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인데도 날씨가 많이 추웠고, 아이들은 언어와 환경이 전혀 다른 유치원에 울면서 갔고, 심한 일교차에 감기가 걸려 자주 아팠다. 한 놈이 걸리면 한 놈이 옮았다. 아프니 등원도 못하고 둘을 돌보다 나도 병이 나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내가 폴란드에 오기 전 그렸던 그림은 아이들이 한 달이면 유치원에 적응하고, 아이들이 등원하는 낮시간에 나는 가까운 동네로 여행을 하며 글을 쓰고, 주말에는 프라하로, 빈으로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하지만 실상은 온종일 서로 업어달라고 우는 두 아이를 차례로 업으며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려버린 나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우울하게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프라하 여행을 계획했다. 프라하는 집에서 차로 세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폴란드에 오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몇 주 전 생일도 있었던 터라 생일 기념을 핑계로 프라하의 호텔을 예약했다. 혹시 또 남편의 주말근무 같은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금액을 조금 더 주고 이틀 전까지는 취소할 수 있는 예약으로 해두었다.
다행히 변수 없이 당일이 되었다. 아침에 출발하려는데 첫째의 이마가 뜨끈뜨끈하다. 또?!? 또 열이 난다고??이미 호텔을 취소할 수 있는 기간은 지났다. 이걸 날려야 하는가. 다행히 아이의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아 보여서 남편과 나는 "그냥 호텔에서 놀다 오자"하며 해열제를 먹이고 떠났다.
날이 좋았고 체코는 정말 예뻤다. 바로 옆 나라인데도 폴란드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프라하에 들어서자 더욱 아기자기한 풍경과 강변이 눈에 들어온다. 프라하 성에 가장 먼저 갔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호텔로 갔다. 아이들이 배고플 것 같아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해열제를 먹이고 호텔에서 쉬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쉬지 못했다. 지금 호텔 밖을 나가면 사진에서만 보던 프라하 성이 기다리고 있고, 예쁜 카를교와 천문 시계탑과 광장이 펼쳐질 텐데, 어찌 이 좁은 호텔방 침대에 넷이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이 열이 좀 떨어져서 다 같이 나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건강을 끔찍이 생각하는 남편이 나가자고 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나 혼자 나갈 수도 없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시간을 보내다 해가 기울었다. 그러다 남편과 내가 교대로 다녀오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내가 애들 볼게. 나가서 보고 와.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운을 먼저 띄웠다. "아니야. 나 피곤해. 별로 안 가고 싶어. 여보 갔다 와!" 예스! 예상했던 답변이 나왔다. 남편은 늘 양보하는 사람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래! 내일은 여보가 나가." 하며 바로 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나 늦게 와도 돼?"라고 물어 미리 시간을 벌어놓았다.
택시를 타고 프라하 성으로 갔다. 호텔 직원의 추천대로 프라하 성까지 택시로, 그리고 성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면서 한 곳씩 둘러보기로 했다. 택시에서 내려 프라하 성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가 어디인지 알기 어렵게 조촐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간단한 짐 검사를 하고 터널 같은 건물을 하나 지나니 너무도 갑자기, 사진에서만 보던 그 프라하 성의 아랫부분이 거대하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점점 위를 올려다보니 섬세하게 조각된 성의 끝자락이 어두운 하늘 위로 쭈욱 뻗어있다. 무척 가까이에 있어서 우러러 올려다보지 않고는 한눈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 거대하고 섬세한, 성인지 조각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자태. 어둑어둑해져서 자세히 보려고 눈살을 찌푸려 집중하는데 때마침 따스한 조명이 서서히 비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우아하게 빛나는 동화 같은 성.
처음 마주한 프라하 성의 거대한 모습
한 바퀴를 빙 도니 어디가 정면이고 어디가 측면인지 알 수 없게 모든 곳이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한 채 한참을 올려다보니 목이 뻐근하다. 더 올려봤다가는 담이 걸릴 것 같았지만 목을 조물조물 풀어주고는 다시 우러러보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도 프라하 성과 함께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어 셀카를 찍었다. 하지만 성은 너무 가깝고 높아서 셀카로 그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 어두워서 화질도 좋지 않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한참을 찍었으나 한 장도 건지지 못했다.
