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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l 19. 2019

사람 앞에 두고 3분 이상 말하면 안 되더라고요

그만 말하세요, 이젠 제가 말할 차례입니다

"그럼, 강산 씨의 말은 누가 들어주나요? 강산 씨는 자신의 아픔과 무거움을 누구에게 털어놓죠?"


중증도의 우울증 진단을 받고,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복용하며 시작하게 된 심리 상담 치료. 나의 상담 선생님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대답하지 못했다. 내 얘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사람을 만날 때, 가면을 쓰고는 해요


맞다. 난 항상 듣는 입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는, 듣는 것에 익숙했다. 웃긴 얘기, 슬픈 얘기, 고민, 우울한 얘기, 화나는 얘기 등 다양한 얘기를 들었다.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밌기도 했고, 굳이 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나의 모습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듣기가 괴로운 말들도 있었다.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 충고, 나와 다른 가치관, 혐오적인 표현이 가득한 대화. 그럴 때면 난 그냥 다른 상상을 했다. 저 유리잔 속의 커피는 얼마나 미지근해졌을까, 만난 지 오래된 그 친구는 지금쯤 뭘 할까 뭐 그런 것들- 난 그들이 쏟아대는 말들에 진심으로 답하지 않았다. 적당히 그 사람이 좋아할 거  같은 리액션을 곁들일 뿐이었다. 아, 그랬구나. 맞아요, 그렇더라고요. 그렇군요, 전혀 몰랐네요. 그러자 사람들은 날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 답지 않게 예의 바르다거나, 속이 깊다거나 그렇게. 난 그런 평가들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고, 기분 좋으니까.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힘들 때였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 도저히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르겠는 문제, 통제가 되지 않은 감정, 평소와는 다르게 아픈 몸 등으로 힘들 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고역이었다. 쉽게 가면을 쓰고, 남이 좋아할 만한 리액션을 하던 내가 고장나버린 거다. 표정이 굳어지고 눈을 상대방과 마주칠 수 없고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래도 바보 같았던 나는, 적당히 거절할 줄을 몰랐다.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다음에 또 뵐게요.'


나는 이 짧은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내 몸과 마음이 얼마나 부서지던, 난 그냥 상대방의 모든 말들을 받아내었다. 그런 날엔 집에 들어가서 내내 잠을 잤다. 연락도 받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다. 그냥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했다. 그러면 무언가 적당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충전하고 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에너지가 생겼다. 난 그렇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좋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난 더 내 얘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결국 듣는 이에게 자신의 짐을 지우는 일처럼 느꼈으니까. 내게 자신의 얘기를 내던지며 같이 들어달라고 하는 그들처럼 되기는 싫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대방의 기분에 맞게 알아서 가면을 갈아 끼우는 스킬은 늘어만 갔다.


그런데 동시에 그건 나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커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면 불안했다. 나의 온전한 마음과 하고픈 만큼의 이야기를 전달하지 못할 거 같았다. 혹시라도 내가 말을 잘 못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대충 뭉개서 나의 얘기를 적당히만 하게 됐다. 그러자 나의 이야기는 들어도 흥미롭지도, 별로 재밌지도, 진심이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얘기가 되어버렸다. 사람들도 나의 얘기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됐고, 나도 어리숙한 내 얘기보다, 익숙한 남의 얘기 듣기만 하게 됐다. 그것은 좋은 사람으로 남에게 기억되고자 하는 나의 미봉책이었다.


' 앞으로도 내 얘기는 일절 않고, 남의 얘기만 들어줘야지. 그래야 난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테니까.'


아 그러니까 5분만 좀 닥쳐주세요


하지만 상담 선생님의 질문은 나의 이러한 미봉책을 꿰뚫는 것이었다.


"전 저의 얘기를 하는 게 아직도 두려워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상담을 기다리는 10분 전부터 저는 항상 불안해요. 어떤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도통 복잡하고 답답해서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다 똑같아요. 하지만 그를 위해서 강산 씨가 과하게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 때문에 당장 괴롭잖아요. 사람은 자신을 표현하고 이야기 함으로써 감정의 정화작용을 누려요. 강산 씨는 그 역할을 주변에 많이 베풀었죠. 그러니 이제 그 정화작용을 누려보세요. 전처럼 강산 씨가 자신의 이야기만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떠나간대도, 별 일 없을 거예요. 강산 씨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정확했다. 난 내가 사랑받고자 나를 파괴하고 있었던 거다.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내쳐질 거라는 불안. 난 그걸 극복해야 했다.


난 그 후로 내가 받아낼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듣기로 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고 주구장창 내게 내뱉어 내는 후배들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나한텐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니. 내 얘기는 궁금하지도 않니.


어느 날은 연락이 뜸하던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는 통화로 자기 얘기를 10분 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3분이 지나면서 생각했다. 아, 더 이상은 이 친구의 말이 내게 짐이 된다. 그리고 친구에겐 딱 잘라 말했다. 몇 분 동안 네 얘기만 하는 거냐. 지겹다. 쓸 데 없는 얘기 할 거면 끊어라.


또 하루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자신의 친구가 일하는 식당으로 날 데려갔다. 난 오랜만에 내 얘기를 했는데, 그는 서빙하는 자신의 친구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장난치기에 바빴다. 내 얘기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얘기를 들었던 만큼의 3분의 1도. 난 밥을 적당히 먹고 이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화가 가능한 사람에게 더 감사하다


당신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직도 쉽지는 않다. 그럴 때면 가면을 벗고, 내가 지금 지루하다는 표정을 아주 팍팍 티 내고는 한다. 그럴 때면 그 자리는 이내 종결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가 얻은 건 꽤 많은데, 그중 가장 기쁜 건 대화가 가능한 사람에 대한 감사함이다.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줌에 감사함을 느끼고, 나의 말을 진심으로 들으며 서로 대화해주는 그런 사람. 난 그런 사람을 더욱 좋아하고 소중히 대하기 시작했다. 그와 나누는 우울함, 불안함, 분노, 슬픔이나 기쁨까지 전부 감사한 시간임을 알게 됐다.


말을 아끼는 사람에게 대화를 먼저 거는 사람.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련지 경계하는 사람. 자신이 말하다가도, 누군가 끼어들면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 내가 얘기할 때 대화의 흐름을 잠시 멈추더라도, 자신이 이해가지 않는 부분을 짚어서 되묻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더 깊은 대화로 상대를 더 잘 알기 위해 대화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그런 대화를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나도 그런 대화를 하는 사람이고 싶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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