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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Nov 02. 2024

고등(高等) 동물-2

   


 문살 틈 창호지에 침을 발라 낸 구멍으로 어느 야한 장면을 훔쳐보듯, 이몽룡과 성춘향의 밀실을 훔쳐보던 중이었다.

"쿵!"

'(허읔!)'

 바로 옆에서 나는 인기척에 희수는 후다닥 책을 덮었다.

- 이크! 방해를 드렸다면 미안해요.

 훤칠한 키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건장한 남자가 그녀 바로 앞자리에 짐을 풀고 있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왔는지 '다이알' 비누향이 풍겼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섹스신 훔쳐본 스스로가 부끄러워 마치 도덕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책을 있던 자리에 가져다두고 고전문학책을 들고 왔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이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


 철학적인 문구가 보이도록 페이지를 펼쳐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연한 립스틱을 바른 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는 동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그의 눈에서 발산되는 광채 때문이었다.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한 할리우드 배우 「클라크 케이블」의 이미지를 상상케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느라 책장을 일정한 타이밍으로 넘겼다.

 두어 시간 연기를 마친 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희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자신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얼마 후 바로 앞과 옆자리에 일행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리며 그녀를 섬처럼 에워쌌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매일같이 공과대학도서관으로 출근하며, 자신의 앞자리에 아무도 앉지 못하게 가방을 턱하니 올려두었다.

며칠째였는지 기억에 없다.

- 여기, 제 자리죠?

- 주여! 관세음보살!

 희수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물건을 치워주었다.          


 문주성과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를 알고 나서 ROTC를 알게 되었다. 주성은 4학년이었고 희수는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지만 삼수를 한 까닭에 동갑이었다. 그는 인문계고등학교가 아닌 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들어왔으며 세부 전공은 ‘화학공학과’라고 했다.


 어머니가 영어교육학과 출신이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아버지가 해외 학회나 세미나 등에 참석할라치면 자식들의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원어 영화 테이프를 사오라고 주문했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예외적으로 허용된 숨구멍이었다. 희수는 그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가장 좋아했다. 스토리도 재미있었지만 ‘클라크 케이블’이라는 배우에 가슴이 설렜던 이유도 있었다.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심한 사춘기 열병을 앓았던 이유도 그에 대한 연정에서였다.


 문주성! 키 180cm, 몸무게는 80kg, 넓은 가슴, 건강한 웃음…. 밤마다 에로틱한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던 「클라크 케이블」이 문주성으로 나타났다. 마치 꿈속처럼.


 예과 일학년 동급생들에 비해 희수는 비교적 쉽고 수월하게 과제를 할 수 있었다. 삼수를 하는 틈틈이 스트레스 해결 방안으로 읽어냈던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긴 세월 알게 모르게 쌓아온 한숨이 비옥한 거름으로 쌓여 있었다.

 그녀는 학과공부는 뒷전으로 오로지 연애사업에만 몰두했다.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만남이 잦아질수록 애정지수도 올라가 면학 분위기가 만연한 도서관에서의 데이트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캠퍼스 벤치, 주차장 공터, 잔디밭…. 서로의 손을 마르고 닳도록 만질 수 있는 영역으로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하지만 주성은 늘 시간에 쫓겼다. 학과 공부와 ROTC 훈련, 주말 과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희수는 주성이 방학 동안 군부대로 들어가 훈련받는다는 소식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져 주성에게 애교를 부렸다. 훈련소 들어가기 전 하루 데이트하자고 졸랐다.    

 

 아침 첫차를 타고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 덕유산 무주구천동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들을 맞은 것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울창한 수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고 신선한 공기였다. 연신 재채기를 해대는 희수의 등을 주성이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 도시의 찌든 때를 달고 온몸이 신선한 공기로 교체되는 과정에 일어나는 물리적인 반응이야.

- 그럼 주성 씨는 왜 안 해?

- 나는 이미 너무 찌들어 물리적 반응으론 어림없어. 오로지 화학반응으로만.

- 알아듣게 설명해줘.

- 19금인데 괜찮겠어?

- 19 + 4= 얼마?

