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가라사대
또각또각. 또각또각. 귤 따는 소리입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어울려 조용하니 참 좋은 과수원에 일흔을 넘기신 아버님과 예순을 넘기신 어머님의 정겨운 말다툼 소리가 시작됩니다.
뭐, 일방적인 어머님의 잔소리 폭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알고 보면 어머님의 하소연 짙은 소리입니다. 이렇게 소과가 되도록 적과를 안 했다느니, 귤을 따지도 못하게 가지치기를 안 했다느니, 나무가 이렇게 높으면 어찌 귤을 따라는 말이냐며 불평 가득한 어머님의 혼잣말 폭격은 듣는 이 없이 허망하게 과수원을 가로지릅니다. 몇 년째 이어온 어머님의 하소연 소리는 이제, 귤밭에 왕왕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 같아요.
한 마디로 '나 힘드오'라는 말씀입니다.
매년 10월 중순이면 시작되는 어머님의 잔소리에 봄 여름 내 조용하던 귤밭이 시끌시끌해요. 또 시작이다 싶은 아버님은 이미 귀를 닫으셨고, 외로이 귤밭을 가로지르는 어머님의 잔소리는 애꿎은 귤들이 모두 먹습니다. 바짝바짝 마른 잔소리 먹고 새콤하게 잘 자란 귤은, 아버님의 느긋함으로 다시 달콤하게 자라요. 그리고, 난 그 귤에다 대고 주문을 외우죠.
'귤 하나에 백(bag) 하나, 또 귤 하나에 백 하나...'
또각또각또각.
또각또각또각.
그러다 보면 대롱대롱 많이도 달렸던 귤들이 순식간에 바구니에 담겨요. 귤 하나는 다 똑같지만, 머릿속을 지나는 백 하나는 모두가 다르니 기분까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저 하기 싫은 일에 보상을 바라는 미천한 중생일 뿐, 더 이상의 연민은 그만두시길 바라요.
아무래도 좋아요. 내 주문 덕에 귤까지 명품이 되나니, 오늘도 난 주문을 한참 외울 참이에요.
남들은 밭을 통째로 팔아 편하게 사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어머님의 불평은 7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싫으면 따지 말아요. 우리. 안 따면 아버지가 다른 일꾼들 데려다 따시겠지요."라며 불을 지펴요. 속에서 끓을 대로 끓은 어머님의 마음에 불을 지폈으니 되돌아오는 욕지거리는 모두 내 몫입니다.
어머님 고생의 9할이 우리 때문이란 걸 알아요. 알면서 내뱉는 내 입도 내 입이지만, 불붙은 어머님의 입에서 나오는 욕은 휘발유 부은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와우!
귤 농사를 시작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아버님 성함이 브랜드가 되어 제대로 된 값을 받기 시작한 건 우리가 제주로 내려온 그 해 즈음부터였다고 해요. 그전까지 귤농사에서 이문을 남겨보지 못했다는 시부모님은 우리가 내려온 그 해부터 다시 자식을 품은 부모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부모님은 손자 손녀까지 줄줄이 달고 온 자식을 위해 불끈 힘을 쥐셨던 모양이에요.
점심으로 떠먹는 순두부 한 숟갈에, 말 한마디 같이 떠 봅니다. "아버지, 내년부터는 그냥 밭떼기로 팔아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라는 말이 이런 거겠지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아버님의 표정 속에 꼿꼿한 의지가 보입니다.
'돈 없이는 안 된다.'
난 돈이라도 있고 없고, 찬이와의 시간으로 살아보겠노라 내려왔건만, 아버지는 그래도 돈이라 하십니다. 사람 사는 도리에는 돈 없인 안 된다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마음에 나는 가을 겨우내 귤을 땁니다. 조금만 도와드리고 요기까지만 하겠다 하는 날엔, 통장으로 돈이 들어왔어요.
의지를 돈에 팔아넘긴 나는 등 돌렸던 과수원 복판에 다시 섰어요. 또각또각. 또각또각. 이씨이씨. 이씨이씨. 이씨 종갓집에 시집을 와서 그런가 자꾸 이씨를 중얼거리게 되는 마법 같은 귤 밭이여~. 돈으로 나의 시간을 채울 거였다면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쳐 보지만, 그때마다 입금되는 돈의 마력에 난 다시 귤밭입니다. 사실 시부모님의 전술은 이미 보통이 아니셨어요. “이씨이씨” 대신 “백 하나 백 둘...”을 중얼거릴 수밖에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 귤 따는 처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1~2년은 며칠 도와드리자 싶어 신나게 귤을 땄고, 3~5년은 능숙해진 손놀림 뽐내기라도 하고 싶어 또 신나게 귤을 땄어요. 6년이 지나면서는 아버님 농사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찬이를 기르는 일에 대하여 부모님은 짐작을 하셨나 봐요. 당신의 자식 며느리가 찬이를 기르며 겪어야 할 어려움이 그것만이기를 바라셨던 거지요. 찬이를 기르는 어려움에 돈의 어려움까지 보태길 바라지 않았던 마음이었던 거예요.
이 순간, "지지리 시집 잘 간 년"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걸 보면, 복은 복입니다. 나도 모르는 이런 큰 버팀목이 내 뒤에 바로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말이죠.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되면 부모님 심중의 또 다른 의미를 알게 될진 알 수 없으나, 장애가정으로 살아가는 데 돈이란 땅으로 꺼져버릴지 모를 자존감을 위한 제2의 안전장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농사로, 사람 된 도리를 다 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의 구실은 하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