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예과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주성은 3월초 상무대에서 소위 임관식을 거행한 뒤 곧바로 부산 해운대의 병기학교로 걸 것이다.
머리로 그의 동선이 훤히 그려졌으나, 말뚝에 매인 몸을 어쩌지 못했다. 어머니가 학교와 집을 밀착감시하며 그녀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희수는 자주 피로감을 느꼈다. 갈수록 늘어나는 학업 량과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과제가 아득한 태산처럼 높아 보였다. 입맛이 없는데다 나른하기까지 하여 엎드리거나 눕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느 날처럼 어머니가 학교에서 그녀를 태우고 집에 온 날,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옆으로 쓰러지며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봐!
-요즘 왜이렇게 졸리지?
-너 생리 언제 했니?
-?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
-언제 했냐고?
-....
허둥대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별거 중이었지만 자식 일에는 한달음에 달려오곤 했다.
그 와중에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희수는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갔다.
따끔한 통증에 눈을 뜨니 아버지가 자신의 팔뚝에서 채혈을 하고 있었다.
-뭐하세요?
-가만있어 봐!
그때서야 희수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월경을 정확히 몇 달 걸렀는지 기억에 없지만 한동안 하지 않았다는 기억만은 선명했다.
채혈한 혈액을 주사기 통째로 들고 병원으로 달려간 아버지가 다시 집에 온 시간은 약 한 시간 후였다.
-맞아요?”
아버지 멱살이라도 잡을 듯, 살기 띤 음성으로 다가가는 어머니를 밀치고, 아버지는 희수에게로 다가와 꼭 끌어안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의 푸근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부녀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두 사람을 거칠게 떼어낸 후 딸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당신 미쳤어? 애 가진 애를, 제발 이러지 마. 부탁이야!
-그래, 나 미쳤다. 너 평생 바람 피고 돌아다니는 동안, 겨우 저거 하나 믿고 살아왔는데, 이런 배신이라니... 이 일을 어떻게, 흐흐흐흑….
-화공학과 문주성이라는 학생이니?”
아버지 입에서 '문주성'이란 말이 나오자 희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 어떻게 아셨어요?
-너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냐? 뒷조사 하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흐흐흐흑!
-당장 그 XX 당장 퇴학시켜야 해!
어머니의 앙칼진 음성이 거실의 공기를 난도질 했다.
-제발 그만 좀 해!
-쳇, 너가 아이들 제대로 돌봤다면 이랬을까? 바람이나 피우고 돌아다녔으니 저애들이 잘 보고 배웠겠지.
-흐음….
그녀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은 심한 언쟁을 벌였다. 말이 언쟁이지 어머니는 아버지께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집어던지며 폭행하는 수준이었다. 어릴 적부터 눈에 익은 두 사람의 싸움 패턴이었다.
다행히 집에는 세 사람 밖에 없었다. 동생들 모두 중·고등학생이어서 밤 10시 이후에나 돌아오기 때문이다.
-빨리 병원으로 가 서울에 있는 아는 의사 섭외해! 하루라도 빨리 아이 지워야지.
-희수도 이제 성인이야, 쟤 의견은 없다니?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이야?
-아마 5~6개월 되었을 거야, 뱃속 아이는 이미 인간이라구. 아기 임산부 둘 다 위험하니 그 남자와 결혼시키자!
-이런 XX, 니가 언제 우리 애들 신경썼다구, 저리 꺼져!
-이봐. 희수는 엄연히 내 딸이고 딸의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내게도 있어! 그리고 의사 아닌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내가 그 청년 뒷조사를 해봤는데 성적도 우수하고, 어디 하나 버릴 게 없는 모범 청년이었어.
- 당신 정말 미쳤구나, 그 무식한 공대생에게 희수를 시집보내란 말이야? 자신의 전공으로 비전이 없을 듯하니 군장교로 입대한 것 아냐! 그런 놈을 의사가 될 내 딸과 결혼시키라고?
매일같이 집안은 전쟁 통이었다. 동생들이 들어올 시간이면 휴전하여 평화를 연출하고, 날 밝으면 다시 전투를 치렀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일단 희수의 휴학에는 세 사람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아버지의 동조가 있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머니는 필리핀 마닐라 행 비행기 표와 호텔 등을 예약했다.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희수는 어머니가 하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을 외할머니와 도우미에게 부탁하고, 어머니가 희수를 이끌고 필리핀 마닐라로 날아간 때는 5월 초순이었다. 동생과 이모, 주변인들에겐 희수의 건강악화로 요양 차 공기 좋은 휴양지로 간다고 했다.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느슨한 옷으로 배를 감춘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피골이 상접해보였기 때문이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어디로 전화를 걸어 영어로 통화했다.
“We have arrived in Manila… We’ll wait for you tomorrow at 10:00, the front of this hotel….”
어머니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여, 일상적인 영어회화에는 문제없었다.
다음 날, 희수는 어머니와 함께 큰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 전신을 가린 채 호텔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검정색 리무진이 그들 모녀 앞에 섰다. 창문을 내린 운전기사와 몇 마디 주고받고는 희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얼마를 달렸을까, 차가 멈춘 곳은 어느 병원 주차장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밀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주치의라는 사람이 나타나 영문으로 된 서류 몇 장을 내밀자 어머니가 빼앗듯 받아 빛의 속도로 적어 내려갔다. 이어 희수에게 손가락을 짚으며 서명을 요구했다.
