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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Oct 10. 2022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삼대 모녀의 춤바람

나 이런 사람이었어

 

폴란드에 온 지 6개월. 아이들 여름 방학을 맞아 친정엄마가 오기로 하셨다.

엄마와 함께 할 여행지로 고른 곳은 '시칠리아'였다.  

   

남편과 처음 폴란드에 방문하는 비행기에서 전자책을 읽었는데, 그때 우연히 고른 책이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 온 대답>이었다. 책을 선택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그 책은 이탈리아 남부 섬인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쓴 수필이었다. 유럽에 잠시 여행자로 살 마음으로 떠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이 다가온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혼재한 흥미로운 시칠리아의 여행기를 보면서, '언젠가는 꼭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낯선 도시 이름이 나올 때마다 구글 지도를 찾아보며 하트 표시를 해두었는데, 그곳에 가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첫 번째로 머문 곳은 팔레르모였다. 우리가 도착하는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고, 많은 역사유적지가 몰려있는 곳이었다. 저녁비행기였는데 그마저도 지연돼 숙소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숙소까지 오는 길이 불야성처럼 화려하고, 곳곳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도로에는 퇴근길처럼 차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관광지여도, 유럽 대부분이 일찍 문을 닫고 이 시간이면 완전히 고요한 새벽 풍경일 때가 많은데, 이렇게까지?   


불야성같은 시칠리아 팔레르모와 거리의 버스킹

            

우리가 갔던 8월 중순의 시칠리아는 낮에는 무척 더웠다. 저녁 레스토랑은 7시 30분은 되어야 문을 열고, 낮에 한산했던 거리는 밤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엄마와 나와 어린 두 딸들은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좀 쉬다가, 그대로 자긴 아쉬워 밤거리에 산책을 나왔다. 저녁을 먹을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고, 곳곳에서는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한 여인이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두 딸은 그 앞에 가서 수줍게 동전을 넣고 달려왔다.

            

프레토리아(Praetorian) 분수광장에서 두 남자가 기타를 치고 악기를 두드리며 비트 빠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곁에서 바라보던 우리는 흥이 나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들고, 할머니 손을 잡고 뱅그르르 돌았다. 집에서 아이들이 항상 신데렐라 역할놀이를 하며 무도회 춤을 몇 년을 춰왔었는데 그간 몇 년의 춤연습을 발휘할 기회가 오늘인 것 같았다. 엄마는 예전에 주민센터에서 아주 잠시 배웠던 댄스실력을 발휘해 스텝을 밟았고, 둘째의 손을 잡고 팔을 감아 뱅그르르 돌려주기도, 허리를 잡고 눕혀주기도 했다.

          

프레토리아 분수광장에서 춤바람


나도 아이들과 함께 춤을 췄다.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서 어떻게 췄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척 신이 났고, 사람이 많았으나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고, 자유롭고 흥에 겨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춤을 추면서도 엄마와 두 딸이 행복하게 춤추고 있는 모습이 예뻐 영상을 찍었고 카메라를 들고서도 영상이 흔들리든 말든 나는 계속 음악에 몸을 맡겼다. 난생처음 오는 이곳,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는 분수광장. 까만 하늘, 노랗고 붉은 조명 아래 엄마와 나와 둘 딸, 삼대 모녀 넷이서 춤에 흠뻑 빠졌던 그 무아지경의 순간. 그것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도 뜨거운 오후는 숙소에서 쉬다가 밤이 되면 슬그머니 나가 늦은 저녁을 먹고 바람을 쐬고, 버스킹 음악에 몸을 맡기곤 했다. 아이들은 금세 야행성이 되었다.  

         

그 후 시라쿠사에서 감동적인 새우구이도 먹고, 타오르미나의 지중해 절벽 끝에 세워진 원형극장의 아찔한 절경도 보았지만, 7박 8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삼대모녀가, 팔레르모의 광장에서, 밤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행복하게 춤을 추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시칠리아는 날씨만큼이나 핫하고, 사람들도 화끈하고, 운전도 거칠고, 풍경도 격하게 절경인 곳이었다. 날것과 같은 그런 곳이었기에 우리도 모든 가면을 훌훌 벗고 거리에서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내 안에 꿈틀거리는 흥을 발견했다. 그날 밤의 버스킹뿐 아니라 대낮에 흑인 아저씨가 신나는 댄스음악을 틀고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거나, 와인잔을 머리에 올리고 재미있게 춤을 출 때면 함께 비트를 타며 환호하곤 했다. 유로 동전도 아낌없이 넣어주었다. 아무도 의식할 사람이 없어서일까. 여행이 행복해서였을까. 1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서며 늘 타인의 시선을 자동적으로 의식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스스로가 새롭게 느껴졌다.  

 

새로운 나를 비춰주는 풍경들

   

8월의 여행을 마치고 아이들은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고요한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다가 그날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를 발견했다. 인간이 여행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여행이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자기 발견의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을 발견하고 사유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 여행이다.

여행은 새로운 자기를 잉태한다."


- 최인철 <아주 보통의 행복>


그날 밤 나는, 아주 작은 잉태를 경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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