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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Feb 18. 2022

장 담그던 날


 간장독이 밑바닥을 향하고 있다. 장을 담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쉬이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여러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날짜를 놓치고 말았다. 굳이 담겠다면 아직 기회가 남았지만 왠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다. 내가 장 담그는 날은 친정엄마가 담그던, 그 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종교도 없고 미신을 믿지 않지만 장 담그는 일만은 남들이 보기에 미신처럼 보이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인간이 지구를 내 손바닥 안에 놓고 샅샅이 훑고, 지구 밖 여행을 하고 시대에 주술행위로 보이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나를 두고 가족들조차 하찮고 웃기는 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일만은 엄마의 의식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고집이나 아집 같은 게 내 안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2~3년을 주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우선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 시대 사람치곤 비교적 이른 나이, 사십대 후반부터 장을 손수 담가먹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장을 담근다며 기특하다며 칭찬해주는 이가 있는가하면, 백화점에서 파는 유명 브랜드 장이 손수 만든 재래식 장보가 훨씬 맛있다며 젊은 나의 옛날식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길들이려 해도 시중에서 판매하는 장들에 영 입맛에 적응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몇 년 살던 동안도 한국에 있는 장을 공수해 먹었을 만큼 내 입은 장에 대한 은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못했다.

시대흐름에 상관없이 재래적이고 보수적인 맛을 고집하고 있어서다.

     


 올해 장을 담그지 못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게 열아홉 살 된 둘째의 반응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아아, 엄마가 베란다에서 굿하는 것 같은 거, 그거 말이지?  

    


 어느 해 장을 담그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부부동반 저녁 식사 모임에 나갔다 늦게 들어 온 날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늦둥이가 집에 있을 시간이었는데 불빛 하나 없는 집안이 이상했다. 현관에 들어서며 신발도 벗기 전에 거실 등 스위치를 올리려는 순간 베란다에서 번쩍하는 불빛과 후레쉬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현관으로 뛰어나가려는데 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야!

 아들이 베란다에서 불쑥 튀어 나오는 게 아닌가!

-이너무 자슥 거서 머 했노?”

-사진 찍고 있었어.

-무슨?

-저기 저거.

 그는 간장독을 가리켰다.


 며칠 전 장을 담그고 항아리 둘레에 금줄을 쳐 놓았었다. 신기한 듯, 두려운 듯 금줄을 살피며 묻던 그에게 잡귀 틈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거라고 말했다.

섬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베란다에 나가서는 얼른 문을 닫고 뛰어 들어오기 일쑤였다. 웬 미신이냐며 핀잔을 주며 웃어넘겼는데 딴엔 좀 묘한 두려움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등은 시가에서, 친정에서 원하면 언제든지 갖다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는 그런 종류들을 무한 공급해 줄 의무가 있는 줄 착각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시가에서 갖다먹던 것까지 친정에서 공수 받게 되자 엄마 한마디 하셨다.

-내가 너와 평생을 할 수 없으니 너도 장 담그는 거 배워라. 세상 쉬운 게 그건데…, 사먹는 게 어디 우리 재래식 같이 맛이 깔끔하더나?


 올해로 마지막일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도 어떻게 되겠거니 안일하였다. 정 안되면 사먹지 뭐. 장 담그는 일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몫이고 그런 엄마들보다 나이가 더 들 거란 생각은 저 멀리 지구 밖 일처럼 비혈실적으로 느껴졌다.


 시어머니께서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도 연세가 들어 힘에 부쳐하시며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공급이 뚝 끊겼다.

사 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길들여진 입맛이 시중에서 파는 장맛을 거부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그런대로 먹었으나 내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때서야 장을 담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메주를 부탁하고 소금을 마련하여 장을 직접 담기 시작했다. 친정엄마에게 배우려니 치매로 이미 맑은 정신이 아니었다. 언니와 올케에게 전화로 묻고 네이버 지식창을 열어 꼼꼼히 공부한 뒤 그대로 따라했다.


 몇 개월 후 장맛을 보니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맛이 그럴 듯 했다.

-허얼! 이렇게 쉬운 일을 뭘 겁을 먹고….


 기고만장하여 내가 담은 된장과 간장을 이웃에 사는 친구와 지인, 동서들에게 마구 퍼내며 자랑을 했다. 모두들 맛있다고 한다.      


 정신이 맑지 못한 엄마를 잠시 집에 모셨다. 끼니 때마다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 이것저것을 식탁에 올려놓는데, 의자에 앉자마자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장 없나?

 간장 찾는 소리다.

-엄마, 몸에 해로요.     

-그래도 언더라(가져와라).


