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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Oct 05. 2023

나는 늘 디자인이 싫다고 말하던 디자이너였다.

"그만두면 뭐 할 거야?"

"모르겠어요, 그런데 디자인은 안 하고 싶어요. 이제 디자이너는 그만두려고요.“


마지막 퇴사를 하기 전, 직장상사의 물음에 대한 나의 답변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 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우게 되었고,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는 가진 돈을 모두 끌어 모아서 덜컥 맥북을 구매했고, 아직 취업도 하지 않았는데 매달 2만 원씩을 결제하며 일러스트를 정기구독했다.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사용할 줄만 알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일러스트를 열어 빈 대지에서 패스파인더를 활용해 이런저런 도형을 만들어보거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가져와 펜툴로 따보기도 하면서 별로 하는 것도 없이 마냥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이 좋게 작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나의 디자이너 인생이 시작되었다. 가족끼리 운영하던 아주 작은 나의 첫 디자인 회사, 아주 잠깐 다녔던 웹디자인 회사, 다양한 디자인을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나의 두 번째 디자인 회사, 이제는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되었지만 정말 즐겁게 일했고 많은 추억을 안겨준 제주의 시골에 있는 마을기업까지. 이렇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신입이라고 말하기에는 길고, 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짧은 그런 애매한 시간이지만 이쯤에서 디자인을 그만둔 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디자인이 좋지만, 아무래도 디자인이 내 성격과 잘 맞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는 늘 사람들에게 디자인이 싫다고 말하던 디자이너였다.


디자인이 싫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은 정말 많았다. 불평을 조금 늘어놓자면, 나는 집중해서 혼자 조용히 일하고 싶은데 디자인 업무 특성상 여러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 하고 회의도 자주 해야 한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연락이 잘 되어야 하는데, 하필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다. 게다가 디자인은 늘 급하고 시간이 부족하다. '이 정도면 간단한 일이니까 금방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획안을 미루고 미루다가,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남았을 때 "미안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이거 먼저..."하면서 급하게 일을 넘겨준다. 그렇다고 마감기한이 아주 여유로운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만큼 더 오랜 기간 동안 연락을 계속 주고받아야 하며, 수정을 반복할 수 있는 시간과 횟수만 더 늘어날 뿐이다. 적당한 시간을 두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현실 감각이 조금 부족해서 치수나 시간 등을 잘 계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 정도 크기면 어떤가요?”, “시안은 얼마나 걸리나요?”였다. 그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람들은 디자이너인 나에게, 당신이 전문가니 알아서 해달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속 수정을 반복한다. 알고 보니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고, 말로 하지 않아도 내가 그 답을 눈치채고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못하는 것이 ‘대충하는 것’인데, 들어갈 내용도 다 보내주지 않았으면서 일단 대충 만들어서 초안으로 느낌만 먼저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외에도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내용을 마치 나에게 고민을 떠넘기듯 두서없이 쏟아내는 사람,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충 종이에 끄적여서 건네는 사람, 메일은 보낼 줄 모른다며 카톡으로 30개 이상의 사진을 묶지도 않고 보내는 사람, 전달할 내용을 메일과 카톡과 전화와 문자로 흩뿌려놔서 마치 형사처럼 단서를 찾아다니게 만드는 사람, 중간중간 새로운 생각이 나면 까먹기 전에 말해야 한다며 언제든지 연락해서 뜬금없이 키워드를 막 던지는 사람, 우리는 저녁 장사라서 밤늦게 오픈을 한다며 밤 12시가 넘어야만 연락이 되는 사람, “이 부분만 수정해 주세요.”라고 문자로 한 문장이면 끝날 말을 꼭 전화로 말하려 하고 굳이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시간을 빼앗는 사람, 시안에 대한 책임은 고객에게 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듣지 않더니 결과물을 보고 나서야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재작업을 요청하는 사람, 수정사항을 정리하지 않고 하나씩 말하는 사람, 내부적으로 회의를 하지 않고 서로 자기 말대로 해달라고 싸우는 사람들, 나도 디자인 조금 할 줄 안다며 쉽게 나의 영역에 침범하는 사람,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컴퓨터 앞에 같이 앉아서 자기가 말하는 대로 바로바로 수정해 달라고 공동작업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다. 일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생각해주지 않는 고객들을 만날때마다 디자인이 점점 더 싫어졌다.


