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겨울은 길고 춥고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던 터였다. 지난 1월에 답사차 이곳에 왔을 때, 오후 3시 반에 하늘이 캄캄해지는 진귀한 광경을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5,6,7,8월. 매일 감사와 감탄이 절로 나는 완벽한 바캉스 날씨가 이어졌는데, 9월이 되니 갑자기 스산한 바람과 비와 구름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이곳의 날씨는 겨울 맞을 준비를 빨리 했고, 11월 중순을 넘기자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아이들이 집에 도착하는 4시면 이미 어두워졌다. 휴. 이제 말로만 듣던 그 우울한 계절의 시작이구나.
하지만 대낮의 어둠이 반갑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11월 20일, 지난 주말이었다. 이곳에서 절친해진 동갑내기 친구와 처음으로 아이들을 아빠들에게 맡기고 단둘이 나들이를 했다. 원래 아이들과 온 가족이 함께 갈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아이들에겐 너무 추운 날씨였고, 전날 밤 두 아빠의 재즈공연 외출을 미리 허용했던 터여서 미안함 없이 여자 둘이서만 가기로 했다. 마켓이 처음 열리는 주말이었고,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늘 TV에서만 봐왔던 터라 기대가 컸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편이 주말 저녁에도 회사일이 있어서, 오후에 나가서 저녁 6시 전에는 돌아와야 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밤이 제맛인데. 그래도 여기는 해가 빨리 지니까.. 하는 마음을 위안 삼아 나갔다.
마켓 광장에 다가가기 전 골목부터 작은 나무 오두막 같은 상점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털모자, 장갑, 양털 양말, 크리스마스 장식품, 크리스마스 쿠키, 초콜릿 등을 팔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 광장으로 가니 거대한 광장이 마켓으로 가득 찼고, 심지어 산타 썰매 모양의 청룡열차, 날아다니는 루돌프 등 재미있는 놀이기구도 많았다. 곳곳에 2층, 3층으로 세워진 산장 같은 곳에는 따끈따끈한 뱅쇼(와인에 과일과 계피 등을 넣고 끓여서 주로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감기차)를 사서 마시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늘 오던 광장인데, 그 드넓은 공간이 가득 찬 것도, 완전히 새로운 크리스마스 나라로 변신한 것도 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마법처럼 이 많은 상점들과 놀이기구와 3층 목조 건물이 하루아침에 들어설 수 있단 말이지?
내가 사는 동네 '브로츠와프'의 크리스마스 마켓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 추워져서 예쁜 통나무 산장 같은 곳에 들어가 뱅쇼를 주문했다. 산타 장화 모양의 컵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뱅쇼를 주문하면 그 컵에 뱅쇼를 따라준다. 그 컵에는 예쁜 크리스마스 풍경 그림이 그려져있고, Wroclaw 2022라고 쓰여있었다. 뱅쇼는 15 즈워티(4500원 정도)이고, 컵 보증금으로 20 즈워티(약 6000원)을 낸다. 컵을 돌려주면 20 즈워티의 보증금은 돌려받고, 아니면 그냥 사는 샘이다. 뱅쇼도 커피처럼 여러 종류가 있었다. 어떤 과일을 많이 넣었는지에 따라 라즈베리, 자두 등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우리는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의 뱅쇼를 주문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뱅쇼 두 잔이 나왔다. 우리는 3층의 창밖 테라스로 가서 크리스마스 마켓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건배를 했다. 한 모금 들이키는데, 향긋한 와인과 과일향이 퍼지면서, 뜨거운 기운이 옴 몸으로 뻗어나갔다. 우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집에서도 정성스럽게 끓여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다.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행복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바라보며, 크리스마스 와인을 마실 수 있다니. 심지어 애들 없이!! 애들이 있었으면 뱅쇼를 마시러 복잡한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며, 놀이기구와 사탕, 초콜릿 등에 끌려다니며 벌써 진을 뺐을 것이었다.
2022년 브로츠와프 기념컵에 담긴 뱅쇼. 매년 기념컵이 달라진다.
브로츠와프는 한국인도 많이 사는 곳이어서인지, 한국 마켓이 두 개나 있었다. 한 곳은 떡볶이와 닭갈비를 팔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만두를 팔고 있었다.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에 청사초롱을 달고 있는 한국 마켓이라니, 자랑스럽고 멋지다. 떡볶이를 조금 맛보고, 만둣집에서 파는 마늘종 장아찌를 샀다. 날이 추워서 친구는 털모자와 가죽장갑을 샀고, 나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할 오너먼트와 아이들에게 줄 트리 모양의 사탕을 샀다. 사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크리스마스 때까지 자주 나올 거니까, 오늘은 조금만!’이라고 스스로를 자제시켰다. 길거리 음식도 많았다. 커피와 함께 캐러멜 타르트와 오렌지 타르트를 먹었다. 살살 녹는 달콤함에 잠시 추위를 녹였다.
한 바퀴를 돌아보니 다른 곳에 또 뱅쇼를 파는 멋진 목조 산장이 보인다. 우리는 “와인 끓일 때 알코올이 다 날아가기 때문에 알코올이 거의 없대!”라고 굳이 강조하며 뱅쇼를 마시러 또 들어갔다. 이번엔 컵 보증금을 내거나 또 살 필요 없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산타 장화 컵에 받았다. 이번에 주문한 건 ‘브로츠와프’라는 이 지역 이름의 뱅쇼. 우와. 아까와 다른 맛이지만 이것도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다. 좀 전에 마실 때는 테라스에 있어서 몰랐는데, 이곳 안에서 마시고 있으니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크게 들려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었다. 예쁜 크리스마스 조명과 와인, 캐럴까지 어우러지니 정말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었다. 사진 속의 표정은 찐행복이다. 창밖은 이미 캄캄했다.
크리스마스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행복했던 밤
처음이었다. 빨리 캄캄해지길 기다렸던 것. 어둠이 그토록 반가웠던 것. 2시 무렵에 나와서 조금 둘러보고 뱅쇼 한 잔을 먹고 나니 곧 어둑어둑해졌다.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조명과 마켓, 놀이기구들은 어둠 속에 더욱 반짝였고, 크리스마스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직접 본 적이 없어 올 겨울에 가장 기대되는 것이었는데, 최근 몇 해는 코로나로 열리지 못한 때도 있었다니, 더 감사하고 꿈만 같은 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열 배는 커 보이는 폴란드식 소시지와 꼬치, 골롱카(족발)를 포장해서 어둠을 뚫고 집으로 왔다.
대왕 꼬치와 대왕 소시지. 유럽은 스케일이 다르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 해지는 어둠이 좋아졌다. 4시부터 어두워도 싫지 않았고, 춥고 어두울 때 아이들과 오손 도손 따뜻한 집에 있을 수 있는 것,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차분하게 이른 잠자리 준비를 할 수 있는 것,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을 하고 반짝이는 불을 볼 수 있는 것이 무척 좋아졌다. 밤 10시까지 밝았던 여름에 에너지를 발산하며 신나게 여행을 다녔다면, 이제는 집에서 벽난로를 떼고, 안락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내면의 초를 켜야 하는 시기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토록 두려워했던 겨울의 어둠이, 이 추위가 싫지만은 않다. 조금 좋아지려고까지 한다. 계절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어느 계절이든 어느 날씨든, 기대할 수 있는 딱 한 가지만 있다면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내게 크리스마스 마켓이 어둠의 즐거움을 선물해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