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가을
대학교 1학년이 갓 되었을 때 일어났던 황망한 일이 있다. 나름 고등학생 땐 공부를 꽤(?) 잘해서 1학기 수시라는 전형으로 고3 때부터 대학교를 다녔었다. 그리고 같은 전형으로 붙은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 빼곤 다른 친구들은 다 수능 공부에 한창이었으니 말이다.
수시에 붙기 전까진 전혀 친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가뜩이나 나는 문과였고 그 친구는 이과여서 이름만 들었을 정도였다. 수시 전형을 붙고 나서 그 친구와 함께 전형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자고 해서 모임을 만들었고 운영진을 꾸렸다. 그렇게 그 친구와는 꽤 친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정이 들고, 알지 못했던 그 친구에 대해 굉장히 재밌고 유쾌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는 친구로서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좋아라 하는 성격이라 인기가 많았다. 같은 운영진이고 같은 동네다 보니 내 생각으론 꽤 친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그 친구와 더 친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술 한잔 거하게 같이 하고 함께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고백 아닌 고백(?)을 하게 됐다.
난 너를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해.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그러자 그 친구는 미안하다며 자기는 고등학교에서 베스트 프렌드 패거리가 이미 있다며 거절을 표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굴욕이자 상처였다.
두 번째도 고등학교 친구다. 이 친구는 학생회장 출신으로 대학교를 가서도 과대표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말도 잘하며 흥이 있는 친구였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훈남이다. 물론 고등학교 땐 돼지였지만 말이다.
이 친구와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친하다고 생각했고,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둘이 술 한잔 하면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미안해, 내 베스트 프렌트는
XX랑 YY 뿐이야.
그래서 너한테 거짓말로
베스트 프렌드 하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나는 정말 좋아하는 두 명의 친구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땐 베스트 프렌드를 참 갖고 싶었나 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참 외로움을 잘 느꼈던 사람 같다. 어떻게든 베스트 프렌드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베스트 프렌드는 없다는 신념을 갖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기존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베스트 프렌드는 내가 죽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올 사람, 술에 취해 새벽에 전화했을 때 거리낌 없이 달려올 친구, 돈 꿔달라고 했을 때 꿔주는 친구 등등의 가정을 하곤 했다. 사실 그건 친구를 시험대에 올리는 거였다. 가설의 실험대에 올려놓고 나 혼자 추측을 한다. 그리고 그 가설대로 행할 건지 살포시 물어보기도 하며,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내 가설대로 친구가 행동하지 않았다면 쌍욕을 하는 친구도 많이 봤다. 베스트 프렌드라고 하다가 절교한 친구들이 참 많았다. 그 시절에는 말이다.
그런 생각 정리가 된 후론 나에게 베스트 프렌드라는 용어는 없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친구만 존재했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만큼 위해주고 챙겨주고 신경 써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 몇 년 뒤에 정말 친한 친구와 노량진 곱창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곤 그 친구에게 말했다.
난 너를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난 네가 좋고 잘해주고 싶고
챙겨주고 싶은 거지.
기대하는 건 없어.
그 친구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야기를 듣고는 그 말의 뜻을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좀 섭섭하다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그래도 그 친구와 여전히 굉장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쳤다. 연애를 하다 보면 여자친구에게 기대하는 게 생기곤 했다.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여자친구"라는 역할에 기대심리가 있었나 보다. 여자친구라면 이래야 하는 게 아닌가? 여자친구인데.. 여자친구인데..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해준 만큼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곤 했다. 베스트 프렌드를 만들고 싶다와 동일한 욕심이었던 거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나선 그런 기대심리가 많이 줄었다. 물론 사람인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심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예전만큼 계산하는 심리는 없어졌다. 그냥 뭐든지 다 해주고 싶고, 딱히 무언가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면 이래야 하지 않나?', '날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라는 가설도 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관심을 가지고 위해줄 뿐이다. 이런 느낌이 들어야 "이 사람이다"할 수 있나 보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 사람이 상처주면 또 멍해지긴 할거다.
난 네가 그냥 좋아.
중요한게 뭐냐면 "그냥"이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