하면 얼마든지 그럴 듯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스토리텔링의 전문가들이 나서기 시작했고, 이번 광고를 벤치마킹하는 타사들도 생겨났다. 어쩌면 다음 편도 구상해 놓았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젓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따져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하는 일 말입니다. 상당히 멋진 일이긴 해요. 15초 동안 엿보는 타인의 인생, 타인의 아픔, 타인의 사랑.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고깔콘이라는 게 조금 유감스럽긴 하더군요.”

남자의 말에서 체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혹은 체념 어린 슬픔. 그는 광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광고에서 사람이라든가 이야기가 아닌 단지 고깔콘만을 보았다면, 그가 광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남자를 탓할 수는 없었다.

“광고는 단지 껍데기일 뿐이에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남자가 나를 보며 다시 물었다.

“껍데기라고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을 대단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로 생각해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히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남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나와 나의 광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남자였다. 남자를 탓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의 개별적인 취향을 존중해서였다.

“단지 제 얘기가 나와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남자는 몹시 신중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많은 이야기들, 저마다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장면들, 우리가 사는 동안에 만나는 사소하지만 시선을 끌었던 순간들이 15초의 틀 속에 갇힌 채 결국에는 그것들과 아무 상관없는 하나의 상품을 광고하고 한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에 일조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러니까 당신이 보기에는 제 광고 역시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얘긴 거죠?”

“이봐요, 상업주의에 속하지 않은 광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광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이번 일을 시작한 거고, 결과도 잘 나왔어요. 제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생각해요. 회사 입장에서 보면 상품의 구매욕을 끌어내는 게 궁극적인 목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자는 내 말을 끊어버렸다.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도 속고 있는 겁니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내내 남자는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어떠한 말도 걸지 못했다. 그가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광고는 짧지만 파장은 크다. 짧은 시간 동안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바로 광고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물건을 사겠지만 어떤 사람은 영상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스토리에 끌리겠고, 어떤 사람은 출연 배우에게 반할 것이다. 저마다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따윈 품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이용해 작은 반역이라도 이루고 싶었다. 남자의 말을 듣고 나자 내가 이루고 싶었던 반역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하찮게 여겨졌다. 애초에 반역을 원했다면 이 일에 손을 데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진실을 각색하는 일을 즐기는 데 몰두했던 시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속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을 뿐. 지하철역에서 우리는 기약 없이 헤어졌다.



남자에게서는 그 후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도 연락할 일이 없었다. 남자가 일하는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회사의 이미지와 매출의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불러일으킨 ‘불행한 이야기’의 다음 편들은 나 없이도 이어졌다.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애초의 내 기획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미 나를 떠난 일이었다. 내게는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다. 고깔콘의 후속으로 출시되는 신제품들도 줄을 잇고 있었다. 사장과의 연봉협상 자리에서는 연봉을 조금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감사하다고 말했는지, 그저 목례만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몇 건의 송년회를 지루하게 해치웠고, 술에 취한 밤이면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핸드폰을 붙잡고 남자의 번호를 불러오려다 전원을 끄고는 잠이 들었다.

타인의 불행을 기다리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업무와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아침 출근길이면 정기 구독하고 있는 열아홉 권의 일기장을 들여다본다. 업무와 상관없이 타인의 불행한 일기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 출근길 지옥철, 무료하고 빽빽한 인간 밀림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이의 불행이 나를 숨 쉬게 했다.

불행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인생의 어두운 곳만을 응시하게끔 만들어진 모양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자기 것으로, 자기 안으로 빨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들의 불행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그들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짐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졌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불행을 그들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삭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