원피스로 된 환의로 갈아입은 희수가 수술실로 안내되었다. 양다리를 쫙 벌려 앉도록 설계된 괴상한 수술대에 올라가도록 요구받았다. 헐렁한 원피스 안에 단 하나 걸친 팬티조차 벗으라는 지시를 받고 괴상하게 생긴 수술대에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린 채 누웠다. 두 명의 간호사가 그녀 치마를 가슴팍까지 올린 뒤 히죽댔다. 표현 못할 수치심과 모욕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곧 해부당할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녀 눈에 의료장비들이 나란히 세팅된 테이블이 들어왔다. 커다란 집게 모양의 기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뱃속의 생명체가 꿈틀했다.
이윽고 의사가 들어오고, 간호사가 수술용 도구로 한 상 차려진 테이블을 바짝 끌어당겼다.
- What’s your name?
- ….
- Relax lady, I will check one more time, What’s your name?
- No No! 안 돼에!
미친 듯 괴성을 지르며, 팔에 꽂힌 수액을 뽑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교정의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싱싱한 기운을 내뿜으며 세상을 향해 싹을 틔우고 있는 가운데, 캠퍼스 화단에는 꽃모종을 옮겨 심는 작업 인부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이듬해 봄 복학한 희수는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오기 바빴다. 벌써부터 자신과 눈을 맞추고 옹알이를 하는 재영이 한시바삐 보고 싶어서였다.
어머니의 가없는 회유와 협박,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희수는 필리핀에서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앞으로 생명을 살려야하는 직업군에 속해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따뜻한 요람으로 알고 찾아왔을 엄마에게 역습을 받는다면, 의사의 윤리를 떠나 세상을 부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의사 가운 속에 평생 주홍글씨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일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퉁!’치고도 남는 일은 이미 모성애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고집을 더는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어머니가 조건부로 내세운 것은 아기를 부모인 자신들의 호적에 올리겠다고 한 일이었다. 일단 생명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으므로 그녀는 기꺼이 동의했다.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필리핀에 머무르며 한국 지인들에게 본인의 임신 사실을 연출(?)했다. 또한 아버지와도 거래(?)를 했다. 세 사람은 철저한 공범관계를 유지하기로.
마당 양쪽으로 수호신처럼 서 있는 백목련 자목련이 어느새 꽃잎을 떨구고 하늘 향해 뭔가를 갈구하듯 가지를 읍소하고 있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온 집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끌벅적했다. 새 생명이 불러들이는 기운으로 외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통에 집안은 늘 잔칫집처럼 북적댔다. 재영이 며칠 전부터 엎치기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뭔가 역사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첫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명절날 윷놀이하듯 둥그렇게 모여 앉은 외족들은 엎치려는 재영에게 힘을 실어주느라 용을 쓰고 있었다.
- 영차! 영차! 하나 둘! 하나 둘!….
천신만고 끝, 드디어 처음으로 뒤집기에 성공했다. 마치 나라를 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 환영하듯, 그의 세상을 향한 첫 행보에 뜨거운 박수와 함성을 아끼지 않았다.
박장대소로 가열된 분위기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가운데 현관문이 열리며 싸늘한 낯빛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희수는 어머니의 부재조차 인식하지 못했었다.
- 한 번 더! 한 번 더! 영차! 영차!
"탕! 탕!"
들뜬 잔칫집 분위기 소음 사이로 본능적 두려움이 느껴지는 굉음이 파고들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 어머니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 여기 총을 든 강도가 밖에서… 얼른 와 주세요.
- 문 열어엇! 문 열란 말이야앗! 이희수, 이희수! 희수!
- 총을 든 강도, 빨리 출동해주세요. 노인과 아기가….
- 열 번 셀 동안 안 열면 다시 쏜다! 하나 둘 셋….
어머니와 총을 든 강도라는 사람의 음성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동안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영웅 대접을 받던 재영이 여전히 바닥에 코를 박고 울고 있었다.
- 내가 나가볼게.
- 너 미쳤니?
어머니가 재영을 안은 채 나가려는 희수를 막느라, 세 사람은 거실에서 진흙탕처럼 굴렀다. 재영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횡설수설하는 주성의 음성을 경찰 사이렌 소리가 덮었다. 혼재한 소음 속 한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탕!"
“뉴스, 뉴스… 뉴스입니다. 불법으로 흉기를 소지한 채 휴가를 나온 현 육군 중위가 사귀던 옛 여자 친구가 만나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문주성 중위는 병기 관리를 담당하는 현 육군 소대장으로….”
방송마다 매체마다, 연일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하며 그의 신상이 낱낱이 까발려졌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다녔고, 희수도 몇 차례 다녀왔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을 짝사랑한 나머지 계획적으로 일으킨 범죄라고 했다.
'입대 전부터 여대생 주변을 맴돌며 스토킹을 하는 바람에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으며… 결국 여대생은 휴학까지….'
경찰인지 어머니인지, 누가 소설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심장병으로 병원 입ㆍ퇴원을 반복해오던 할아버지가 얼마 후 돌아가셨다. 구십대 중반으로 아슬아슬한 삶을 지탱해 오던 중이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단어를 대입시키기에 그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
희수는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건 직후 주성의 부모가 선처해 달라고 찾아왔으나 경찰을 불러 곧바로 내쫓았으며, 접근 금지를 요청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