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회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공장 부지를 매입하며 심어놓은 나무들이 지구인들의 몸살과는 무관하게 훌쩍 자라있었고 직원들도 낯선 사람이 태반이었다. 현장 근로자들 모두 우주복처럼 보이는 방진복과 마스크, 안전모로 중무장하고 있어 회사가 마치 SF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비현실 세계를 걷는 기분으로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캐비닛에서 유니폼으로 꺼내 입은 뒤 작업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난간으로 나갔다. 거푸집으로 둘러싸인 ○호기 주변이 외계인(?)들로 북적거렸다. 오늘 작업의 핵심은 크레인이 캐스타블을 상층부로 끌어올리는 일이며, 100톤급 크레인의 임대료가 하루 수백만 원에 달해 사무실 남자 직원들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 등, 작업 전반을 남편으로부터 미리 들은 터라 멀리서도 진행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지수는 남편 책상에 있는 망원경을 들고 나와 작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췄다. 모두 비슷비슷한 차림새여서 구별이 힘들었지만… 숨이 탁 막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12시가 넘어가는 점심시간이었지만 목표했던 크레인의 임무가 끝나지 않았는지 누구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지수 혼자 일찌감치 식당으로 향했다.
- 안녕하세요?
- 어머나! 사모님 오셨네요?
- 네네, 반갑습니다. 힘든 시기, 다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한 번씩 앓았답니다. 이제 코로나도 기운이 많이 약해져 감염돼도 감기처럼 지나간다는군요.
- 그래도 조심하셔야지요.
- 예에, 예에…, 오늘 큰 공사 한다고 오셨군요?
-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직원들 앞에서 저 모른 척해주셨으면….
- 왜요? 직원들이 사모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말수 적은 사장님은 어려워해도.
- 직원들이 많이 바뀌어 일일이 인사하려면 서로 불편할 듯….
- 설마 사장님도 모르게 오신 건 아니죠?
- 그럴 리가요. 사장이 회장인 저를 불러… 흐흐흐흐….
- ‘우리 사모님이시다!’라고 태극기 들고 외쳐야겠어요.
- 태극기 부대라, 그럼 문구만 하나 바꿔주세요. ‘암행어사 출또야!’로.
- 핥핥핥핥 하하하하… 이 나이 살도록 우리 사모님같이 웃기는 사람 못 봐… 언제나 유쾌하고 유머러스하셔서….
지수는 식당 관계자들과 흥겹게 회포를 푼 뒤 식판에 음식을 담아 구석자리로 가 앉았다.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리들 속에서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들어오는 그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우진! 분명 그였다.
밥을 먹는 중 마는 둥,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을 빠져나와 남편 사무실로 몸을 숨겼다. 커피를 내려 마시며,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후 4시 무렵이 되자 드디어 작업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져갔다.
안전모와 마스크, 보호안경으로 철저히 몸을 가린 채, 쿵쾅대는 심장을 안고 총무과로 갔다. 작업복으로 중무장한 중년 여성의 등장에 모두는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뺐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숙였다. 지수는 맨 안쪽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가 메모지를 건넸다.
- 이우진 씨를 아세요?
- 누, 누구세요?
- 맞죠? 잠시, 휴게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휴게실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뒤따라온 그에게 모자와 마스크, 안경을 벗었다. 무거운 안전모로 인해 착 가라앉은 머리카락, 화장기 없는 얼굴…. 30여 년의 세월이 가져온 변화 탓인지 그는 지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 누구신데 제 옛날 이름을?
- 아아, 개명하셨군요.
- 네에. 지금은 이○○입니다. 근데 누구?
지수가 목에 걸린 사원증을 내밀자 안경을 이마 위로 걷어 올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름을 확인해가던 그의 동공이 점점 확대되었다.
- M여고 김지수, 지수씨이?
- 흐흐흐흐, 맞습니다!
-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
- M사 직원입니다.
- 직원이라구요? 여태 회사에서 뵌 적이 없는데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데다, 코로나로 재택근무…. 오늘 퇴근 후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 아아 예에, 예에, 그러죠.
- 제가 퇴근하며 장소 물색해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그와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자리를 나오며, 지수는 자신의 프로필 사진에 있는 남편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그녀는 경남 어느 군 소재지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유복한 집안의 1녀 3남 중 맏딸로 태어났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아버지는 극장 옆 넓은 공터를 사들여 대도시에서 유행 바람을 타고 있는 롤러스케이트장까지 만들었다. 극장 사장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읍내에 자자했다. 읍내 풍경은 흑백처럼, 극장과 롤러스케이트장까지만 반듯한 양옥 건물이었고 뒤편은 읍내 5일장이 열리는 장터로, 낡고 허름한 가건물과 천막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장날마다 면 단위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로 극장 주변은 북새통이었다. 그런 날마다 소매치기나 건달들이 기승을 부렸는데, 지수네 극장과 롤러스케이트 장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걸핏하면 돈을 뜯어가는 건달패거리들 때문에 지수 아버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극장 검표원과 롤러스케이트장 관리인을 건달들로 고용하여 그들을 견제했다.
읍내를 둘러싸고 흐르는 강변의 수양버드나무 가지들에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고, 지수네 담장 개나리 울타리에도 노란 꽃망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덧 중3이 된 그녀는 어머니의 미모를 빼닮은 데다 공부도 잘해, 어릴 적부터 주변의 부러움과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가 다니는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여학생과 남학생반을 엄격히 분리했다. 유일한 남녀혼합반이 3학년의 특별반, 명문고 진학을 위해 성적우수자들을 모아놓은 집단이었다. 읍내의 사로라 하는 집들에선 너도나도 자녀가 특별반에 들어가기를 소원했던 터라 그 열기만큼 과열돼 학생 수가 무려 80여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마산의 M고와 M여고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었다. 전교 1, 2, 3등을 오르내렸던 지수의 특별반 입성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어느 체육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2인 삼각 경주를 한다며 끈 다발을 들고 나왔다.
