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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Oct 26. 2024

인간 등급-4


 하늘의 구름이 산 정상에 걸친 듯 낮게 내려앉고, 나무들이 짙푸른 녹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8월이 문턱을 넘어설 즈음, 지수는 더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업무에 능숙해졌기 때문이다.


 첫 여름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 처녀성을 상실한 후유증으로 만신창이 된 몸을 직장에 혹사해야 했던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 괴로운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우진의 연락 두절이었다.

 밤마다 우진과의 첫날밤이 애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강인한 쇠사슬로 그녀를 옭아매고 있어, 하루에도 열두 번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생존의 말뚝에 매인 몸을 풀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도 그랬지만 그녀 집안 역시 엄격하고 보수적이어서 여성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들어왔었다. 여성의 정조 상실은 곧 행복 상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그의 거처인 하숙집을 찾았다. 한여름의 해는 길기도 해서 오후 여섯 시가 넘어가는데도 대낮같이 환했다. 여차하면 외삼촌 댁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는 곤란했다. 특히 엄마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엔 절단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고등어조림 냄새를 풍기며 중년 아줌마가 문을 열었다.

- 누구세요?

- 혹시 이우진 씨가 이 집에?

- 아아, 우진 학생! 네에. 잠깐만요, 밥 먹으러 내려온 것 같은데에?

 아줌마는 지수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안으로 들어서며 ‘이우진!’하고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얇은 티셔츠 차림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를 보자 허깨비라도 본 듯 허둥대던 그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회색 줄무늬 와이셔츠를 걸치고 다시 나타났다.


 대문 밖으로 몸을 빼낸 우진은 지수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꽁지 빠지게 하숙집을 벗어났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S대, 이우진의 격에 맞추느라 새로 산 뾰족구두가 아까부터 고역이었다. 발뒤꿈치가 벗겨져 피가 고인 데다 퉁퉁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다방 간판이 보이는 곳에 그가 멈춰 섰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겨우 다가선 지수를 향해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짧은 말을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 먼저 들어가세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지수는 종종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다. 탤런트 한인수 얼굴이 클로즈업되다 다시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렸다. 두 번의 만남 모두 몸끼리 먼저 붙었을 따름으로, 그를 정면에서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사물이 제대로 인식되는 법이거늘.

 

 다방으로 내려온 그는 마치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여전히 피부톤은 밝았지만 이목구비는 그녀의 기억과 많이 달랐다. 외꺼풀로 길게 찢어진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이 조금은 야비하고 심술궂게 느껴졌다.

커피가 배달되었지만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 왜 저를 피하시죠?

- 피하다뇨? 제자리에 있었을 뿐이에요.

- 가만있는 게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 지수 씨 원래 이렇게 당돌한 여자였어요?

- 네에. 원래 제 모습입니다!

- 우리가 결혼이라도 했나요?

- ….

  지수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아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과 코를 찍어댔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지수에게, 그가 심장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 그날, 지수 씨 처녀 아니었어요! 그리고 현재 처녀인 박은영과 교제하고 있어요.

  "!"   

 무슨 정신으로 대구까지 내려왔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다. 자고 나니 자신의 자취방이었다. 게다가 신고 갔던 구두를 어디다 벗어버렸는지…. 다방을 나온 이후의 시간이 캄캄한 암흑이었다.     

 


 우진을 기다리는 동안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과거를 회상하니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듯 아찔하기만 했다. 넝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지수 주변을 해바라기처럼 돌던 류재성 덕이었다.

그와의 결혼은 신이 그녀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은 세월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인간이라는 원형 위에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받아들인 교육의 장점이 온전히 소화되고 흡수된, 이 시대 진정한 우등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우진이 지수 앞자리 의자를 빼고 있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한산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옆 건물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 소맥 어때요?

- 좋으실 대로,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일 순배 이 순배, 삼 순배… 술잔이 계속 돌았다. 우진의 얼굴은 불콰해지고, 귓불은 빨간색에서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수는 자신의 주량인 소주 서너 잔 외,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 우진 씨, 혹시 부인이 박은영 씨인가요?

- 허허…. 왜 은영 씨와 결혼했을 거라 생각하세요?

- 당시 교제한다고 들어….

- 흐음, 사람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은영이 집안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인연이 되었을지도….

우진은 안주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이미 많이 취한 듯했다.

- …내가요, 내가 말입니다. 명색이 S대 나온 놈이, 저 촌구석 M고 출신이라면 신발 벗고도 들어갔다던 대학인지 학원인지 나온 놈한테 머릴 조아리고 있어요.

- 각자 역할이 다를 뿐이죠. 요즘 갑질하는 대표도 흔치 않거니와 더구나 재성 씨는 그런 종류와는 거리가 먼….

- 이봐요 지수 씨, 남자의 세계는 말이죠, 여자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어요. ‘인생은 한방!’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친구죠. 소문에 의하면 능력 있는 마누라 덕에 저렇게 되었다고.

- 제가 아는 사실과 다르군요.

-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 마누라가 어떤 사람이라던가요?

