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내 직업이 디자이너라고 소개하면, 늘 들어왔던 조언이 있다. 고객이 디자인을 수정해 달라고 말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당연히 고객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고 고용한 것이고, 그러려고 돈을 주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뒤에 항상 붙는 말이 있었다.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야.”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다.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요구대로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므로 고객의 요구가 우선이고, 정해진 마감기한이 있다. 조금 더 완벽하게 하고자 마냥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아주 간단하고 빠르게, 그러나 센스 있고 예쁘게. 마치 골든타임이라도 존재하듯이. 디자인 비용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잘하고 싶은 욕심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투자하는 순간, 손해가 된다.
작가는 본인 특유의 분위기와 색깔이 뚜렷하지만, 디자이너는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게 다양한 색깔을 낼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내가 좋아하고 더 잘하는 스타일이 있겠지만, 디자이너의 취향은 고집이 될 뿐이다. 나는 알록달록 재미있는 디자인을 좋아하고 더 잘할 수 있지만, 고객이 원하면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나 화려하고 눈에 잘 띄는 디자인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색상과 원하는 무드가 있어도, 고객들이 원하지 않으면 그 색은 아마 써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도 없고, 고객이 원하면 모두 바꿔야 한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디자이너는 그저 일러스트와 포토샵을 다룰 줄 아는 기술자일 뿐이라고 느껴질수록 디자인에 대한 흥미가 뚝뚝 떨어지고 회의감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이고 사람들이 원하는 깔끔하고 예쁘며 눈에 잘 띄는 디자인의 ’레시피'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눈에 잘 띄고 예쁜 디자인은 다 이유가 있다. 그 차이와 이유, 곧 그 디자인의 레시피를 아는 것이 디자이너의 영역이다. 그러나 때로는 고객이 디자인을 하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기술자가 된다. 그럴 때마다 디자인이라는 영역의 핸들은 레시피를 공부한 디자이너가 아닌 고객이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늘 내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하고 싶었고, 내가 그 핸들을 직접 잡고 싶었다. 하지만 고객이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면, 아무리 가고 싶지 않은 길이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작가가 아니라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디자이너인가, 일러스트레이터 기술자인가.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듣는 말이 있다.
"혹시 얼마나 걸릴까요?"
그동안 이 대답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저도 모르겠어요.”
디자이너도 은퇴했겠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얼마나 걸릴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때로는 3시간 만에 끝나기도 하고, 때로는 3일이 걸려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평균 작업시간이라고 하는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아무래도 나는 디자이너가 되기에는 글렀다. 평균적인 시간을 들여, 무난한 퀄리티의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는 참 어렵다. 시간이 보통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르겠고, 비용이 얼마 정도면 적당한지도 모르겠고, 디자이너의 업무영역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꽤 괜찮은 결과물이 나온다. 그렇게 매번 아슬아슬, 운이 좋게 잘 마무리가 된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나는 아직도 디자인이 뭔지 잘 모르겠다.
여러모로, 애초에 나는 디자이너가 될 수 없는 성격인 듯하다. 나는 혼자 있어야 집중이 잘 되는데, 업무 특성상 여러 사람과 협업하며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사람들의 말대로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꼭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무언가를 창작해 내고 직접 만드는 사람이라는 넓은 의미의 작가(作家)가 되고 싶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늘 작가라고 불렸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생기고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적어도 ”글자는 더 키워주시고 바탕은 다른 색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누군가 수정을 요구하지는 않으니, 나는 그걸로 됐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글을 써서 책을 먼저 내야 하는 건지, 꾸준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사람들에게 작가로 알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도대체 좋아하는 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 건지, 그렇게 될 때까지는 또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 건지. 많은 사람들의 조언처럼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준비하다가, 좋아하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퇴사를 해야 하는 건지. 몇몇 사람들처럼 과감히 퇴사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어떻게든 수입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작가로 인정받는 그 날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하는 건지. 어쩌면 반쪽짜리 삶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이 길을 걸어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디자인과 작가 그 사이 어디쯤일 거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