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노인의 수술 당일인 목요일이었다. 희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와의 끈을 연결하리라는 각오로 며칠 동안 전쟁에 출전하는 장수처럼 단단한 각오와 결심을 굳혔다.
정형외과 분위기가 이상했다.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다 그녀를 발견하곤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로 수간호사가 뒤따라왔다.
- 무슨 일이에요?
- 저어… 문 노인이 수술을 안 받으시겠답니다.
- 네에?
-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환자는 퇴원을 요구하기에 보호자인 딸을 간호사실로 불러 물었더니 울기만… 원장님이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보호자로 가끔 아들이 있기도 했던 것 같은데, 현재 누가 있던가요?
- 현재는 따님만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일단 불러주세요.
진료실 문이 열리고, 맨 처음 아버지를 모시고 왔던 두 딸 중 큰딸로 보이는 여성이 들어왔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오늘 8시 30분 수술하기로, 그저께 오빠분께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저도 아버지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으흑!
- 진정하세요.
- 곧 오빠가 도착할 겁니다. 오빠와 의논해서….
- 그렇게 하세요. 수술시간이 오전 8시 30분이어서 저도 일찍 왔습니다만, 조금 늦더라도 기다리죠.
그녀가 나간 뒤 희수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문 노인으로부터 수술 당일엔 아들이 내려온다고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성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 미안합니다.
- 무슨 일인가요? 월요일은 기분 좋게 수술하겠다고 하시더니, 설마 저희 병원에서 일부러 의료비 올리기 위해 수술을 권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건 아닌지요?
- 죄송합니다…. 십여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감기를 오래 앓아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갑상선암이라고 하더군요. 임파선으로 전이되면 되돌릴 수 없다며 의사가 수술을 권했어요. 의료 상식이 전무하던 저희 가족은 부랴부랴 어머니를 대학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실로 들여보낸 게 마지막이었어요.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답니다. 갑상선암은 경과 봐가며 치료해도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신 아버지가 땅을 치며 통탄하셨어요. 고생만 하시다 겨우 살 만할 때 돌아가셨거든요.
-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이해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인간은 보행을 하는 동물, 걷는 동안 다른 기관의 운동으로 이어지지요. 반대의 경우 연쇄적인 퇴화를 불러옵니다.
- 저 상태가 되도록 저희가 무슨 일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아버지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어요. 더 이상 한계를 느꼈는지 당신 스스로 이 병원을 지정해 오신 거예요.
- 실망이네요. 전 또, 주성 씨가 저희 병원을 추천하신 줄….
- 허허허허….
희수는 농을 걸며 슬쩍 주성에게 다가갔다.
- 대학병원을 거부하신 아버지가 손수 이 병원을 지정하셨답니다. 제가 사고 친 집안이 희수네 병원이라는 걸 모르셨나 봅니다.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병원 이름도 바뀌고 희수 씨까지 개명을 했으니….
-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 제가 아버님을 달래보겠습니다.
주성이 나간 후, 문 노인이 주치의를 불러 희수가 병실로 찾아갔다.
- 의사 양반! 내 부탁 좀 들어주시오.
- 무슨 부탁이신지요?
- 들어주실 거요, 아니요?
- 흐흐, 저희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라면 얼마든지요.
문 노인의 부탁인즉슨, 수술실에 아들을 함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수술받다 죽더라도 저승에 있는 아내에게 아들 배웅받으며 왔노라 안부 전해주겠다고 했다.
희수는 즉시 수술 팀을 불러 회의를 했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반대 의견이 우세했다. 부정적인 쪽을 이해 못할 희수가 아니었다.
병원 설립 이래 보호자를 수술실에 들인 예가 없었다. 어느 인간에게나 최소한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그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수술실은 자체로 보안이 유지되어야 한다. 의사가 보호자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장고 끝, 희수가 부담을 안기로 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수술대 위에서 주성의 손을 간절히 잡고 싶었던, 당시와 지금이 시공간을 초월해 맞닿아 있음을, 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 없는, 할아버지-아들-손자로 이어지는 핏줄의 맥(脈...'
이 모든 게 운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가 넘어갈 무렵에서야 환자를 수술실로 옮겼다. 보호자인 주성도 전신에 소독을 하고 의료진 수술 가운으로 갈아입은 다음 수술실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수술대 위에 누운 문 노인이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 어어, 환자분,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전신을 다시 소독해야 하거든요.
- 거어 있냐?
- 예에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한숨 푹 주무신다 생각하세요.
간호사들이 혈관을 찾아 바늘을 끼우고 수액을 연결하고, 준비 다 됐다는 신호를 하자 주치의 희수가 들어왔다.
