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예닐곱 해가 훌쩍 흘렀다. 그동안 희수네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와는 위 아래층으로 나누어 쓰고, 재영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졸업과 동시에 그녀는 개명을 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해 새로운 삶을 꾸려나갔다.
주성은 잊기로 했다. 군대에서 전과자라는 낙인이 아닌 진짜 별을 달았다 해도 어머니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재영을 끼고 앉아 ‘공과대학 다닌 씨앗 같지 않게 머리가 좋다’는 말을 희수 앞에서 자주 했다. 여전히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재영을 낳기만 했을 뿐 키우는 일은 오로지 어머니 몫이었다. 그와의 결혼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 은혜에 반하는 일이었으며 외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재영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그래서일까, 희수도 점점 그를 마음에서 밀어냈다. 뜨겁게 연애할 당시 어머니의 전방위적 방해 공작에도 일말의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동시대 태어난 인간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넓었던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었으면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재영을 위해서도 잊어야 했다. 엄마가 되어보니 진짜 아이 엄마를 감별한 솔로몬 재판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든 순위에 우선하는.
병원은 날로 번창해갔다. 외할아버지 때부터 병원 주변 부지를 차근차근 매입해 두었던 것을 어머니 아버지가 신축 건물을 세우며,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 준 종합병원으로 확장시켰다.
서울에 있는 명문 의대를 졸업하고 해당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신경의학과 전문의 A를 스카우트했다. 어머니가 희수 남편감으로 기획한 일이었지만 별 부작용 없이 희수에게도 먹혀들었다.
A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청첩장이 돌려지고 있던 때였다.
진료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 허억!
귀신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란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문주성이었다.
- 놀라게 해서 미안…, 퇴근 후 잠깐 이야기할 수 있지?
딱지처럼 접힌 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잽싸게 몸을 돌려 도로 나간 움직임에 희수는 허깨비를 보았나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 분명한 흔적이 있었다.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접힌 종이를 펼쳤다. 어느 호프집 전화번호와 약도가 세세히 그려져 있었다.
주성은 이미 몇 잔 걸쳤는지 얼굴이 불콰하게 상기돼 있었다.
-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
- 알아!
- 예의가 아니잖아?
-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해서 하는 거라면 말리지 않을게. 조건으로 하는 결혼이라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길 원해!
- 상당히 실례하는 거 알고 있어?
- 우리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니? 나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너를 위해 생명을 바치려다 이렇게 됐다. 밤마다 써서 너에게 부친 편지가 수취거절이란 딱지가 붙은 채 돌아오는 건 그래도 참을 만했어. 순전한 내 감정이었으니.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에게 차례로 불려 다니며, 수건처럼 돌려대는 데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이등병으로나마 무사히 제대한 것이 기적이었다고 할까.
- 우리 인연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당시엔 나도 철이 없었어.
- 철이 없었다고? 인간은 철 들기 시작하면 죽을 때라고…. 나라고 뭐 달랐겠니? 희수를 사랑한 감정만은 순도 백 프로였어.
- 할아버지가 주성 씨 때문에 돌아가셨어.
- ….
깊은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길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칠 것 같아서였다.
그쯤에서 멈출 줄 알았다. 주성은 희수의 퇴근길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과 아파트 주차장 등에 귀신처럼, 괴물처럼 서 있기도 했다. 문자와 톡, 폭탄은 경계가 없었다. 통곡과 절규를 토해내다 성경이나 금강경 구절을 보내오는가 하면 다시 성난 파도처럼 일렁였다.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자신을 염탐하거나 따라붙는 주성이 하얀 가운 속에 보일 듯 말 듯 깔끔한 근육을 감추고 있는 A와 비교되어 초라하고 추하게 느껴졌다.
그를 잊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즈음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 육사출신장교도 아니고 기껏 ROTC, 군대에서 말뚝 박는다 해도 별 달기는 하늘에 별 따기, 끝까지 버티면 대령이나 달려나? 전역해 일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들 많이 봐왔다. 자신의 전공으로 비전이 없으니 장교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 아냐? 백번 양보해서 명문대학 출신이라면 또 모르겠다. 지방 공대생 주제에 감히 어디를 넘봐?
그때마다 희수는 귀 막고 눈 감았다. 인간을 의대, 명문대 로스쿨, 지방 공대생…. 쇠고기 부위별 등급 나누듯 구분 짓는 어머니가 혐오스럽기까지 했었다.
요즘 그의 분별없는 행동을 보며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이해되는 듯했다. 재영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측은지심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인륜지대사를 동정과 맞바꿀 만큼 박애주의자도 봉사자도 그녀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신고할까 하다 마음을 눌렀다. 더 큰 화를 초래할 듯해서였다.
퇴근 준비를 하며 휴대폰을 확인하던 희수는 평소와 다른 애플리케이션에 화면에 눈을 치켜올렸다. ‘문주성’이라는 이름자 위에 수십, 수백 통의 빨간색 숫자가 표시되던 평소와 달리 아라비아 숫자 ‘1’이 달랑 올라앉은 게 아닌가. 한꺼번에 손가락으로 ‘퉁’ 치며 넘기던 것을, 호기심이 동해 열었다.
