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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Sep 28. 2020

이런 명절

온 가족이 모여 한바탕 놀 수 있는 그런 명절을 꿈꾸다.

나는 개인적으로 명절을 참 좋아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북적이는 것도 좋고, 오랜만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평소에는 먹지 못하던 음식을 잔뜩 해놓고 배가 터져라 먹는 것도 너무 신난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모여서 이런 '명절다운 명절'을 보내곤 했는데, 그 명절만 보내고 오면 왜 엄마와 아빠가 싸우셨는지, 엄마는 그다음 날 긴긴 낮잠을 주무셨는지 알게 된 건 내가 주민등록증이 나오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할머니 댁에서의 명절은,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무랄 때 없는 성대한 명절이었지만,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는 번거롭기 짝이 없고, 고되기 짝이 없는 행사였다. 일단 우리 엄마와 세 딸들을 포함한 할머니,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등등의 여자들은 전날에 모여 송편을 빚고, 전과 부침개를 부치고, 고기를 재고, 나물을 만들고 하루 종일 주방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바둑을 두거나, 옹기종기 근황 토크를 진행 중인 남자들의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를 차려 나르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이미 명절 전날 삭신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 게임은 당일날 시작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제사상을 차리고, 아침을 먹고 나면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친척 어르신들이 오셔서 다시 다과상을 차리고, 점심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저녁식사를 차리고 또 설거지를 하고.. 글로 적기만 해도 피곤이 몰려온다.


다행히도 몇몇 시어머니들의 혁명에 힘입어 요즘에는 이런 '정통' 명절을 보내는 집은 많지 않은 듯하다. 조금 슬프게도 워킹맘 며느리들을 둔 몇몇 시어머니들은 본인은 아직도 명절 노동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였음에도, 차마 며느리에게 명절 노동까지 시킬 수는 없어서 혼자 모든 부담을 떠안고 계시는 분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일하는데 명절이라도 좀 쉬고 싶은 며느리들은 이런 명절이 마냥 부담스럽기만 하다. 코로나로 명절에 가족행사를 지양한다는 정부의 코멘트가 반갑기까지 하다.


하지만 '명절'이 없어지는 것은, 나같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너무 아쉽다. 나는 제사를 지내고 싶지도 않고 밤새 설거지를 하고 싶지도 않지만 가족끼리 모여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처럼 놀기 좋아하는 우리 친정 식구들은 이런 명절을 탄생시켰다.


일단 아무 준비 없이 만난다. 코 앞에 살아도 만나면 또 반갑다. 명절이라는 이름까지 붙어있으니 한복을 입거나, 선물 사거나 이런 거 하나 없어도 반갑기만 하다. 제사 드릴일 없고, 가족끼리 격식 차릴 일 없고, 어차피 근처에 살다 보니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바리바리 싸가고 싸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하루 이틀 잘 놀고 헤어지는 게 목적이니, 서로 부담 주는 건 일절 안 한다.


그리고 동네 떡집에서 기가 막힌 송편이랑 전을 사다 먹는다. 딸 셋 중 둘이 워킹맘이고 한 명은 미혼인데, 4-6세 사이의 아이가 넷이나 있는 이 환경에서 송편을 빚고 전을 부쳐먹는다는 것은 절대 무리이다. 송편도 좀 사 오고, 전과 나물도 좀 사 오고 굳이 한 가지 정도 집에서 요리하자면 고기 요리 한 가지 정도를 해서 밥과 함께 먹는다. 그리고 상을 차리거나, 상을 정리하거나 하는 건 누구 하나 정해진 사람 없이 딸과 사위들이 같이 한다. 설거지도 딸들이 엄마를 도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식기세척기가 알아서 한다. 누군가가 주방일을 하고 있을 때에 딱히 억울하지 않은 것은 바둑을 두거나 앉아서 노는 남자들 하나 없이, 남은 사람들은 애들을 보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같이 숨바꼭질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매우 고단하고 훌륭한 노동이다.


보통 이렇게 밥을 먹고 약간의 담소를 나누다 헤어지는 집은 많다. 하지만 조금 차별화를 하자면, 밥을 먹었으면 즐겁게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면 아쉽다. 운동을 좋아하는 우리 식구들은 같이 테니스를 치러가거나, 스크린 골프라도 간다. 비슷비슷한 실력으로 서로 응원하고 칭찬하고 가끔은 흘겨보고 이렇게 한바탕 웃고 땀 흘리고 놀다 보면 웃음꽃이 피기 마련이다. 그리고 슬슬 배가 고파지면, 간단히 외식한다. 놀기 위한 명절이니, 우리가 함께 놀고 있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가족끼리 노는 게 일상인 친정에서 시작된 이런 "노는 명절"은 어느새, 우리 시댁에도 스며들어가고 있다.  


추석이 왜 생겼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한 해의 농사로 인해 얻은 수확물에 대해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고 가족들들과 나누어 먹는 뜻깊은 풍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상님들도 '추석'이라는 계기로 자손들이 더 힘들고 괴롭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도 너무 명확한데, 기존의 관습에 사로잡혀 무리해서 제사를 지내고, 서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너무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지인에게 '우리 집에 놀러 올래?'라고 했을 때와 '우리 집에 설거지하러 올래?'라고 했을 때, 어떠한 경우에 우리 집에 놀러 올 가능성이 높을까? 또한 만약 이렇게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추석 당일에 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추석 전 주말에 올 수도 있고, 추석 후 주말에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추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제대로 된 제사상을 차림으로써 조상님께 예를 다하는 것'인 분들에게는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제안일지는 모르겠으나, 추석을 통해 가족들이 모이고 즐거워하고, 이로 인해 그다음설에도 그다음 해 추석에도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싶다면, 그 어떤 것보다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을 먼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게 고스톱이면 '아무개씨가족배 고스톱대회'를, 그게 노래라면 블루투스 마이크를 마련하여 '아무개씨가족배 노래자랑'을, 하다 못해 '추석맞이윷놀이대회'라도 기획하여 가족들과 함께 즐겨보자. 그리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드는 품이 있다면 모든 가족이 조금씩 나누면 된다. 그렇게 해서 명절 연휴 동안의 나의 안위 또는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의 소중한 명절이 낭비되는 상황은 최대한 막아야 한다. 최상의 제수음식의 준비가 아닌, 온 가족이 함께 놀고 웃기 위해 노력하는 이런 추석.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추석엔, '노는 게 제일 중요한'이런 추석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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