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엄마의 정의는 어떻게 될까.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아빠는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아버지'를 격식을 갖추지 않는 상황에서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자기를 낳아 준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어머니'를 격식을 갖추지 않는 사황에서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한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낳은 상황에서 생물학적으로 남자면 아빠, 여자면 엄마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자꾸 나는 내가 아빠인 것 같다. 물론 아이들은 나를 끊임없이 엄마라고 부르지만,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준비를 하고 새벽같이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간단한 간식이나 저녁거리를 사 가지고 퇴근을 하고 아이들과 조금 놀아주다가 뽀뽀를 해주고 재운다. 그리고는 남은 일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다 잠자리에 든다. 내가 스스로를 아빠 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하루의 일과가 30여 년 전 우리 엄마의 일과보다는 아빠의 일과와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말이 되면, 나의 '아빠 미(美)'는 더욱 빛을 발한다. 주중에 못 놀아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공원으로, 백화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술래잡기도 하고, 엘사 드레스도 안겨주곤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한껏 뿌듯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좋은 '엄마'는 못 되는 것 같은 미안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모름지기 엄마라 함은, 삼시세끼 아이의 식사를 살뜰하게 챙기고, 아이들을 장난감을 포함하여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다녀왔을 때 환한 미소로 아이들을 맞아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에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주신, 하지만 워킹맘으로서 나는 못하고 있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는 '엄마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인 것이다. 그래서 워킹맘인 나는 무의식적으로 계속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이러한 아빠 다움과 엄마다움의 기준은, 부부 중 한 명이 사회활동을, 나머지 한 명이 가사활동을 전담하던 시대에 생겨났고 내 의식 속에 스며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계속 들이민다면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당당한 엄마가 될 수 없다. 부부가 함께 사회활동과 가사활동을 하는 시대에 이전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뭔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영미법에서 다수 당사자가 공동으로 사업을 수행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인트 벤처(Joint Venture)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컨소시엄(Consortium) 방식이다. 조인트 벤처는 사업상 역무를 다수 당사자가 함께 수행하되 지분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배분한다. 컨소시엄은 사업상 역무를 두 당사자간 각자의 역할을 나눠서 수행하는 방식이다. 예전 세대의 부모들이 부모의 역할을 '사회활동'과 '가사'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컨소시엄 형식으로 수행하였다면, 나의 경우에는 사회활동과 가사 모두 합쳐 50대 50의 지분으로 남편과 조인트 벤처 형식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모로 가도 산으로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현재까지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것 같다. 남편도 가사에 큰 관심을 갖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을 돌보려고 하고, 나도 시간이 되는 한 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무엇보다 표준 국어 대사전이 틀릴 리 없다. 나는 여자니까 엄마가 맞고,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으니 나는 좋은 '엄마'가 틀리 없다. 사실 머 엄마인지 아빠인지가 머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엄마, 아빠이기 이전에 우리는 똑같은 '부모'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