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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Jul 25. 2022

몰타에서, 어디까지 해봤니?

6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순간



오랜만에 가슴이 설렌 건 이 사진을 본 순간이었다.

영국에 머물고 있는 시누이 가족과 몰타에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배 타고 코미노 섬을 투어 하기 위해 예약이 필요하다며 몇 주 전에 보내준 사이트였다. 코발트빛 바다, 선베드가 펼쳐진 큰 페리, 그리고 페리 2층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슬 라 이 드 !!! 핸드폰 속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사진이었는데 그 슬라이드를 타는 장면을 상상하자 온몸이 찌릿하며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코미노 섬 투어 날이었다.


무조건 휴양하자며 온 곳이어서 이틀 동안 늦잠을 잤는데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섬 투어는 9시에 출발해 오후 4시까지 장장 7시간. 8시 20분에 도착했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유럽 사람들 답게 페리 2층에 해가 짱짱하게 드는 곳부터 자리가 먼저 찼다. 자리가 선베드처럼 되어있어서 다들 커다란 수건을 깔고 이미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물빛이 신비로웠던 몰타 블루라군


배는 중간중간 멋진 곳에 멈춰 바닷가의 동굴을 보여주었고, 30-40분쯤 달려 코발트 빛의 블루라군, 코미노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파라솔을 빌리고 진한 코발트 빛과, 연한 하늘색 빛이 나는 맑고 투명한 바닷가에 뛰어들었다. 열두 살 조카는 물론, 네 살, 여섯 살 우리 딸들도 구명조끼를 입고 신나게 뛰어들었다. 물론 나도 믿을 수 없는 풍경에 감탄하며, 정말 오랜만에 바다에 몸을 담갔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놀다가 다른 포인트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배에 탔다. 슬라이드를 타기 위해 조금 일찍 돌아왔다. 배에 타보니 정말 배의 2층에서 바다까지, 미끄럼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경사가 가파른 슬라이드가 연결되어 있었다. 발이 닿지 않는 물에서 잔뜩 겁먹는, 생존 수영이 불가능한 나이지만, 그럼에도 이 짜릿함을 놓칠 수 없는, 모험을 즐기는 나다. 유럽 사람들은 강이든 바다든 자유자재로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인 걸 알기에, 섬 투어 보트여도 구명조끼를 주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어젯밤에 시누이와 함께 튜브 파는 곳에 가서 어린이들이 팔에 차는 암링 튜브를 준비해 두었던 터였다.



팔에 끼고 빵빵하게 불었다. 아무도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튜브도 가지고  놀지 않는 이 틈에서 눈에 띄는 형광 주황의 암링을 차는 것은 한편으론 대단히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생명을 맞바꿀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부끄러움 때문에 모험을 포기할 나도 아니었다. 슬라이드를 보더니 시누이와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타지 않겠다고 했고, 우리 아이들이 타기에는 너무 높았다. 열두 살 조카와 나만 타기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가 슬라이드 앞에 섰다. 조카가 무섭다고 "숙모 먼저 타세요"라고 했다. 슬라이드 앞에 선 순간, 아찔했다. 끝까지 미끄러지기도 전에 바닷속에 빠질 것 같은, 위에서 보기에 거의 수직처럼 보이는 경사였고, 엄청 높았다. 바다의 깊이는 무척 깊었다. 생존 수영도 안 되는 이 여자가 겁도 없이 여길... 진짜 무서웠지만 슬라이드에 앉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시누이는 동영상을 찍으며 날 기다리고 있다. 뒤에는 조카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마음의 준비는 안 되었지만 그냥 소리 내서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셋에 미끄러졌다.


어마어마한 높이와 경사에, 슬라이드에 흐르는 물, 그리고 아마도 내 체중까지 더해져 속도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생각하는 순간 바로 바닷속으로 첨벙!!!!! 너무 세게 떨어지는 탓에 저절로 코에 물이 들어왔다. 오우 이 짭짤함, 얼마만이야. 세게 물살을 거슬러서인지 한쪽 암링이 빠질 뻔해서 잠시 아찔했다. 꽉 부여잡고 헤엄을 쳤다. 잠시 긴장했는데 조금 지나니 이 크고 깊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물살을 가르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나도 조카도 신이 났고, 우리는 여러 번 타고 또 탔다. 처음 탈 때는 그냥 무섭다 끝났는데, 네다섯 번째 탈 때는 멀리 보이는 멋진 섬 풍경을 바라보며 타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슬라이드 앞에 설 때마다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너무 재미있게 계속 타자 결국 시누이와 남편도 도전했다.


