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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동짓날이었다. 열한 시를 넘어선 시각. 언제나 그렇듯 아내와 나는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문이 열리더니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검은 봉지를 손에 들고 계셨다.
“어, 할머니 오셨다.”
아내가 몹시 반가워하며 말했다.
“누구?”
“여름에…… 천일홍…….”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손님은 아니면서 들어오셔서 부부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던…….
아내가 주방에서 홀로 향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여보, 나와 봐!” 했다. 하필 또 바쁠 시간에 오셔서……. 탐탁지 않았지만 또 싸우게 될까봐 아무 대꾸 없이 홀로 나갔다.
탁자에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고, 화분에는 조그맣게 꽃을 피운 천일홍 세 송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여름에 가져가신 씨앗으로 이렇게 키우셨대.”
환하게 웃음 짓는 아내의 얼굴에는 감동이 묻어 있었다.
“베란다에 햇빛이 잘 드니까 애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거야.”
할머니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식탁 아래의 의자 하나를 끌어내며, “우선 여기 앉으세요.” 했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를 내려다보고 있기가 미안해서였다.
아내와 나는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귀한 씨앗을 선물 받았는데 내가 지닌 게 뭐 있어야지. 그래서 이렇게 키운 애들 중에서 하나를 가져온 거라오.”
“꼭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힘들게…….”
아내가 안쓰러운 눈빛을 내보였다.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가 화분을 봉지에 넣고 집에서 여기까지 들고 걸어오시는 게 머릿속에 떠오르자 나도 마음이 짠해졌다.
“힘들기는……. 그보다 봉지에 들고 왔더니 애들이 휘어졌네. 이걸 어쩌나…….”
할머니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꽃을 바라보았다.
“좀 있으면 금방 꼿꼿해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아내가 봉지에 눌린 천일홍을 손으로 받치며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동지잖우. 팥죽도 좀 먹고 싶어서 겸사겸사 이렇게 온 거라우. 포장도 되지요?”
“그럼요. 잠시만 앉아 계세요.”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쭈뼛쭈뼛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할머니에게 미안함과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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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 돌아가고 나서 주방 정리까지 마친 다음 나는 할머니가 주고 가신 화분을 선반에서 탁자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꽃대는 꼿꼿해져 있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백일홍(百日紅)도 아니고 천일홍(千日紅)이라니……. 아, 하고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꽃이 시들고 나서도 붉은 빛깔이 천 일 동안 유지된다는 뜻이구나. 2년 동안 줄곧 밭에서 집에서 식당에서 마주치던 꽃이었건만, 한 번도 주의 깊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꽃 이름이 왜 그러한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부끄러움이 빨갛게 일렁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쫓기듯 살아가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틀에 나를 끼워 맞췄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 톱니바퀴 같은 틀을 만들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건지도 모른다. 거기서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줄곧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삶의 틀, 그리고 생각의 틀이 협소해지는 느낌에 휩싸였다. 좀 더 크고 넓은 시야를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끔씩 그런 고민이 불쑥불쑥 치솟아 올라 딱딱한 가슴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 따끔거리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일상의 톱니바퀴에 짓눌려 금세 폐기처분되어 버리곤 하였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자연이란,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그 속성으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천일홍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남다른 무언가가 필요하겠지. 남다른 그 무엇이란…….
“뭐하고 있어? 집에 안 갈 거야?”
화장실에 다녀온 아내가 이어지던 내 생각의 꼬리를 싹둑 잘라냈다.
“천일홍의 뜻을 알아냈어. 천 일 동안 붉은 빛깔을 잃지 않는다!”
나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말하고 있었다.
“치이-. 그걸 이제 알았어?”
“나한테는 대단한 발견이야.” 나는 혼잣말하듯 얼버무렸다. 그리고 갑자기 솟아오른 생각을 망설임 없이 아내에게 건네었다. “내일 하루 쉴까?”
“왜? 내일이 무슨 날이야?”
아내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냥 잠시 일상에서 벗어난 하루를 만들고 싶어서.”
“별일이네.”
아내가 샐쭉 미소를 머금고 나를 쳐다보았다.
“가끔씩 별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