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퇴원을 기다리며 나는 무엇을 했나
치료 일정에서는 퇴원까지 3주를 잡았는데, 꽉 채운 한 달이 지나서야 퇴원했다.
우리 아빠는 고용량 항암과 자가이식 부작용을 모두 크게 겪었다.
입원항암을 하면서 주치의가 놀랄 정도로 수치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고, 크고 작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매번 잘 지나갔으므로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용량 항암제를 맞은 뒤 아빠의 몸엔 큰 무리가 온 듯했다.
부작용 증상에 대해 하나하나 전해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화장실 문제는 여러모로 힘들고 불편해 보였다. 뭘 먹기만 하면 그대로 쏟아내기 일쑤라 힘들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런 일을 돕기 위해 병동 내 직원이 상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꽤나 눈치를 봤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성미라 그랬던 건지, 아니면 성별이 달라서 그랬던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딸인 내가 보기엔 전자인 확률이 좀 더 높아 보이지만.
조혈모세포이식병동에서의 며칠이 지나고,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날들이 지나자 아빠는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 아빠나 엄마나 모두 치료 경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자식들에게 알리는 편이 아니었기에 내가 먼저 물어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입원이 길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나는 엄마로부터 하나만 전해 들었다.
고용량 항암제의 부작용 탓인지 폐에 물이 찼고, 그것 때문에 퇴원이 늦어지는 것 같다고.
유방암 치료의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의 과정만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nkt세포 림프종의 매 치료 과정이 출구 없는 기다림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분명 자가조혈모세포 이식이니 본인 것이 분명한데도 위험 요소로 인지해 온갖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의료인이 아닌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안 되고 답답했다.
고용량 항암의 여파는 자가이식 후에도 길게 유지됐다. 입맛을 잃는 항암 부작용 역시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환자인 당사자가 가장 힘들겠으나 뾰족한 방도 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곤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흘러 완연한 봄이 되었음에도 계절을 즐길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아빠가 일반 병동으로 옮김과 동시에 보호자 상주가 가능해지자 엄마가 집에 없는 날이 차츰 길어졌다. 엄마가 집에 오는 날은 집에서 샤워를 하거나(나와 엄마는 간병 기간 중에 병실 안의 샤워시설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집을 오갈 수 거리인 게 가장 크게 작용했고, 별로 거기서 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입맛을 돋울만한 음식을 만들러 올 때뿐이었다.
병원의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된 간병을 마친 뒤에 집으로 와서 하는 일이 당신이 먹을 밥을 차리는 게 아니라 아빠가 좋아하는 수육을 삶는 일 따위였다. 인덕션 앞에서 종종거리는 엄마의 모습을 볼 때면 명치가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빠 한 명 때문에 지금 몇 명이 고생을 하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날도 많았다. 희귀암에 걸린 게 본인이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겠으나, 평생의 생활습관을 보면 본인이 자초한 점이 없지 않았으므로 삐딱한 마음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엄마의 긴 부재 속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됐다.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회사가 있지 않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도 치밀어오는 짜증을 열심히 달랬다. 환자는 한 명인데 온갖 부담은 모든 가족이 나눠 짊어졌다.
엄마가 자신을 갈아내며 정성껏 병수발한 보람이 있었던 듯, 짙은 안갯길 속을 걷듯 흐릿하기만 했던 퇴원의 윤곽이 잡혔다.
아빠가 퇴원하기 전, 깨끗하고 쾌적함을 유지할 수 있게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조혈모세포이식 병동처럼 무균실에 가까운 상태를 만들 수는 없어도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상태가 기본값이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 집은 2025년이 되어서야 겨우 청소기와 에어컨을 가지게 됐다.
2025년인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계속 없이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답변할 수 있겠다.
청소기는 아빠의 자가이식 1차 입원 전에 구매했고 에어컨은 2차 입원 이후 퇴원 직전에 설치했다. 돼지털빗자루와 옥색 플라스틱 쓰레받기에서 다이슨 청소기로, 2022년의 무더위에서도 선풍기 세 대로 잘 버텼던 집에 벽걸이형 에어컨 두 대가 설치됐다.
아빠의 퇴원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조금 더 바빠졌다. 이전 포스팅의 스크린샷 첨부파일에 올렸던 것처럼 퇴원 전에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큰 일은 청소였다. 좁은 구축 아파트였음에도 평소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여 청소를 해야 했으니 힘에 부쳤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간병으로 과로한 노인인 엄마에게 집청소까지 떠맡길 수 없었고, 각종 비용을 부담하는 언니에게 늦은 밤 퇴근 이후에 시킬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 몇 년간 내가 정리정돈에 완전히 꽂혀서 돌아버린 수준이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진 않았다. 그럼에도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건 딱히 보람 있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해봐야 크게 티 나지 않았고 아예 손을 놔버리면 어질러진 것의 몇 배 이상 지저분해 보였으니까.
자가이식 환자는 덩치만 성인이지 내부는 신생아와 다름없는 상태라는 것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청소를 허투루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의 퇴원 당일에도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귀가해 이미 깨끗한 집을 다시 청소했다. 소독 티슈로 손이 닿을만한 방문 손잡이나 전등 스위치까지 닦고 마무리하니 아스팔트 바닥 위로 드르륵,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캐리어 바퀴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멈추고 대문이 열렸다.
부모님 중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꽉 채운 한 달여의 병원생활동안 말 그대로 폭삭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만이 뇌리에 강렬히 박힌 탓이다. 깜짝 놀란 마음은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척 아빠에게 치료는 잘 받고 왔어? 하고 물었다. 하나마나한 질문에도 그럼! 그까짓 거 별것도 아니지 하며 씩씩하게 허세부리던 아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아빠가 자가이식까지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음에 내가 아는 모든 신―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마가 보면 뒤로 넘어갈 소리―에게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무균실을 흉내 내는 것처럼 깔끔함을 집중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기간이 한 달. 조혈모세포가 무사히 생착되어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는 기간이 3개월. 길고도 짧은 시간을 견디면 큰 고비를 더 넘기는 거니까 그때까지만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달력을 살펴보니 오늘부터 3개월 후의 날짜는 평생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여름의 절정이었다. 여름의 달엔 엄마 아빠의 생신과 작년에 태어난 남동생의 아이들인 세 쌍둥이의 첫 돌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 액정만으로 보던 아기들의 실물은 그때 보기로 결정했고, 그때까지 아빠의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