내 생에 손꼽히는 짜릿했던 순간


페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달려 고조 섬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이번에는 물이 더 깊고 파란, 동굴 옆에 잠시 머물렀다. 이 깊은 바다에 다들 신이 나서 맨 몸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심지어 젊은 친구들은 페리 2층에서 바로 다이빙을 한다. 정말 구명보트나 튜브를 끼고 있는 사람은 1도 없다. 아주 어린아이 한 명만 나와 같은 암링을 차고 그 깊은 바다에서 즐겁게 헤엄치며 놀았다. 그러나 이 짜릿함을 만끽한 이상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젯밤에 사두었던 스노클링 장비도 하고 내렸다. 남편은 잠든 둘째를 무릎에 눕힌 채 첫째를 보고 있었고, 시누이는 조카와 내가 신나게 노는 모습을 찍어주고 있었다. 바닷속에 하얗고 작은, 반짝이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더 깊은 곳에 검게 보이는 것이 해초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물고기들 무리가 수천, 수만 마리 모여있는 것이라는 걸 알고는 순간 무서워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바다는 깊고 깊었고 푸른빛 바다에 햇빛이 비쳐 신비한 패턴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또 슬라이드를 탔다. 아까 탔던 곳이 코발트 빛의 바다였다면, 이곳은 좀 더 청색에 가까운, 그러니까 훨씬 더 깊은 곳이었다. 무서웠지만, 아, 설명할 수 없는 이 공포와 짜릿함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이 난 조카와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조카는 신이 나서 항상 먼저 올라가지만 슬라이드 앞에 서면 "숙모 먼저 타세요"라며 자꾸 양보를 한다. 휴.. 나도 매번 무섭다고. 푸른색이 아찔했지만 역시 하나, 둘, 셋에 몸을 맡겼다. 풍덩! 역시, 하길 잘했다. 너무 재밌다. 너무 신난다. 이번에는 스노클링 장비도 착용한 상태여서 슬라이드에서 떨어지자마자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헤엄을 쳤다. 고개를 들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와, 멀리 보이는 몰타 특유의 라임스톤 섬이 보인다. 거대한 바닷속에서 작디작은 생명체로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 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둥둥 떠다니며 한참을 바라봤다.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수영하는 유럽인들과, 암링을 차고 바다와 하나된 나


돌아오는 페리 안에서 모두들 잠이 들었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느라, 남편은 아이들 돌보느라 모두 에너지가 소진되었을 터. 나는 짜릿한 흥분이 가시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봤던 풍경들이 떠올랐다.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호텔에 돌아와 수영복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씻기려니, 나는 그제야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났다. 충분히 아플 수 있을 만큼 나는 많이, 너무 신나게 놀았다. 현기증이 난다고 하니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가 오늘 제일 신났어, 다율이(조카)보다!"

"어, 알아."

"알아?"

"응. 여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데, 6년 동안 얼마나 답답했겠어. 지난주에 애들 데리고 워터파크 갔을 때도 슬라이드 보면서 타지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


그랬더니 남편이 웃으면서, 애들 유치원 등원시키고 나서 혼자 워터파크에 다녀오란다.

"오! 그러면 진짜 슬라이드 실컷 탈 수 있겠는데??"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오늘 시누이의 표현대로 나는 outdoor 형 여자였다. 초등학교 때 롤러스케이트를 신나게 탔고 중학교 때는 방과 후 활동으로 테니스를 쳤다. 고등학교 남녀 혼성 축구동호회에 들어 축구도 했다. 대학교 때도 웬만한 남자 선배들은 이길 정도로 탁구를 쳤고, 여자 농구 동아리를 만들어 농구를 했다. 취직 후에는 산에 다니는 걸 좋아했고, 전 직원이 골프를 치는 목포 MBC에 입사한 덕분에 20대 후반에 골프에 입문해 신나게 공을 쳤다. 신혼여행에서도 절반은 골프를 쳤고, 남편과 취미로 복싱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 모든 것은 첫째를 임신 후 멈추었다. 그리고 이제 몸 좀 풀어볼까 했을 때 둘째가 생겼고, 그 후로 두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공놀이도 물놀이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행복한 하루하루였다.


남편이 회사의 갑작스러운 일정으로 이번 휴가를 같이 못 올뻔했다가 다행히 일정이 취소되어 몰타에 같이 오게 되었는데, 남편 없이 왔더라면 또 나는 발목 찰랑찰랑한 바닷가에서 같이 모래놀이나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샤워하는 내내 오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가 나와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슬라이드 타면서 6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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