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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n Apr 17. 2016

#그녀에게 배신 당하다.

2016년 4월

 여자친구에게 호감을 느꼈던 몇몇의 장면이 있다. 그녀의 맑고 맑은 순수함어른을 대하는 예의 바른 태도를 볼 수 있었던 때였다.


 외할머니 생신 때 많은 친척들이 모인 적이 있다. 이미 여자친구와 결혼식 날을 잡은 상태라 그녀도 행사에 참석을 했더랬다. 그녀를 처음 본 친척분들은 첫인사를 나누셨고, 이모할머니께서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그리곤 결혼생활의 팁을 주시겠다면서 말씀하셨다.

마트는 월요일에 가렴
상품이 교체되는 시기라서
신선한 제품을 살 수 있어.
그리고 조금 지난 제품은 싸게 살 수 있단다


 그러자 그녀는 너무 좋은 정보 감사하다면서 어쩜 그런 실용적인 정보를 많이 아시냐면서 격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을 했다. 그런 모습이 순수해 보이기도 하면서 매우 좋아 보였다. 아빠미소가 흘러나왔다고나 할까..


호감을 느꼈던 다른 장면들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버님 너무 멋있으세요.
어쩜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죠?
저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해 볼게요!!
아버님한테 반할 거 같아요~ 멋지세요!


 사실 나는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말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을 멋있게 봐주고 싹싹하게 대하는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역시나 아버지의 그 말에도 존경심을 담는 것을 보고 순수해 보이기도 했고 착해 보이기도 했다. 하나만 고르자면 그 어떤 말에도 처음인 듯한 그 순수함존경심을 표현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단 말이다. 그랬단 말이다...


 오늘 코엑스 데이트를 하면서 여기저리 돌아다니다가 푸드코드 쪽을 돌게 되었다. 마침 마트 주변을 지나가게 되어서 말했다. "우리 결혼하면 장은 월요일에 봐야겠네. 그래야 신선하고 싼 제품 살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기억하고 있네? 근데 그거는 아냐.
지점마다 다 달라.
우리가 살집 근처의 마트는
목요일이 그 날이야.


 응? 뭐지??? 그래서 물었다. 그거 다 알고 있었는데 그때 모른 척 한거였냐고... 그러자 그녀는 반전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응, 다 알고 있었지.
근데 그렇게 해드려야지 좋아하셔


 그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간 영혼까지 탈탈 털어도 잘 맞는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단순 무식한 나는 저 상황이었다면 곧이곧대로 대답을 했을 자식이었다. "할머님, 그게 지점마다 날짜가 다 달라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아버님 말씀 참고하겠습니다.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이다. 근데 그녀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할리우드 액션을 할 수 있는 여자였다. 물어보니 그간 내가 좋게 봤던 대부분이 상황이 그녀의 노련한 센스였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아... 그녀의 리액션은 모두 나에게 맞춰준 거였구나...' 알아버리고 나니 참 고마웠다. 이렇게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분 좋게 해주는 여자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근데 알게 모르게 미묘한 배신감도 들기 시작했다. 정말 과분하게 좋은 여자라는 점에서 기분 좋아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나의 운명론적인 생각이 깨졌다는 점에서 충격받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미묘하면서 멜랑꼴리한 상태라고나 할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단순 무식하니깐... 내가 못하는 그런 싹싹한 센스가 있는 여자는 내겐 복덩어리다. 그리고 내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말이다.


 나도 그녀가 나를 소울 허즈밴드로 생각하게끔 작전을 짜야겠다. 사실 이건 즐거운 배신이다. 연애에 즐거운 배신 하나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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