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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Feb 25. 2022

민감한 여행자

  한여름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S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전주에서 정오에 출발하여 두시 삼십분쯤 백무동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장터목 대피소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속해서 돌길이었고, 길옆으로는 계속해서 계곡이었다. 한참을 지나니 계곡은 사라지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꽤나 힘들다. 오랜만에 등산을 해서인지 허벅지의 근육이 땅긴다.


  일곱 시쯤 S는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바람이 쌩쌩 분다. 한여름인데도 추위가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일몰을 찍기 위해 제석봉에 올랐다. 꽤나 드라마틱한 형태의 구름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내려와 취사실에서 준비해 온 빵을 먹고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월간 山’ 같은 잡지들을 좀 훑어보다가, 소등 시간이 되어 알람을 맞추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빙 둘러 누웠다. 군대 내무반에서 각자 지정된 자리에 눕는 것과 비슷한 형태다. 소등하자마자 코를 고는 사람들이 꽤 있다. 정말이지 부럽기 그지없다. S는 민감해서 탈이다. 집에서도 자리에 누우면 삼사십 분 가량 뒤척이다가 잠이 드는 게 기본이다. 그러니 이런 낯선 곳에서야 잠이 쉽게 올 리가 없다.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기 위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함께 온 사람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다양한 화음을 연출하고, 어디 그뿐인가, 방귀 뀌는 사람, 이 가는 사람……. 제발, 잠아, 빨리 와라, 와……. 주문을 외우며 왼쪽으로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반듯이 누웠다가…….


  아…… 결국 S는 한 시간도 못 자고 이십 여분 정도 잠시 눈을 붙인 것 같다. 세 시 삼십 분, 휴대폰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취사실에서 빵을 조금 먹고 나서 손전등을 들고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까지 1.7킬로미터를 걷는다.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이 앞뒤로 줄을 잇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여명이 하늘에 빨간 선을 긋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 정상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일출을 볼 수 없었다. S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에 날이 훤히 밝았고, 천왕봉 정상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대부분이 등산하는 사람들이라서 금세 다른 장소를 향해 떠났다.


  S는 천왕봉에서 다시 제석봉을 거쳐 장터목 대피소로 왔다. 장터목에서 세석 대피소까지 3킬로미터 되는 길을 걸었고, 세석에서 백무동까지는 6.5킬로미터. 다리는 아프고, 배는 고프고…… 잠이라도 잘 잤으면 덜 피곤할 텐데……. 민감한 체질이 문제다. 대피소 같은 곳에서는 둔감한 게 제일이다. 


  민감함이 좋은 경우도 물론 많다. 남들은 별 감흥 없이 지나칠 것에서 날카로운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고, 예민한 감각으로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감함은 별 것 아닌 것에서 까다롭게 대응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선택의 상황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민감함과 둔감함을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S는 생각한다. 자,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은 집중력이 요구되니까 민감함으로 하자. 딸깍. 대피소에서 알람 시간에 깨어날 때까지는 푹 자는 게 좋으니까 둔감함으로 하자.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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