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을
몇 년 전일까?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갓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미팅이란 걸 하게 되었단 말이다. 뭐 지금도 연애를 매우 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땐 이런저런 연애 스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더랬다. 소개팅에서 승리하는 법, 미팅에서 호감을 이끌어 내는 법 등등에 대해 여기저기 찾아보았던 찐따라고나 할까?
여하튼 미팅은 하긴 했어도 외롭다거나 누군가 꼭 사귀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사실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기억은 항상 왜곡되니..) 미팅은 '묻지마 미팅'이었다. 이게 뭐냐면 아는 선배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미팅시켜 줄 테니 해보라는 식이었다. 나오는 여성분들이나 뭘 물어봐도 "묻지마, 그냥 해" 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처음 본 선배형의 친구, 이렇게 세 명이서 묻지마 미팅을 나갔다.
첫 대면을 하곤, 크게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 세 명이서 작전 회의를 했다. 근데 세 명 다 똑같은 말을 하게 돼었는데..."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혹시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밀어줄게요" 결국 그냥 아무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걸로 하고 재밌게 놀고 헤어지기로 했다. 여성분들 중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친구가 제일 눈에 띄긴 했다. 뽀얀 피부에 깔끔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찐따의 스킬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 참에 책과 인터넷에서 배운 스킬들이 진짜 소용이 있는지 써먹어 보기로 했다. 생각해 냈던 필살기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면 옆자리 여성에게 관심 있는 척을 해라'였다. 그래서 빨간 원피스 그녀의 옆에 있던 친구에게 계속 질문을 하고 쳐다봤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이야기하고 게임을 한 후, 진실게임에서 다짜고짜 빨간 원피스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찍어버렸다. 그리곤 나는 공연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와버렸다. 뭔가 강한 임팩트를 주고 사라졌다고 해야 되나...
그리고 집에 돌아온 11시쯤.. 그녀와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내 친구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 관심 있다고 해서 놀랐어"라는 거다. 우와~ 이게 진짜 통하는구나... 찐따 스킬이 통할 때가 있구나. 새삼 놀라웠지만 그 뒤로 서로 연락은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곤 며칠 뒤, 저녁에 급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자기랑 밤새 술을 마셔줄 수 있냐는 거였다. 이상한 의도는 아니었고, 집안 사정상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아침에 들어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정이 딱해서 수다나 떨자며 흔쾌히 수락을 했다.
그녀와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성적인 감정이라기 보단 그냥 여자 사람 친구? 의 느낌이었다. 장소가 신촌이었는데 마침 신촌에 미팅을 주선한 형과 같이 미팅 나갔던 형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상황을 설명하고, 그 모임에 합류해도 되겠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분명 미팅을 같이 나갔던 형은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했었고,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다고 했었고, 연애 생각도 별로 없다고 했었더랬다. 근데 내가 그중에 한 명과 밤에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그 와중에 모임의 친구들이 새파랗게 어린 20살 짜리에게 졌다고 엄청 놀려댓나보다. 날 찢어 죽이겠다는 둥 하며 술 취해서 난동을 부렸대나 뭐라나... 당황한 나는 오해하지 말라며, 당장 그 모임에 합류해서 얘기하겠다고 했으나 극구 오지 말라며 만류하는 주선자. 결국 주선자 형만 몰래 빠져나와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헤어지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그 난동을 부린 형은 계속 그 빨간 원피스 그녀에게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허허.. 그 형은 왜 그랬을까?
그때 느꼈던 것이 남자의 정복 욕구였다. 사실 미팅에 나갔던 남자 3명은 연애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미팅에서 게임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려 했다. 우연찮게 나의 '찐따 스킬'이 어중간하게 먹힌 게 인연이 되어 저녁에 만나 술 한잔 하게 됐고, 그 Fact가 그 형의 정복 욕구에 불을 지핀 거다. 관심이 없는 여성에게 단순히 정복욕구로 접근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일까?
더욱 놀랍게도 정복 욕구를 가진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 여자의 마음을 얻거나, 여자의 몸을 취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부류이다. 진심으로 관심이 있거나 좋은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는 것과는 완전 별개의 영역이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 갈 때 같은 나라를 자주 방문하며 힐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이 이 나라를 왔었다는 걸 중요시해서 한 번 왔던 나라는 절대 다시 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후자인 사람은 여행을 가는 이유가 정복 욕구 때문인 거다.
남자나 여자나 정복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접하면 참기가 힘든 거다. 평생 웬만한 건 다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가진 건 없는데 자존심이 세서 그럴 수도 있겠다. 혹은 굉장히 목표지향적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이런 남자도 만나고 저런 여자도 만나게 된다. 사람은 경험적 사고를 하는 동물이고, 자신이 경험을 실제로 해봐야 깨닫는 동물이기에 여러 사람을 만나봐야 나에게 맞는 이성을 보는 눈이 생긴다. 경험이 없을 땐 정복 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끌릴 수 있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처럼'보이니 말이다.
반대로 내가 정복 욕구가 있는 사람은 아닐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정복 욕구를 관심이나 사랑으로 착각하여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다면 어휴~ 끔찍하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정복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정복하고 싶어 하는 걸 함께 하려는 욕구가 더 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찐따처럼 쓰잘떼기 없는 것에 목숨 걸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