 어릴 적 우리 집은 밥상 한가운데 늘 간장 종지가 놓었다. 간장으로 먼저 입맛을 다시고 밥을 먹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런 식습관으로 길들여졌었다. 성인이 되 염분 과다섭취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간장종지를 치웠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 습관을 고집하고 계셨다.

내가 담은 간장을 떠다 엄마에게 드렸다.

간장에 적신 수저를 입에 넣으시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구우, 무슨 장맛이 이렇노? 그때 배우라고 했는데 아직 못 배웠나? 집에 장이 맛있으면 반찬이 다 맛있는데...


 모든 기능이 쇠하신 만큼 감각의 기능 또한 쇠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서럽고 안타까운 일들을 겪으시며, 음식을 맛이 아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명도구로 생각하며 생명을 부지해 오시는 줄 알았기에,

 미각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엄마, 내가 직접 담근 거야. 산 것이 아니라고요.

-소금과 물, 메주로 담는다고 인 줄 아나?  입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게 반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내 고무장갑 낀 손을 내려다 보는 게 아닌가.


맑은 물, 맑은 공기 속에서 적당한 비율로 숙성된, 팔십 평생 길들여진 당신의 장과 다른 내 장맛을 금방 알아셨다.

 어쩌면 고무장갑을 낀 채 플라스틱 페트병에 퍼다 나르던 나의 행동에 대한 일침이었을지도.  

   


 엄마의 장 담그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안경을 끼고 달력을 짚어 내려가며 장담을 날을 고심하던 엄마의 모습은 무슨 거사를 치룰 듯 엄숙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손 없는 날을 택한다고 하였다. 왜 손 없는 날로 정하는지, 손이 무엇인지도 궁금했지만 명쾌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엄마, 그 손이 손님이야?

-그냥 잡귀 틈타지 말라는 뜻이지, 집안에 장이 맛있어야 전통이 있고 뿌리가 있는 법, 모든 반찬 맛 장에서 시작되는기라.


날이 잡히면 한지조각에 써서 달력 옆에 부적처럼 붙여 놓았었다.


장 담그는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우물물을 길러다 놓는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첫새벽의 물이어야 한다며 자는 언니와 나를 깨우곤 했다.

 소금을 풀어 적당히 농도를 맞춘다. 삼베보로 다시 한 번 거른 물을 메주를 넣어 놓은 항아리에 붓는다. 장독간 가장자리 가장 큰 독이 장이 들어가는 항아리였다. 장을 담고 나면 새끼를 꼬아 붉은 고추를 끼운 금줄을 친다.   


 나는 그 독이 무서웠다. 귀신도 못 오게 막는 금줄이니 귀신보다 더 무서운 신이 그 주변에 있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정안수 떠놓고 빌었는데 정안수를 올려놓던 자리도 그 독이었다. 엄마는 우리들에게 그 주변조차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열여덟이 넘어서야 그 뚜껑을 열어 보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끝없이 깊은 동굴이 아니었다. 엎드려 구부린 채 손을 넣으니 손이 닿고도 남았다.

-이게 이렇게 무서웠다니….  

   


 엄마에게 장은 무엇이었을까? 먹고 먹이는 대로 살과 피가 되었던 그 중심은 누가 뭐래도 장이었을 것이다. 장독간 가장자리 떡하니 자리 잡은 간장독은 엄마의 종교이며 신앙이었다.


엄마의 장맛을 혀로만 느낄 때는 머리로 느끼는 맛을 알지 못했다. 더 이상 혀로 맛 볼 수 없고서야 비로소 머리로 느껴지는 맛을 찾을 수 있었다.


 선명하고도 명료하게 뇌리에 각인 된 그것은, 손 없는 날을 잡아 새벽 맑은 물로 정갈하게 담근 장독위에 정안수 떠놓고 빌던 엄마의 기도, 염원이 맛으로 녹아든 생명수가 아니었을까? 

    


엄마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 것은 장만은 우리 집 것이 최고라는 자부심 내지 자존심이 내재 돼 있었던 듯하다.


  깨끗한 정수를 받아 소금을 부어 날계란을 넣어 500원 동전 크기만큼 물에 잠기지 않을 농도가 되었을 때 메주를 넣은 항아리에 붓고, 숯과 잘 말린 고추 몇 개 띄운 뒤 마지막으로, 구해다 놓은 짚으로 새끼줄을 예쁘게 꼬아 금줄을 두르는….  

   


 내가 굳이 장을 담는 것은, 재료에서 배합된 물리적인 맛 위에 엄마의 정성과 기도가 더해지는, 내 안의 종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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