- 화공학 기초이론인데 어렵지 않으려나? 오염수와 정수를 혼합하면 오염의 정도가 희석되고, 정수의 양이 많을수록 오염의 정도가 약해지고, 서로 결합하는 동안 한쪽의 오염도가 낮아지지. 서로 다른 극끼리 결합해야 반드시 전류가 통하는, 신이 마지막 날 창조하고 보기에 가장 좋았더라 하신 인간의 양극, 남자와 여자의 결합!

- 푸하하하…. 난 또 대단한 화공학 이론인 줄, 개똥철학 내지 사이비 교주!

 한번 웃음이 터진 희수는 별일 아닌 주성의 작은 농담에도 허리를 굽히며 깔깔대고 웃느라 자주 걸음을 세웠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등산로가 시작되는 산 아래 지점에 이르렀다. 새벽 등산을 했는지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후두두두 뛰는 걸음으로 내려오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빨리 서둘러야 할 걸요? 저기 하늘 보세요. 금방 소나기 쏟아질 구름이잖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북쪽 산머리에 시커먼 구름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 갑자기 하늘이 왜 저러지?

 산으로 오를지 말지 망설이는 동안 구름은 빠르게 하늘을 뒤덮고 계곡에선 뿌연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 오늘부터 장마인가?

- 그러게, 주말인데 어쩐지 사람이 별로 없다 했어.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 가고 있는 그들 앞을 이미 빗줄기가 앞서고 있었다. 주차장까진 아직 먼 길이었다.

-어떡하지?

-일단 저기로 피하는 거 어때?

희수가 안개로 자욱한 계곡 건너로 희미하게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그들은 한달음에 계곡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올라 오두막처럼 생긴 집에 도착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르게 오두막 세 채가 디귿자 형태로 맞붙어 있는 제법 규모 큰 집이었다.

- 계십니까? 계십니까?

 주성이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자 안채로 보이는 곳에서 방문이 열리며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워어메, 이 빗속에 우짤라꼬 여그까정…. 얼른 일로 오시오.

 아저씨가 손짓으로 그들을 불렀다. 주성이 희수 어깨를 감싸 안고 부부가 있는 마루로 갔다.

- 민박 하실라고라?

- 민박집인가요?

- 그라지라.

 희수와 주성이 동시에 눈을 맞췄다.

- 가능하시다면요.

-안으로 들어오시오.

부부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니, 안방인 듯 느껴졌다.

-시방, 천둥 번개에 전구가 나갔어라. 조깨 기다리시오, 다른 방 전구 갖고 올 턴께.

-저어 아저씨, 저희가 지금 이용할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요? 옷이 다 젖어….

-바깥에 널어놓은 농산물들을 방안에 넣어, 치울 동안 여그 있으시오.

 아줌마가 진품명품에 등장할 법한 오래된 궤짝 문을 열더니 허름한 옷가지들을 내놓았다.

윗목에 놓인 가마니에 희수가 몸을 기댄 채 엉거주춤 서 있자 앉자 아저씨가 희수를 떼어놓으며 말했다.

- 요것이 쌀가마라 물이 묻으면 안 된께….

- 저게 다 쌀이란 말씀이세요? 부자시군요!

 주성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주인 부부를 추켜세웠다.

- 허허, 시골 살림에 부자는 무슨, 방학 되면 민박객들이 많이 찾응께, 올해는 장마가 일찍 온다혀서 미리 들였지라.

- 식사도 돼요?

- 여그는 밥묵을 데가 마땅찮으요. 저그 주차장 있는 데까지 나가야 식당이 있어갖고, 길이 여간 멀어….

- 힘드시겠어요?

- 옴마, 사람 찾아오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 어디 있다고, 도시 냄시를 이럴 때 안 맡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구경도 못하지라. 그나저나 점심은 으째야쓰까이?

- 가능하시다면 했으면 합니다.

- 오메이, 그라마 밥부터 안쳐야 쓰것꾸마.

- 어이! 군불이랑 방은 나한테 맽기고 밥부터 준비하소이.

 주인 부부가 나가고, 희수가 비로소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 흥부네 집을 이런 그림으로 상상했어. 그리고, 저게 쌀가마라고? 놀부네 쌀가마니는 마당에 있었던 것 같은데?