또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는데 내 옆에 다가와서 “그거 어떻게 됐어?”하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흐름을 끊거나, 뒤에 서서 지켜보며 이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냐며 한 마디씩 건네거나, 아무 내용도 주지 않은 채 “곧 이거 해야 돼.”라고만 계속 말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이거 혹시 어디까지 됐어?”라고 묻거나, 일만 던져줘 놓고 들어갈 내용과 사진들은 내가 알아서 찾아보고 채워 넣으라거나, 새로운 업무를 지나가는 말로 던져주거나, 갑자기 이것부터 하라며 언제든지 업무의 순서를 뒤바꾸는 상사들도 그동안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었다. 내가 생각보다 예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였다. 사람들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사이가 정말 좋았고 나도 그들을 진심으로 대했지만, 단지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범위한 업무들이 늘 숙제처럼 밀려있는 느낌을 받는 것도 너무 싫었다. 디자인이 조금이라도 필요한 일은 전부 디자이너의 업무로 분류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다양한 디자인을 경험하게 되고, 디자인을 하기 전에 늘 공부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본 것은 좋았지만, 그것을 반복해서 계속할 이유는 없었다. 그 경험들은 내 인생에서 한 번씩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업무가 다양하다 보니 항상 ‘곧 해야 하는 일들’이 아주 작은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눈앞에 잔뜩 쌓여있었다."이거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날 때 해 줘!", "아, 맞다! 이것도 디자인이 들어가면 좋은데...," "여유 생기면 말해, 부탁할 게 있어! "등등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업무가 계속 추가되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사람들과의 소통이 두려워졌고,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리된 내용으로 메일이나 문자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싶어 했지만, 고객들은 늘 문자로는 설명이 어렵다며 꼭 통화를 하려 했고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거절을 하거나 사무적으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힘들다'가 아니라, '내 성격으로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감당하기 어렵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아무래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보다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하는 일이 맞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는 실수만 자꾸 생기고, 헷갈리고,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니 집에 와서는 녹초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작업을 하는 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끝도 없이 나올 것 같다. 어쨌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디자인이 싫은 이유는 이 외에도 정말 많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디자인이 싫은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 직업이 나랑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며 누구는 지금 적성에 맞아서 하고 있냐, 다들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지,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냐,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냐는 등의 말을 듣기 때문에 내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냥 디자인이 싫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이 너무 싫다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사실 내가 늘어놓은 불평들에 비해서,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고객들과 상사들은 디자이너인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해 주었다. 감사하다며 점심식사를 대접받기도 했고, 음료와 디저트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기프티콘을 보내주는 고객들도 있었다. 디자이너가 일을 정말 잘한다며 칭찬해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우리 회사를 소개해준 덕분에 상사에게 예쁨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해왔던 모든 직장 상사들도 우리 디자이너가 힘들지 않아야 한다며 배려해 주고, 커피나 간식을 챙겨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회사에 요청해서 제공해 주겠다며 업무 환경을 살펴주고, 가끔 도움을 요청하면 하던 일을 내려놓고 바로 달려와주고, 나의 고민들을 들어주며 재택근무로 전환해 준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순간들이 지금까지 나를 견디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디자이너를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퇴사한 후 아직까지도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따로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전 직장에서도, 전 전 직장에서도. 그리고 스무 살에 입사했던 첫 디자인 회사의 사장님과도 가끔씩 서로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상하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것도 사람들이었고, 나를 붙잡아 준 것도 사람들이었다.


내가 봐도 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늘 디자인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스스로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모르는 부분은 어떻게든 찾아보고 연구해서 해결해 낼 정도로 관심과 열정도 많았다. 광고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했을 때에는, 나의 영역은 아니지만 디자인과 관련된 인쇄장비를 다루거나, 현수막을 출력하고 미싱하고 각목을 끼워 끈을 묶는 일도 해보고, 심지어 시트지나 간판을 시공하는 현장까지도 따라가서 직접 경험해 보고 이를 참고해서 디자인 작업을 했었다. 게다가 직장 동료와 상사가 가지고 있던 ‘디자이너는 예민하고 까칠하다’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나는 상사에게도 고객들에게도 서비스업 종사자만큼이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디자인을 그만두겠다는 건지, 뭐가 적성에 안 맞다는 건지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네가 얼마나 디자인을 잘하고 적성에 맞는지’를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그렇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제 성격이 이를 견디지 못하겠다고, 담당해야 할 디자인 업무도 너무 광범위하고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일에 집중이 어렵고 또 여러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돌아오는 답변이 있었다.


"모든 일은 다 힘들고 장단점이 있어. 심지어 다른 일은 더 힘들 수도 있어."

"누구나 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 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나랑 안 맞는 직업인 게 아니야."


당연히 모든 직업에는 장단점이 존재하고, 내가 꿈꾸는 작가로서의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스트레스가 존재하고, 사람들과의 소통도 필요하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마다 이 정도면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가 있고 특히 취약한 부분이 있다. 나는 너무 힘든데 누군가에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있듯이,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어떤 스트레스가 나에게는 비교적 견딜만한 일이 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나도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고 즐거운 일인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늘 이 길이 맞는지 고민했다. 이 길이 분명히 맞다는 확신이 나에게는 없던 것이다. 세상에는 ‘힘들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좋아서 하는 건 아니지만 견딜만한 힘든 일’이 있고, ‘전혀 관심도 없는데 힘들기까지 한 일’이 있다. 나에게 디자인은 힘들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길이 정말 나의 길인지 고민해 볼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나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일했던 디자이너였고, 어느 순간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나 스스로를 무겁게 억누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아직까지도 나를 멈춰 서게 만들고 듣기만 해도 설렘을 주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그 이름 앞에서 오히려 두려움이 앞설까 그게 너무 두려웠다. 디자인이 싫다고 말한 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서 내민 방패였을 뿐, 나는 사실 디자인을 하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 마냥 좋아했던 디자인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취미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는 디자이너를 그만둔 것이지 디자인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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