밤이 늦어 사람이 별로 없었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나는 너무 추워져서 빨리 나가 커피숍이라도 가야겠다 생각했다. 바로 입구에 있던 카페는 그사이 문을 닫았다. 구글 지도에 카페를 검색하니 2킬로 정도는 걸어야 했다. 너무 추웠지만 별수 없어 걷기 시작했다. 카를 교를 향해 가는 길은 한참 내리막길이고 계단이다. 어떤 곳은 너무 캄캄한데 술 취한 아저씨가 알 수 없는 말로 말을 걸어와 너무 무서웠다. 어느 곳은 가로등 조명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너무 반가운 카페를 발견했다. 창문에 'coffee & co'라고 쓰인 작은 간판. 작은 카페 앞에 연인이 앉아있었고, 덜덜 떨던 나는 얼른 들어갔다. 테이블이 붙어있었고 자리가 가득 차있었다. 주인은 특별한 행사를 하고 있어서 자리가 다 예약됐지만 혹시 괜찮다면 여기는 앉아도 된다며 코너의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주저함 없이 그러겠다고 했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시켰다.
현지인들이 오랜만에 어떤 모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례차례 사람들이 오면 반갑다며 부둥켜안고, 웃고 떠들고, 마시고... 주인은 예쁜 빛깔의 칵테일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투명인간으로 들어와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따뜻한 찻잔을 양손에 움켜쥐고 손과 몸을 녹이며 그 분위기를 즐겼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인간미, 사람 냄새가 느껴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한참 바라보고 그들의 소리를 한참 들었다. 몸이 스르르 녹아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걸어 내려왔다.
Coffee & co 카페
밤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카를교에 다다르자 사람이 정말 많았다. 가족, 연인, 친구들이 함께 이 다리를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아름다움 밤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밤의 카를교 건너에서 보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을 보자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남편과 연애할 적, 그러니까 아마도 딱 10년 전, 나는 집에 있던 유럽 배경 사진엽서에 글을 써서 종종 남편에게 주곤 했었는데, 그때 골랐던 엽서 배경이 바로 이 모습, 강물의 비친 프라하 성의 야경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엽서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 언젠가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기를'이었다. 한참 잊고 있다가, 결혼하고도 한참 후 남편 차를 정리할 때 수납칸 깊은 곳에 들어있던 엽서를 발견했다. 그 엽서에서 봤던 그 풍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안타깝게도 함께 보지는 못하지만, 함께 이곳에 와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화약탑과 프라하 성
카를교를 지나 구시가지를 향해 조금 더 걸으니 천문 시계탑이 보인다. 천문시계가 생각보다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위의 시계는 해와 달, 천체의 움직임, 아래 시계는 12개의 농경생활 모습이 보인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시계를 만들었을지, 나에게 옛것은 모두 신비로움 그 자체다. 광장 한복판에는 그리스 신화를 형상화한듯한 거대한 조각상들이 보였다. 어두워서 글씨도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밝을 때 꼭 다시 와보리라 다짐했다.
지나가는 길에 거대한 젤리 가게가 보였다. 젤리는 몸에 좋지 않아 잘 안 사주는 편이지만,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갔다. 싸우지 않도록 봉지 두 개에 똑같은 젤리들을 골라 담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개구리 모양, 하트 모양, 꽃 모양 등 형형색색 젤리에 초콜릿까지. 아이들 선물을 사고 나니 얼마나 좋아할지 나까지 설렜다.
구시가지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11시 가까이 되었는데도 젊은이들은 무리 지어 웃고 떠들고 춤추고 마시며 토요일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밤의 풍경을 보지 못했던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밤에 돌아다니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아이를 낳고부터는, 더욱이 둘을 낳고부터는 해가 없는 밤에 나가서 논 기억이 없다. 저녁에는 늘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느라 분주했고, 자지 않는 아이들과 늘 전쟁이었다. 그러고 보니 폴란드에 와서도 폴란드의 밤 풍경은 어떤지, 해가 진 후 시내는 어떤 모습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낯선 프라하에서 해가 진 후 홀로 성을 구경하고, 밤거리를 걷고,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수많은 인파에 묻혀있자니, 마치 잠시 꿈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산책하고 있는 느낌이었다.얼마 만에 홀로 있는 시간인지, 얼마 만에 보는 밤 풍경인지, 프라하의 야경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행복했다. 가족이 다 같이 봐도 좋았겠지만, 아이들과 함께라면 쌀쌀한 밤 풍경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열이 나는 첫째가 나에게 이 시간을 선물해 준 것 같아서 무척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무척 고마웠다. 한 방에서 아이들을 재우느라 씨름하고 있을 남편에게도 고마웠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가로지르며 씩씩하게 호텔까지 걸어왔다. 아이들이 자고 있을 것 같아 조용히 빼꼼 호텔 문을 열었는데 "엄마다!!!"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반기는 아이들. "엄마다!!" 하며 주양육자의 귀환을 기뻐하는 남편.
엄마가 된 후, 이렇게 홀로 황홀한 밤 나들이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나를 이토록 반기는 사람이 셋이나 있다는 사실이 이날의 외출을 더욱 특별하게 해 주었다. 한 침대에서 넷이 살을 맞대며 따스한 온기 속에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