- 놀부놈은 부자니까. 대부분의 서민들은 쌀이 귀해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 밖에 놔뒀다간 도둑 당할지 모르니까.


 흥부놀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아저씨가 밖에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 인자 방 다 치웠응께 일로 오시오. 장작 몇 개 넣어놨응께 금방 따셔 올거요.

- 군불이라뇨, 여름인데요?

-도시하고 같당가? 산속의 비 오는 날은 냉기 땜시 장작 몇 개라도 넣어야지라.


 아저씨는 그들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했다. 금세 내려앉을 것 같은 처마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자 궤짝 위에 이부자리가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다. 사극에서 본 가난한 백성의 방 내부와 다를 바 없었다. 방에서는 고사리와 나물 삶을 때 나는 냄새가 났다.

 

벽에 큰 유리창이 달려있었다. 흙벽을 허물고 유리로 대체한 듯했다. 유일하게 도시 흉내를 내고 있는 우스꽝스런 조형물 같았다. 양쪽으로 어두운 색깔의 커튼이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같이 얌전히 매여 있었다.

아궁이에서 새어드는 연기에 눈이 조금 따가웠으나, 향긋한 나무 타는 냄새는 좋았다.

주성이 씻고 오겠다며 자신의 웃통을 훌러덩 드러내며, 아까 아줌마가 준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나갔다.

희수는 찰리 채플린의 수염을 일자로 쫙 밀어붙인 뒤 창문을 열었다. 물안개로 자욱한 계곡과 건너편 산들이 아득한 과거의 이름 없는 화가가 그린 풍경화로, 벽계수를 배경으로 서경덕을 흠모했던 황진이의 무대로 느껴졌다.

“우르르 쾅쾅!”

 넋 놓고 훔쳐보던 이도령과 성춘향, 서경덕과 황진이의 연애사를 번쩍하는 형광 백색의 꺾은선 그래프와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산산조각 내버렸다. 창문으로 물 폭탄이 떨어져 희수는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하얀 거품을 토하듯 콸콸 쏟아지던 계곡과 건너편 산들이 짙은 안개에 서서히 잠식돼 가고 있었다.

- 씻을래?

 언제 들어왔는지 창밖을 내다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희수를 주성이 가만히 안으며 말했다.

- 떨고 있구나? 희수가 원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맹세해!

- 믿어.

- 그래, 머리 다 젖었다. 수돗가로 같이 가줄까?

- 아냐, 혼자 다녀올게.

- 그래. 우리 희수 잘할 수 있지?

- 오글거린다.

- 안 그래도 아저씨가 오골계 두 마리 잡아 백숙 하겠다고 하셨어. 설마 우리 둘을 잡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 푸하하하!     

- 상을 방에 넣어드려요? 아니면 식구처럼 같이 먹을라우?

 아저씨가 다시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 흥부 아줌마 아저씨와 같이 먹자.

희수가 주성의 귀에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 퍼득거리며 살아 있었을 닭을 생각하자 희수는 식욕이 동하지 않아 자신 몫으로 올려진 고기를 주성의 그릇으로 죄다 옮겼다.

- 아니 아니, 난 충분해. 희수 먹어.

주성이 손사래를 치며 다시 희수 그릇으로 갖다놓자, 주인부부가 자신들의 몫까지 모두 주성에게 몰아주느라, 고기가 밥상 위를 날아다녔다.

 몇 번 사양하던 주성은 아무리 그래봤자 다시 돌아올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못 이기는 체 받아들였다.

- 돌을 샘켜도 금방 소화될 나이지라. 난 처음 문 열고 머시기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인가 했소. 두 사람이 월매나 보기 좋던지. 여그 가끔 영화 찍는 사람들이 오기도 허요.

주성의 식욕은 소 한 마리도 거뜬히 해치울 기세였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그들은 자신들 방으로 들어왔다.

- 우리 같이 양치질하러 갈까?

 희수가 웃으며 칫솔 세트를 꺼내고, 문을 열어 비를 맞으며 수돗가로 달렸다. 두 사람은 초등학생처럼 충실히 알림장 숙제에 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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