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로 보이는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로 들어오는 노인의 허리는 약 30도 이상 굽어 있었으며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간호사가 급히 의자를 갖다 대자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노인의 키와 체격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람보다 컸다. 그 체중을 온전히 양 보호자에게 의지하고 있던 터라 의자 위에 앉는 순간 두 딸의 중심이 아래로 쏠렸다.
접수된 환자의 정보를 열자 이름은 문○○, 나이는 80세로 기록돼 있었다.
-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 아이고 되다. 휴우!
- 아버지 다리가, 무릎이 좋지 않으세요.
두 딸이 연이어 대답했다.
희수는 일단 필요한 검사를 해보고 의논 드리겠다며, 휠체어에 환자를 앉힌 뒤 검사실로 보냈다.
노인의 무릎 연골은 아예 다 닳고 없었다. 대한민국 의료 수준과 건강보험시스템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고 훌륭하기에, 웬만한 가정에선 환자를 저 지경까지 두지 않는다. 환자 본인의 아픔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오히려 고통을 호소하며 서둘러 수술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행한 두 딸의 겉모습과 대화에서도 대략적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고, 혈액이나 소변 등의 결과도 깨끗하고 양호한 편이어서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희수는 방사선 촬영 결과를 화면에 띄우며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인공관절로 대체하는 수술밖에 답이 없다는 것을.
- 대학병원에서도 수술을 권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큰 딸로 느껴지는 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발끈하며 화를 냈다.
- 그놈의 대학병원, 대학병원, 내 앞에서 그 말 하지 말랬잖아!
- ….
딸들은 아버지의 호통에 몹시 무안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 어르신, 인공관절 부착하면 20년은 성성합니다. 연세가 있는 분들의 수술 여부는 다른 지병의 유무, 현재의 건강 상태 등으로 현재보다 삶의 질이 나을 것인가로 판단하지요. 현재로선 수술이 최선입니다.
-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인생이지만 죽는 게 마음대로 안 되니…. 아들과 의논해보고 다시 오겠소. 강한 진통제 좀 처방해 주시오.
- 진통제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술하시면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텐데 왜 이렇게 수술을 마다하시죠?
- ….
희수의 물음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오전 업무를 시작하며 예의 문 노인이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특실에 들어 있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회진을 돌며, 문 노인 병실로 들어갔다.
- 허억!
희수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노인 침상 옆에서 벌떡 일어서는 보호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 아,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수술 않겠다더니… 마음 바꾸셨는지요?
- 큰아들이 왔응께로….
- 네에, 잘하셨어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문이 막힌 희수 대신 보호자가 먼저 이쪽으로 인사를 해왔다.
노인은 전혀 환자 같지 않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희수는 자신의 심장을 내려앉게 한 보호자에게 수술 날짜와 절차 등은 간호사에게 문의하라 이르고, 쫓기듯 방을 나왔다.
- 문주성의 아버지셨다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오후 진료까지를 겨우 끝내고 퇴근하여 바로 위층에 사는 어머니 집에 들렀다.
- 어어? 이모.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올해 의과대학에 들어간, 호적상 조카인 재영이 반가워하며 그녀를 맞았다.
- 그러게, 무슨 날일까?
- 이모가 이렇게 일찍 퇴근하시는 날은 가족들 생일이거나…, 특별한 행사일 외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 반갑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 당근이죠!
- 고마워 내 사랑 재영. 우리 가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재영을 탄생시킨 일임을, 늘 신께 감사한단다.
- 원래 업적 같은 건 후세가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 초고속 인터넷 시대잖아!
- 역시! 우리 이모 유머와 위트는 MZ세대들에게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니까요.
- 앞선다고 해야지!
- Yes, you’re right. my dear aunt!
스무 살 청년답게 풋풋한 웃음을 던지는 그의 얼굴이 눈부시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감정이 차올라 밥을 먹다 말고, 일을 핑계로 부랴부랴 그녀 혼자 살고 있는 아래층 아파트로 내려오고 말았다.
다음 날 오전 회진시간, 희수는 문 노인의 방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들어갔다. 다행히 병실엔 노인 혼자 있었다.
- 어디 불편한 데 없으세요? 수술 날을 모레 오전 8시로 결정하셨군요.
- 아들이 그날 내려온다는구만요.
- 네에, 아드님이 어디서 뭐하시는 분일까요?
- 사업한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요.
- 으음, 전 또 영화배우나 탤런트, 모델인 줄 알았어요.
- 허허허허….
희수는 노인으로부터 느껴지는 쩌릿한 전류가 자신과 재영에게로 이어지는 큰 파장을 느꼈다.
퇴근 후 어머니 집에 들르자 역시나 재영이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 우리 이모 ‘참 잘했어요’ 스티커가 벌써 몇 개죠?
- 스티커 많이 받으면 무슨 상품이 기다리고 있나요?
- 아마 백마 타고 오시는 멋진 이모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 오우 마이 갓, 땡큐!
- 그래, 너는 무슨 과를 선택하고 싶니?
