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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Oct 25. 2024

인간 등급-3


 문숙의 집은 2층 양옥건물 중 1층을 통째로 세 얻어 동생들과 살고 있는, 자취방이라기보다 여느 가정집이나 다름없었다. 두 남동생 모두 마산 시내의 중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동생들은 아직 개학 전이라 고향에 있고 혼자 일이 있어 먼저 왔다고 했다.

거실에는 널찍한 포마이카 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맥주와 음료, 과자 등이 수북이 올려져 있었다.

- 웬 술이야? 어른들 오시니?

- 히히… 누가 오는지 기다려 봐.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그녀 꽁무니를 뻘쭘하게 뒤좇는 동안…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숙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발그레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와르르 쏟아지는 M고 교복과 교련복 차림의 남학생들, 뒤이어 여학생 대여섯 명까지… 어림잡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삽시간에 거실을 채웠다.

 당황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한 지수는 구석에서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비단 남학생들의 존재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반인 박은영이 가장 두렵고 부끄러웠다. 극장 사고 이후 스르르 무너져 내린 벽 대신 그녀 내면에 새로운 벽이 세워지며, 친구들과 거리를 두었었다. 대부분은 무관심했지만, 유달리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친구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를 의식하자 스스로의 행동거지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을 앞으로 모으다 뒤로 가져가고, 낡은 액자 속 사진처럼 차렷 자세를 취하다, 이도 저도 어색해 다시 앞으로 가져와 공손히 모은…. 자신의 신체 일부가 그렇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궁색하고 초라하게 느껴져, 한마디라도 트는 게 좋을 것 같아 용기를 냈다.

- 안녕?

 지수를 힐긋 보는가 싶던 은영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정리되어 오히려 편했다.

누가 교통정리를 했는지, 여학생들은 상 주변으로 둘러앉고 남학생들은 소파와 책상 의자, 거실 구석 자리 놓인 쌀자루 등에 기대앉거나 맨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뒤에 앉은 남학생들에게 맥주잔과 안주를 건네주기도, 여학생 사이사이로 손을 슬쩍 넣으며 집어가는 남학생들도 있었다. 

- 돌아가며 자기 소개하기로 해요… 좋습니다…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먼저….


 돌아가는 수레바퀴에서 혼자 튕겨 나올 수 없어 지수도 대진표 따라 가위바위보를 했지만,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어서 나갈 타이밍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한 남학생이 쏘는 레이저에 전신이 마비되는 듯, 옴짝달싹하기조차 힘들었다.

- 한양공대 합격한 ○○○입니다… 부산대 재료공학과 ○○○… 고려대 기계공학과 ○○○… 경상대학교 사범대… 숙명여대 교육학과…… M교육대학 김문숙….

 지수는 문숙이 교육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 네에, 저는 재수를 생각하고 있어….

 지수에게 고주파를 쏘고 있던 남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에이 이우진! 니가 그카마 우리는 뭐가 되노?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하는 밥맛들 있잖아요. 이 친구가 그런 괴물종이에요. 버젓이 S대 합격해놓고… 그건 교만이야!


 친구들의 야유와 함성에 멋쩍게 웃는 우진의 모습에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학교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보았던 〈들장미〉라는 드라마에서 김자옥과 열연을 펼쳤던 남자 배역, 한인수와 빼닮은 모습이었다. 안경 너머로 예리하게 반짝이는 눈빛, 우뚝한 콧대, 굵은 바리톤 음색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스치는 순간, 지수의 여성성에 쩌릿한 파문이 일었다.

- 이우진 씨는 무슨 과로 가려고 재수를 하겠다는 거예요?

 문숙이 지수의 궁금증을 콕 집으며 우진에게 관심을 표했다.

- 부모님이 실망하셔서요.

- 그러게요. 부모님은 어느 과를 원하는지, S법대를 원하시겠죠?

- 제 얘기는 그만하시죠. 허허….

 우진은 깔끔하고 하얀 손가락으로 습관처럼 까만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문숙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저쪽 분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진이 지수를 지칭하며, 얼굴을 붉혔다.

- ….

 풍요 속의 빈곤, 이래저래 불편한 분위기였다. 지수는 과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신을 밝혔다.

- 죄송합니다. 분위기에 제가 어울리지 않아… 먼저 가겠습니다.

 누군가의 만류가 있었던 듯했지만, 이미 터진 물꼬를 막기는 어려웠다. 사람을 타고 넘어 기어이 집을 나오고 말았다. 


- 저기, 잠깐만요!

  골목길을 나와 대로변으로 막 접어들 때였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검은 안경테가 달려왔다.

- 제가, 제가, 집까지 바래다드리고 싶습니다.

- 이렇게 나오시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요.

- 상관없습니다. 그 자리가 더는 의미 없어….

 지수는 우진에게 자신이 사는 곳을 들키고 싶지 않아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걷다 보니 산길이 나왔다. 마산에서 3년여를 살았지만 학교 뒤쪽으로는 가본 적이 없어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알지 못했다.

- 집이 이쪽인가요? 제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군요. 흐흐

 1월 하순의 날씨는 아리도록 차가웠다. 초저녁시간대였지만 산길인 데다 추운 기온 탓인지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막한 산속의 공기를 가르는 것은 두 사람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과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칠흑같이 검은 풍경 속에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으론 도시의 불빛이, 왼쪽의 깊고 검은 산에선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 길이 끊겼어요. 집이 이쪽이 아니죠?

