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림 『상공운동회』
'지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혹시 돈이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해보세요.'
우스갯소리로 돌던 말이다.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는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다는 걸. 그래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웃긴 역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는지도. 이제는 적절하게 타협하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이 문제 때문에 꽤나 우울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돈이 되질 않고, 그렇다면 난 패배자의 삶을 사는 건가 싶고. 그래서 난 스스로 이에 관해 실험을 해보았다.
돈이 어느 정도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래, 돈을 써보자! 그래서 지금껏 사고 싶었던 것들을 죄다 샀다. 눈여겨 보던 재킷,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워커, 핸드폰 최신형으로 바꾸기, 연어에 육회를 안주로 술 마시기, 비싼 청바지 사기. 난 그날 수십만 원을 썼다. 와,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산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침대에 누웠다. 새로운 휴대폰을 가지고 놀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울함은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강렬했던 욕구가 신기하게도 수면과 함께 증발했다. 첫 번째 실험 실패.
그렇다면 이제 반대로 저축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식비부터 줄였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 대부분 편의점 음식으로 싼 것들로만. 아메리카노가 한 잔에 3500원이 넘으면 그 카페는 가지 않는 걸로. 쿠폰과 적립은 확실하게. 친구들 선물도 최대한 가성비에 맞춰서 했다. 두 달 정도 지나니까 통장의 잔고가 줄어드는 속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우울함이 좀 덜했다. 아직 해외여행 갈 정도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계속 모아보기로 결심하며 편의점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입에 그 싸구려 음식이 들어가는 순간 토할 거 같았다. 바로 뱉어버렸다. 앞의 거울을 보니 볼품없이 마른 내 모습이 보였다. 우울함에 지속적으로 받아오던 상담 치료에서, 상담 선생님이 하루에 두 끼는 영양가 있게 챙겨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젠장, 이번도 실패다.
상공운동회를 읽으며 옛 생각이 났다. 이 시는 운동회가 마치 축제처럼 꾸미지만 결국 자본가들의 욕심이라는 걸 보여준다. 자본을 긁어모으려 사람들을 동원하는 행사의 모습을 지식인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김기림이 생전에 부유했는지 가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나처럼 그 관계를 증명해보려 혼자만의 실험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 실험의 결과로 자신의 신념을 만들고 자본의 축제를 만드는 그들을 비판한 걸까?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부자가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저버린 지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 실험들이 실패하고 나서, 내게 필요한 행복의 유형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돈이 많아서 물질의 풍요로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없는 돈 아껴 쓰자고 허리띠 졸라 매봤자 행복보단 우울이 더 커졌다. 지금은 적절히 섞어서 살고 있다. 쓰고 싶을 땐 쓰고, 아닐 땐 아니고. 그러니까 돈 좇지 말고 적당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오는 행복에 만족해하고 다른 행복의 유형을 만들어가자는 그런 결정을 했다. 뭐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 이 당연함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김기림도 분명 상공운동회를 쓰면서 그랬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하겠다는 1차원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시는 아닐 것이다. 단순한 추측일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더욱 강렬한 이미지들을 배치하지 않았을까? 난 그의 실험의 결과를 지지한다. 어떤 선택이든 그 과정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부디 내가 내 선택의 결과를 누군가에게 비참히 설득하지 않았음 좋겠다.
혹여나 김기림이 내 생각과 달리 나를 자본주의적임을 비판한다고 해도 말할 수 있다. 아, 뭐 제가 알아서 잘 할게요. 부디 김기림도 한 쪽으로 너무 치우쳐졌다는 누군가의 비판에 시크하게 대답하는 사람이었길. 뭐, 아니어도 크게 상관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