- 환자 본인 인증 절차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 의사 양반! 부탁이 있소.
- 네 말씀하세요.
- 우리 아들과 손잡고 있으면 수술받으면 안 되겠소? 저승에 가서 저의 엄마를 만나더라도, 아들 손의 온기를 전해 주고 싶어라아...
- 에이 어르신, 돌아가시긴 왜 돌아가세요? 건강하게 해 드리려는 수술인데요.
- 제발 부탁입니다.
의료진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가운데 희수가 용단을 내렸다.
- 보호자 분! 오셔서 손 잡아드리세요!
희수의 결단에 주성이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아버지 손을 잡았다.
- 아버지! 저 손 여기…. 산 같으시던 우리 아버지가 어찌 이리 약해지셨어요? 어흐흑!
- 내가 너희 엄마를 그렇게 죽여놓고, 뭔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 으으흐흑! 아부지, 아부지….
문 노인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2주일 만에 퇴원하여 물리치료를 꼬박꼬박 받으러 다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 아버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을 허락하시겠는지요?
주성에게서 연락이 왔다.
왜 안오나 싶었다. 이제나 저제나 목메고 기다리던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돌아오는 날이며 요일이었지만 주성과 약속을 잡은 후 맞이하는 날들은 달랐다. 포근한 햇살 속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나는 출근길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고 경쾌했다. 병원정원의 나무와 꽃들에서 올라오는 새순과 꽃망울들의 세밀한 속삭임까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D-day를 기다리며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마음 한편 묵직하게 그녀를 짓누르는 악성 바이러스에 괴로웠다. 그의 프로필엔 직장으로 보이는 건물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서 있는 모습과 컴퓨터로 설계된 계략도면 등이 다였다. 가정을 일구고 있다면 가족사진 한 장 정도는 올리는 게, 가족에 대한 예의로도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문 노인이 입원해 있는 동안 며느리의 그림자도 없었다.
희수는 점점 주성이 독신으로 살고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녀 주변에서 스토킹 할 당시를 떠올려 보더라도 결코 아무하고나 결혼할 사람이 아니었다. 의학적 관점으로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체는 언제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지만, 정신은 급속도의 방향 전환이 어렵다.
나쁜 기억은 육신을 보호하기 위해 망각이란 장치가 가동되기도 하지만, 좋은 기억은 육신의 건강을 위해 오래도록 붙들어놓으려는 습성이 있다. 힘들 때마다 조금씩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도록 내어주는 걸 잊지 않으면서.
바이러스가 자신을 공격할라치면 이런 식으로 합리화했으며, 최악의 경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공식을 슬쩍 끌어다 쓸 마음까지 챙겨두었다.
“따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우리 만나요….”
엊그제 봉오리 맺힌 것을 본 듯한데 2~3일 만에 천지개벽을 알리는 화신처럼 벚꽃이 대지를 수놓으며 세상 빛의 조도(照度)를 높였다.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거리를 걸으며 백화점으로 향했다. 20여 년 세월을 돌고 돌아 맨 처음 주성을 만났던 그날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바이올린 선율이 잔잔하게 흐르는… 두 방망이질하는 심장 소리의 협연… 불꽃 튀는 두 움직임 사이로 스며드는 첼로 비올라의 향연… 지휘자의 지휘봉이 하늘 위로 솟구치며 내리꽂는 순간… 일제히 포효하는 관현악단의 하모니… 점점 빠르고 격렬하게… 피콜로와 트롬본이 가세하며 천둥, 번개, 비바람을 불러오는 광란의 체위… 닿을 듯 말 듯 아련하게 도달한… 지휘자의 지휘봉이 멈춘 그곳… 시원의 어느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짐승의 비명, 신음, 울부짖음….”
호텔의 예약된 룸으로 채 들어서는 순간, 오케스트라의 막이 내려지고 말았다. 그녀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주성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으나 이미 두 사람의 눈에 포획되고 말았다.
- 어서 오세요, 반갑고 고맙습니다.
- 네에, 안녕하세요?
희수는 두 사람이 일어서서 빼주는 그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이이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첫사랑이었다죠?
- 글쎄요,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아마 결혼했을 테죠. 주성 씨가 저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으로, 자존심에 먼저 차느라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 푸하하하-허허허허-크크흐흐.
당황스런 분위기에 아무 말이 튀어나왔는데, 세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희수는 그 자리가 그리 불편하지 않게 느껴졌다. 지극히 자연스런 분위기를 주성의 아내가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희수와 주성을 순수 멜로드라마의 주연으로 캐스팅한 후 아름다운 작품을 연출하고 있어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를 감상하는 듯했다. 부부간 확고한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바탕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개였다.