- 재력이나 권력 가진 인간들의 딸…. 뭐어 그런 종류 아니겠어요?

- 자신이 일구지 않으면 온전한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히야아, 지수 씨! 언제 이렇게 유식해졌어요?

- 감히 S대와 어찌 유식을 겨루겠습니까!

- 허허, S대가 뭐 별거라고.

- 못 가본 사람에겐 아득한 별 같은 상징이죠.

- 무시하세요 허상 같은 거, 상징은 무형이니까요.

- 지적 재산도 무형이긴 하지만 유형의 가치로 환산되죠.

- 지수 씨 말솜씨에 못 당하겠는데요,

- 우진 씨는 저의 사생활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 뭐를 물어봐 주면 좋겠어요?

- 모름지기 대화는 주고받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하기에….

- 나는 남의 사생활 따위 관심 없어요. 오로지 내 생활에 충실할 따름이죠.


  우진의 잔은 지수가 채우기 바쁘게 비워졌다.

- 너무 과음하시는 거 아니에요?

- 이래 봬도 주량 셉니다. 맥주 한 박스도 거뜬해요. 아직 건강하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 나이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죠.

- 흐흐…. 그나저나 일은 할 만하세요?

- 아이 참, 술맛 떨어지게!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지 아세요? 제발 그 XX가 내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고등학교 때 구석의 먼지보다 더 존재감 없던 인간한테 이! 이우진이! 허릴 굽신거린다구요. 아무리 무식해도 사장은 사장이니.

- 재성 씨가 돈에는 좀 깐깐하고 좀생이 기질이 있지만, 그런 면이 긍정적으로 해석될 때도 있어요. 융통성 부족한 사람이 순진한 경우를 많이 봐 왔거든요.

- 지수 씨, 아까부터 재성일 편드는 것이… 혹시 재성이와 그렇고 그런 사이?

-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정이 들었어요.

- 거봐요, 척하면 삼척, 그나저나 지수 씨 남편은 마누라가 고향 동기동창의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 그렇군요. 하기사 모든 남자가 같을 거예요. 요즘 동창들끼리 그렇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우진은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계속 술을 찾았다. 술이 술을 부르는 격이었다. 지수가 대리 기사를 부르겠다며 휴대폰을 들자 폰을 낚아채며 그녀를 주저앉히기도 했다.

- 지수! 나를 불러낸 건 다른 생각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우리 ‘해브 어 굿타임’ 어때?

- 해브 어 굿타임? 그게 뭐예요?

- 에이, 선수끼리 왜 이래?

- 저는 아무 선수도 아닙니다만.

- 내가 이래 봬도 눈치 백단, S대가 괜히 S대가 아니거든. 눈치 같은 것도 주입시키는 학문의 전당! 재성이와 그렇고 그런 관계면서 나와 안 된다고 하는 건 도덕에도 안 맞고 상식에도 어긋나….

 아예 반말 모드로 돌아서 횡설수설하는 우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오니 남편이 반가이 맞으며, 농을 걸었다.

- 골프 못하게 했더니 이제 곤드레만드레, 누굴 만났기에 이렇게 향긋한 술 냄새를 풍기셔?

- 총무부장 말이야, 본인 스스로 그만두게 하고 싶다면… 당신 손 안 대고 코 풀게 해줄게.

- 총무부장 만났어?

- 응.

- 묘수가 뭔지 궁금한데?

- 쫓아내겠다고 약속하면!

- 이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잘라내면 결국 혼자 남지. 인간은 서로를 끊임없이 건드리는 존재,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회사 운영할래? 세상천지 내 마음에 100% 드는 이가 어디 있어?

- 나와 악연이 있는 인간이야.

- 회사는 사회적 공공적 기관이야. 오너의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켜선 안 되지. 오만하고 교만한 구석이 있었기에 여기저기 옮겨 다녔을….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지 않은 우리 회사까지 찾아온 걸 보면 얼마나 절박했겠어!

- 허얼! 계속 둘 거란 말이지?

- 당신한테 얘기 안 했는데, 얼마 전 그의 마누라가 전화를 걸어왔었어. 부평초처럼 떠다닌 남편의 모자람을 지적하며 제발 넓은 마음으로 받아달라고 흐느껴 울더라. 그가 분명 무슨 잘못을 했기에 당신이 일부러 만났으리라 생각해. 그러나 실패 없고 실수 없이 살아온 인생이 과연 있을까? 당신이 나하고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봐. S대까지 나왔으니 분명 우등생 기질이 있을 거야. 그 재능을 회사에 이롭게 쓰이도록 발굴하는 게 내 역할이기도 하고.

- 그래도 앙갚음하고 싶다면?

- 과거에 갇혀 복수를 하겠다는 저의(底意)야말로 당신답지 않은… 최고의 복수는 상대를 응징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잘 사는 것!


 지수는 잠자리에 누워, 난생처음 ‘인간 등급’에 대해 생각해봤다. (끝)     



*다음 주 토요일,

 더 깊은 19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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