- %^&*!@#$….
- 이런 개XX…!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같이 밤을 보낸 후 둘이 나누던 성적인 내용이었다. 일말의 연민으로 남겨주었던 문자와 톡, 전화번호까지 모조리 차단해버렸다. 단 네 글자를 보낸 뒤.
“저급 인간, 하등 동물!”
결혼생활은 실망스러웠다. 시작은 신혼 여행지에서부터였다.
결혼 전 A와 잠자리를 가질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호텔에서 식사하고 차를 마신 뒤 자연스레 술자리로 이동한 코스였다. 희수가 은근슬쩍 운을 떼었다. A는 남녀 공히 결혼 첫날밤까지 정조를 지킬 의무에 대해 고지식한 이론을 보기 좋게 펼쳐놓았다. 여자만의 정조 의무를 언급했다면 희수가 가만있었을 리 없었다. 성별 구별 없이 지켜야 한다는 말에 부끄럽기도, 뜨끔하기도 했다. 솔직히 썩 유쾌하지 않은, 부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어머니가 처녀성 복구 수술에 대해 운을 떼기도 했지만 행동으로 옮길 마음이 없었다. 설마 삼십 대 중반의 여의사에게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클을 걸 만한 사람은 아닐 거라 믿었고, 그런 의식 속에 갇혀 있다면 자신의 배우자감으로 온당치 않다고 여겼다. 고집이라고 해도 좋을 든든한 배짱까지 지니고 있었다.
‘결혼‘과 ‘신혼여행’이라는 단어가 성(性)과 결부돼 있어, 교본대로 준비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페니스는 발기하자마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르르 죽어버렸다. 둘째 날, 셋째 날… 마지막 날까지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마음 편한 집에서는 다르겠지’ 하는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이어졌다. 전희는 길게 끌었으나 본 게임에선 칼집에 손도 대기 전 자멸하고 말았다.
제대로 마누라 한번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자가 간호사들과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을 따져 묻는 희수에게 A는 도리어 책임을 씌웠다.
결국 결혼 2년 만에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혼 사유란을 채운 글자는 ‘성격 차이’였다.
비록 사상누각 같은 성을 쌓았다 허물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과 쓸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A와 헤어진 일은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불행한 결혼보다 행복한 이혼이 낫다’는 속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명언처럼 개운하기까지 했으니.
늦은 밤 혼자 있는 집으로 내려와 씻고 누우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외로움이 있었다. 성(性)에 대한 갈증이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육체였다. 살아 있는 동안 신이 허락하신 쾌락의 용도를 묻혀두기엔 자신의 여체가 너무 안타까웠다. 몸의 기관과 기능을 세부학적으로 분석하고 용처를 아는 의사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흘이 멀다 하고 싸웠다. 전운이 감지되면 희수가 먼저 동생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누가 누구를 때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수순처럼 비명과 물건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마다 희수는 동생들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전쟁은 늘 아버지의 패배로 끝나는 듯했다. 싱크대에서 술을 꺼내 병째 벌컥벌컥 마신 뒤 다른 방으로 들어가 코를 골며 자는 것으로 막이 내렸으니.
부모가 파괴한 집안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처럼 흉흉하고 황폐했으며,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희수는 그 순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아버지가 마시는 술을 홀짝거렸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잠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마시던 술이 테킬라였다.
근래 들어 술을 마시고 나면 잠이 오는 대신 생물학적 욕구가 일었다.
학회나 세미나 등에 참석하며 자신이 이혼녀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히며, 좋은 사람 소개해달라는 농담에 진심을 섞기도 했다.
진열대에 전시해놓은 상품은 어느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몇몇 독신 남성들과 데이트하며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하나같이 희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성적인 만남은 일반적인 인간관계보다 질퍽하고 복잡했다. 칼로 무 자르듯 단절할 수도, 이어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한복판이었다. 자신이 사막화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사랑 없는 만남을 중단하고, 리얼돌을 옆에 두었다. 아쉬운 대로 생물학적 욕구는 채워졌으나 끝나고 나면 왠지 헛헛하고 쓸쓸한 비애가 찾아왔다.
따스한 감정을 교류하며 정상으로 오르는 인간과의 관계가 절실했다.
텅 빈 시간, 희수는 주성이 보낸 마지막 톡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었다. 노골적인 외설에 당시는 경악했지만 부부간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작업 중 그보다 더 숭고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창회나 ROTC 단체를 통해 그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행복한 가정을 일구고 있을 가능성에 멈칫했다. 그녀가 철칙으로 삼는 원칙은 가정 있는 남자를 경계하는 일이었다. 외할머니, 어머니, 자신에 이르기까지, 남자의 외도는 한 가정을 붕괴시킬 뿐 아니라 한 집안, 나아가 사회 전반을 무너뜨리는 악성코드였다. 더더구나 자식은, 모든 경우의 수에 우선한다는 것을, 재영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