- 자! 남학생 여학생으로 조를 편성한다!
못하겠다며 자리서 방방 뛰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세상 말세를 외치는… 제 부끄러움에 구석으로 가 얼굴을 붉히는… 내숭이 겉으로 훤히 드러나는…. 학생, 학생들로 운동장은 삽시간에 읍내 장터처럼 변했다.
- 조용, 조용! 남녀가 함께하는 것은 신의 섭리며 우주의 질서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 왔으며….
별명이 코미디언으로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던 체육 선생님은 ‘너희 속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야릇한 미소까지 지으며, 일본 순사 같은 훈시를 이어나갔다.
- 정 못하겠다는 학생은 앞으로 나오기 바란다, 즉시 일반 고등학교로 보내주겠다!
중3인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리 없다. 멋쩍게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아이들이 하나둘 파트너와 발을 묶기 시작했다.
경기는 한 편의 코미디였다. 무사히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조는 불과 두세 커플, 엎어지고 자빠지고, 두 몸이 위아래로 포개지며 야한 교합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에 배꼽을 쥐고 웃느라 운동장을 떼굴떼굴 구르기도 했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봄 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지수는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려 안절부절못했다. 자신과 발을 묶은 남학생에게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진동했다. 결국 자신들의 차례가 되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뱃속의 내용물을 토해내고 말았다.
선생님의 지시로 친구 부축을 받으며 양호실로 갔다.
체육 시간의 컨디션 난조에 핏기 없는 핼쑥한 얼굴로 들길을 걸어 터벅터벅 집으로 오고 있었다. 누군가 뒤따른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2인 삼각 파트너였던 냄새나던 그 친구였다. 그에게 길을 비켜주자, 앞으로 가는 척하다 다시 돌아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쑥 내밀었다.
- 깜짝이야! 뭐야?
- 저어….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그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녀 손에 들려진 것은 종이로 접힌 딱지였다. 가끔 극장이나 집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편지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 해당 학생을 엄단하라고 했다. 읍내 유지이면서 육성회장이기도 한 아버지의 위세는 대단했다.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남학생들을 들먹이는 친구들 앞에 지수는 늘 죄인처럼 좌불안석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탓에, 얼른 가방 속에 숨겼다.
To. 지수!
몸이 걱정되어…. 미안해.
우리 열심히 공부하여 너는 M여고, 나는 M고등학교로 진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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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류재성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근 뒤 조심스레 딱지를 펼친 지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실 미안한 쪽은 지수 자신이었는데…, 내용으로 보아 본인 몸에서 풍기는 생선비린내 같은 악취를 안다는 눈치였다.
재성은 극장 바로 뒤편 생선가게 아들이었다. 극장에 심부름을 갈 때면 엄마는 생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그때마다 가게에서 부모 일을 돕는 그를 볼 수 있었다.
- 재성이가 아주 예의바르고 착해, 혼자 밥해먹고 학교 다니는 것 보면….
- 어디 살아?
- 거적때기 막아놓은 생선가게 안에서…. 너랑 같은 우수반이라면서?
부모님의 대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착한 주인공이어선지, 표현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혔다. 접힌 그대로 다시 접어 책상 깊숙한 곳에 숨겼다.
지수와 재성은 각각 마산시에 있는 M고와 M여고로 진학했다.
삶은 원하던 방향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평생 걱정 없이 살 것만 같았던 그녀 집안에 화마가 끼어든 것은 지수가 M여고 3학년 새 학기로 막 접어들 때였다. 읍내 장날 극장에 불이 나면서 아버지를 비롯, 수 명이 죽고 수십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건달들의 패싸움의 결과였다.
인생의 목표를 세운 적은 없었으나, 잃었다는 사실만은 콘크리트 벽처럼 확실하고 단단하게 인식됐다.
텅 비어버린 머리를 담임선생님이 가까스로 추슬러주며 졸업이라도 마치도록, 엄마와 지수를 위로하며 설득했다. 선생님은 지수를 자신의 형이 운영하고 있는 한의원에 머물며 잔일을 돕도록 했다.
한의원에서는 밤새 장작불이나 연탄불로 약을 달였다. 건물 뒷마당에 큰 가마솥과 별채 부엌에 연탄 아궁이 여러 개가 있어, 불 피우고 꺼지지 않게 하는 일이 지수의 역할이었다. 어려움 없이 자랐던 그녀의 가장 고된 일 중 하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연탄구멍을 맞추는 일이었다.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학교에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일이 다반사였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을 등불로 삼으며, 오로지 시간 죽이기에 매달린 끝에 드디어 ‘졸업’이라는 구원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부터 피기를 멈춘 봉오리는 박제된 채 캄캄한 터널 속에 갇혀버려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하루빨리 졸업하여 엄마와 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예비고사를 치른 고3 학생들은 학교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으로, ‘졸업’이라는 의식만 남겨둔 채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수는 졸업식 날까지 마산에 남기로 했다. 주인 부부의 요구도 있었지만 엄마와 동생들이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딱히 찾아갈 고향도 집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며칠간의 경옥고 만드는 작업을 도운 뒤 뒷마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찾아왔다는 주인아줌마의 부름에 앞마당으로 나가보니 고향 친구 문숙이 와 있었다. 그녀와는 초·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M여고까지 함께 진학했으니 초·중·고 동기동창인 셈이었다.
- 어쩐 일이야?
- 모레 오후 4시쯤 우리 집에 올래? 졸업 앞두고 친구들과 하루라도 추억을 쌓을 예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