거의 소나기가 끝나갈 무렵, 주성의 아내가 희수에게 자그만 쇼핑백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두 분, 그동안 못다 하신 이야기 많을 테니 자리 비켜드리겠습니다.
- 네에? 어머!
- 시아버지께 두 아이를 맡겨놓고 왔답니다. 아시다시피 수술 후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셔서요.
- 그러면 이 남자 제가 가져도 되는지요?
-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주성 씨가 어디로 움직이는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격조있는 유머와 위트로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한 후,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 내가 주성 씨 잘 놓아드렸네. 저리 현명하고 엽렵(獵獵)한 아내를 맞이했으니.
-우리 자리 옮길까?
주성이 동문서답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호텔에서 나온 두 사람은 한적한 커피숍을 찾아 들어갔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테미 와이넷(Tammy Wynette)이 애절하게 〈Stand By Your Man〉을 호소하고 있었다.
~~~~~
Sometime it’s hard to be a woman
Giving all your love to just one man
~~~~
짙은 허스키한 음색의 여가수 노래에 희수는 왠지 모를 감정이 복받쳐 왈칵 눈물을 쏟았다.
- 어허이 이 사람이?
주성이 테이블의 냅킨을 한 움큼 집어 희수에게 건네며 등을 토닥였다.
- 내가 어찌됐나 봐. 이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 유감 많은 노래야. 카니발 축제에서 블루스 출 때 장○○이 부른 〈댄서의 순정〉 뒤에 이 노래가 흘렀거든. 그날 내가 더 많이 울었을 거야.
- 그날 생각하며 부정한 생각을 품고 왔거든. 부인 보는 순간 엉큼한 마음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버렸어. 두 사람 나 엿 먹이려는 작전이었지?
- 이봐요, 의사양반! 사람 팔다리는 잘 고치면서 마음 읽는 건 어째 영…. 쯧쯧.
- 내가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그래.
- 카니발축제 이후 희수와의 모든 교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입대를 했잖아. 강원도 최전방 첩첩산중, 군대가 아닌 감옥이었어.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가 생각나더라. 밤마다 탈영을 꿈꾸었지.
- 그래서 그 사고를 쳤니?
- 살기 위해 한 일이 일기 쓰기였어. 결혼하며 스무여 권 되는 일기장을 버릴까 고심하다 그냥 두었어.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내 청춘의 가장 아팠고 찬란했던 과거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일기장을 아내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 솔직히 털어놓았어. 물론 서로의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지.
희수는 주성이 운전하는 우주선에 올라 다른 행성을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부부간 저토록 폭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니, 그들의 세계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부유한 외가를 축으로, 외부세계와 철저히 담을 쌓은 성(城)안에서 살아왔다. 성(城) 밖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파수꾼들이 산다고 믿었다. 비로소 성(城) 밖을 나와 자신들의 집을 관찰하니 한 점 점으로도 보일까 말까 한 바깥세상이었다. 인간은 저마다의 우주를 소유하고 있으며 제각각 유일무이한 성을 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찻집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이어가며 희수는 주성에 대해 알았다. 그는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있는 중소기업 CEO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토록 경시하고 무시했던 지방 공대생이 혁신적인 기업을 이끌며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을 증대시키는 주역으로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희수는 조그맣게 포장된 선물함을 열었다. 마음에 쏙 드는 보석 브로치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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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행복한 가정 뒤에 남편의 열정적이고 찬란했던 과거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믿는 편입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아파했던 그 시간들에 깊은 존경과 또한 애정을 표하며….
- 문주성의 아내 ○○○ 드림.
희수는 침대에 누워 허망한 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샹들리에 가지마다 대롱거리는 불빛이 그녀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주성을 잃음으로써 상실한 것들을 하나둘 일깨우며.
“멋진 남성(男性)과 남편, 훌륭한 재영 아빠, 행복한 가정, 존경스러운 스승….”
그 옛날 자신이 주성에게 보냈던 ‘저급 인간, 하등 동물’이란 문자를 떠올렸다.
지구상의 생명체를 굳이 등급으로 분류한다면 그는 가장 상위개념에 속할 것이라 생각했다.
희수는 몸을 일으켜 폰을 집었다. 그리고 주성에게 톡을 보냈다.
“고등(高等) 동물, 고급 인간!”
(끝)
*다음 주엔 웅숭깊은 인간애에 대한, 단편소설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