- 진로는 좀 더 고민해 보려구요. 아마 이모와 같은 정형외과 아니면 응급의학과, 외과, 정신과도 끌려요.
- 그래, 아직 시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렴.
- 제가 늘 궁금하게 여기던 질문인데요, 이모는 왜 정형외과의가 됐어요? 이모가 정형외과 의사라고 하자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하더라구요. 여성들이 기피하는 분야라면서요.
- 요즘은 어느 직종을 막론하고 남녀 구분이 없어지는 추세야. 너의 친구들 빼딱한 고개도 이해되긴 해. 당시 우리 과에 여학생은 나 혼자뿐이었거든.
- 이모 강적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상상이 안 되네요.
- 인기 ‘짱’이었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군계일학이었어!
- 물론 그랬을 것 같아요.
재영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희수를 향해 ‘엄지 척!’을 세워 올렸다. 그와 있는 시간은 늘 행복하고 엔도르핀이 상승한다.
식사를 끝내고 재영을 힘껏 안아준 뒤 아래층으로 내려온 희수는 주방 싱크대에서 테킬라를, 냉장고에서 라임 조각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잔에 테킬라를 가득 따라 입안으로 털어 넣은 뒤, 라임을 소금에 찍어 입에 넣고 즙을 짰다. 불이 난 듯 화끈화끈 타오르는 목구멍을 양쪽 볼에서 샘솟는 라임의 강한 신맛이 천천히 위무하며 내려갔다.
'문 노인-주성-재영'이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을 떠올리자 우주의 가없는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듯했다. 깊고 깊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수맥의 기운이 창공으로 끝없이 뻗어나간 나뭇가지와 잎새 하나에까지 전달되는.
- 아마 백마 타고 오시는 멋진 이모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심결에 뱉은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으며, 요동쳤던 청춘의 시간이 빼곡하게 저장된 USB를 툭! 던져주는 듯했다.
땅속 깊이 박혀있는 뿌리에서 스스로 솟구치는 생명력을 이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마주할 밖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전라도 광주의 어느 국립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여 지난 4월의 초순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의대관을 나온 희수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신이 나뭇가지에만 소복이 눈을 내려놓고 간 듯, 벚나무마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꽃송이들이 눈부시게 창공을 수놓고 있었다.
재수에 이어 삼수를 거쳐 입학했던지라 수년 동안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 학원, 집, 세 꼭짓점을 ‘국·영·수·사·과’를 달달 외우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했기 때문이다. 억눌린 세월 동안 응집된 청춘의 열기가 그 시간을 기점으로 곧 터질 풍선처럼 부풀었다.
꽃잎이 하늘거리는 벚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꽃들이 파란 여백을 배경으로 팝콘처럼 톡톡 터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군가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은 저 아래 주차장 옆 운동장이었다. 어림잡아 백여 명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웬 군인들이 대학 캠퍼스에? 설마 5ㆍ18 같은?
“차렷!-열주우웅 쉬엇!-뒤로오 돌앗!-앞으로오이 갓!…하나! 둘! 하나! 둘!….”
우렁찬 구호와 함성, 자로 그은 듯한 직선(線)의 대열…, 집단 제복의 통일된 동작에 넋이 빠져 있었다.
잔디밭에 퍼질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대열이 느슨해지며 군인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희수는 원래 가려던 목적지로 향했다. 입학 첫날부터 의대관 내 도서관을 피해 공과대학 도서관을 찾았던 이유는 그녀만의 비밀스런 이유가 있었다. 남녀공학이었던 고등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남자친구 서너 명이 그 대학 공과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희수의 합격 소식에 축하해준다며 일단 공대도서관으로 오라고 했다. 잠시 만남의 장소로 들렀던 곳이었으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외가 위주로 살아온 가정 분위기 탓에 아버지 쪽 친척은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여자들만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외조부모와 그녀 부모가 딸만 줄줄이 사탕으로 낳아 집안에 남자 그림자조차 없었던 것이다.
요 며칠 이몽룡과 성춘향의 뜨거운 사랑, 섹스신(?)을 암시한 소설에 빠져 있었다. 아직 시험 기간이 아닌 데다 바깥 날씨가 사람을 유혹해선지 실내 도서관은 비교적 한산했다. 희수는 읽다 만 책을 찾아 구석진 자리를 찾아들었다. 늘 앉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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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화둥둥 내사랑아
이제너는 여자됐고 이제나는 남자됐네
너는나서 계집녀자 나는 나서 아들자자
계집녀에 아들자가 찰떡처럼 붙고보니
좋을호자 아니겠냐 사랑사랑 내사랑아
어화둥둥 내사랑아 오늘저녁 우리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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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과 성춘향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합을 겨루기 위해 몸을 풀었다. 처음보단 훨씬 더 여유가 생기고, 서로의 몸에서 솟은 곳 가라앉은 곳도 손에 잡히고, 몸뚱이는 다시 뜨거워진다.
몽룡은 조물주가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춘향아, 나는 이제 죽어도 좋다. 방자 왈, 아침에 살 섞고 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이 실감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