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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담그는 여자

워킹맘들이여~ 자생력을 잃지 말자!!

by 워킹맘

주말에 김치를 담갔다. 와우~ 대단한 여자의 느낌이 든다!!! 워킹맘인데 김치도 담그고 먼가 부지런하고 손끝도 야무질 것 같으며 심지어 그 김치가 맛있을 것 같은 느낌 아닌가.


현실은 이러하다. 친정엄마가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까지 김치 3종 세트를 담그시는 걸 옆에서 열심히 '보조'했다. 눈으로 무엇을 넣는지 얼마나 넣는지 열심히 체크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보조'만 했지만, 사실 가끔은 직접 담그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 김치 맛이랑은 좀 달라서 아직도 수련이 필요하다.


마트든 인터넷이든 클릭 한 번이면 소문난 장인의 김치를 대놓고 먹을 수 있는 21세기에 왜 그런 궁상을 떨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나의 아주 까다로운 김치 취향 때문이다. 나는 엄마 김치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 김치가 아니면 '익히지 않은' 김치는 먹지 않는다. 심지어 시어머니 김치 조차도 말이다(까다로워서 죄송합니다^^;;).


우리 엄마 김치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이북식인데 고춧가루는 조금 덜 들어가고, 찹쌀풀 대신 멸치육수를 넣어 익을수록 시원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28살까지 김치를 먹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몇 번 먹어보고는 뒤늦게 엄마 김치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쉽고 간단한 음식은 좀 해 먹고, 반찬은 좀 얻어먹어도 되는데 김치만큼은 해결이 안 되었다. 그래서 직접 '계승'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결심을 한 후로는 김치가 떨어질 때쯤 되면, 스스로 김치를 담그겠다고 나서고, 김치 담그는 날은 하루를 비워서 김치를 절이는 것부터 양념에 버무리는 모든 순간을 목격하려고 한다. 겨울철 김장 같은 경우는 양이 많기 때문에 나의 기여도는 더욱 커진다. 단순한 '목격'에서 벗어나 나만의 김치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김치 담그는 것은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때 되면 마지못해 힘들게 담그셨던 엄마도, 이제는 바람 잡는 딸과 적극 협조하시는 아버지 덕에 좀 더 수월하게 김치를 담그신다. 이렇게 담가진 김치는 언니네와 우리 집으로도 보내져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소비된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예전 워킹맘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일들이 많다. 새벽 배송도 생겼고, 반찬가게도 넘쳐나고, 세탁소도 동네마다 있다. 그러다 보니 나를 포함한 워킹맘들이 이러한 외부 도움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 게 현실이고, 이 시대에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참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조금 슬픈 생각도 든다. 그렇게 몇 년 살다 보니, 다림질도 못하고, 김치도 못 담그고, 장을 보러 가도 뭘 살지 잘 모르겠다. 주말이면 집에서 뭔가 해 먹기보다는 손쉽게 외식에 나선다. 이러다 진짜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매일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살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주말이라도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딸들과 함께 머라도 만들어서 부모님을 대접하고, 청소도 빨래도 직접 하고, 평소에 친정 엄마손이 아니면 그 누구의 손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요리는 미리미리 배워서 연습해두는 것이다. 이렇게만 해도 낮에는 일하고 퇴근해서는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워킹맘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보다 주체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여러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고마움을 느낄 수 있고, 잠시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에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변의 도움을 받되, 종속되지 않은, 그런 자생력 있는 워킹맘을 꿈꾸면서 말이다.


물론 전부 다 할 수는 없다. 워킹맘의 시계는 남들보다 빨리 흘러가서 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소소하게 아주 가끔씩 돌아오는 김치 담그기부터 시작했다. 김치는 노력 대비 만족감이 아주 큰 요리이다. 김치를 담근 날은 돼지고기 수육으로 삶아 보쌈 파티를 하고, 잘 익은 김치만 있어도 된장찌개를 하나 끓이고 계란 프라이를 곁들이면 훌륭한 한 상을 금방 차릴 수 있으며, 김치가 쉴 때쯤엔 김치찌개를 끓여먹거나 김치전도 부쳐먹을 수 있다. 이런 '금쪽같은' 김치를 3종 세트로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놨으니, 이 든든한 마음만큼은 빌 게이츠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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