 우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비애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극장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아버지를 비롯,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 충격에 쓰러지며 와사증까지 겹친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 뿔뿔이 흩어진 채 일과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동생들…. 쓰나미에 쓸려버린 가족의 행복이 미치도록 서럽고 슬펐다.

 손수건을 꺼내 지수의 눈물을 닦아주던 우진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본능적 몸짓으로 그를 밀어내자 반작용의 법칙으로 그는 점점 더 세게…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포위망을 좁혀왔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위력 앞에, 지수의 동물적 쾌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코 두렵지만은 않은, 용암으로 분출할 태세의 뜨거운 피가 지수의 심장을 달궈왔던 것이다. 우진이 그녀에게 입술을 포개왔다. 불쑥, 물컹한 무엇을 지수 입안으로 들이밀고는 세차게 그녀를 빨아들였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뭘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대는 사이, 그가 귀에 소곤거렸다.

- 지수 씨! 혀를, 나처럼….

 그의 노예가 되어… 명령에 따르며… 서로의 영혼을 갈구하는 사이… 우진의 손이 곧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지수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두 사람에게서 짐승의 교합 장면에서 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촤르르 촤르르 흐르는 계곡물 소리는 두 사람의 행위예술을 더욱 빛내주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지수의 몸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던 우진의 손이 어느덧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순간, 지수가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 안 돼요!

 밤 열두 시 통금시간이 가까워서야 두 사람은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수 집 앞 어두컴컴한 전봇대 아래서 우진이 다시 껴안으며 키스를 시도했으나 그녀의 거부에 더는 진도를 내지 않았다.

- 지수 씨! 이번 주 일요일 오전 9시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올 수 있어요? 약속하기 전엔 못 들여보냅니다… 대답해요! 네? 네?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운 지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여전히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안은 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졌다. 인간이란 씨앗으로 뿌려진 이후, 아버지 죽음과 결이 다른,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진이 정한 약속일에 지수는 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의 사건(?)이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데다, 우진과의 간극이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거리였음을, 설사 기적처럼 인연이 만들어진다 해도 둘 사이엔 히말라야 설원 속의 크레바스만큼이나 위장된 공포가 숨어있다는 것을, 지수의 본능이자 상식이 일깨워주었던 까닭이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 이후 두 달여 지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지수는 망한 집안에 단 하나의 불씨처럼 남아 있던 희미한 배경으로 친척들이 살고 있는 대구 시내 모 은행에 취직했다. 여상도 아닌 여고 졸업자로 부기(簿記: 자산, 자본, 부채의 수지·증감 따위를 장부에 적는 방법)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지라 야간엔 부기학원을 다녀야 했다. 3년 동안 배워도 모자랄 지식을 단 몇 개월 안에 숙지해야 했으니, 초인적인 힘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상사와 동료들의 눈치에 쩔쩔매고 있는 상황 속에 불쑥 찾아온 남자 친구(?)의 존재는 차라리 형벌이었다.

  오전 근무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르게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고, 그를 앞장서 무작정 걸었다.

- 어쩌자고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 지수 씨를 보지 않고는 대학이고 뭐고….

- 재수는 안 하는 모양이죠?

- 허허, 일단 들어가서 편입할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들이 당도한 곳은 지수의 근무지에서 멀지 않은 수성못 유원지였다. 2월의 막바지였지만 아직 겨울 추위가 완전히 물러나지 않아 체감 온도가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짙푸른 물빛이 지수의 마음을 한층 어둡게 만들었다.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못 주변을 계속 돌았다.

- 지수 씨! 오늘은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겠다고, 약속해주세요!

- ‘하자는 대로 해라!’는 독재정권에서나 있는 말, 지옥이라도 같이 가자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 맞아요! 우리 같이 지옥에 갑시다!

- 갈 필요도 없어요. 제가 현재 처한 상황이 지옥이거든요.

- 그러면 저기 보이는 천국에서… 잠시 쉬어갑시다.

 우진이 가리키는 곳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호텔」이었다. 그때까지 호텔을 세계 정상들의 국빈 방문이나 국제회의 등에 참석한 사람들이 묵는 숙소로만 알고 있었던 게 그녀 지식의 한계였다.

 우진은 지수의 손을 최소한의 공기조차 스며들지 못할 만큼 압착되게 꽉 잡은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데스크 앞에 섰다.

- 저어 좀 쉬려고….

 우진의 음성은 가을바람의 가랑잎처럼 떨렸다. 한 손엔 받아 든 열쇠를, 한 손은 아프도록 지수 손을 꽉 잡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층인지 모를 곳에서 내려 카펫이 깔린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었다. 어느 방문 앞에서 이르러 열쇠를 돌려 문을 열고는 지수를 있는 힘껏 밀어 넣었다. 그때서야 지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쉬어가자'란 말에 건물 내 다방이라도 있는 줄 알고 의심 없이 따라온 자신의 무지를 탓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맹렬한 기세로 그를 밀쳐냈지만 어느새 그녀 몸은 침대 위로 옮겨져 있었다. 완전무장한 적군에게 가녀린 여자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최후의 마지노선을 두고는 사생결단하듯 버둥거렸으나, 이미 그녀 몸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서서히 기운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쇠막대기같이 빳빳한 괴력이 그녀 몸을 뚫고 들어오며, 핵폭탄 같은 위력으로 그녀를 산산이 조각내고 말았다.

우진은 그녀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한참을 거친 숨을 몰아쉬고서…. 침대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침대 가운데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 지수 씨 정말 처녀였군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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