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머싯 몸
그의 말투 속에 어린 정체 모를 어떤 분위기 때문에 키티가 재빨리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딸을 약간 외면한 아버지의 얼굴에서 딸에게 자신의 눈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보였다. 키티는 최근에 남의 마음을 읽는 비범한 재주를 얻었다. 날마다 남편의 일상적인 말이나 무방비 상태의 몸짓에서 숨은 생각을 간파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 온 덕분이었다. 키티는 아버지가 딸에게서 숨기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것은 안도감, 영원한 안도감이었고, 그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착하고 성실한 남편으로서 그는 아내를 욕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내뱉은 적이 없었고 이제는 아내를 위해 슬픔에 젖어야 할 차례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요구된 것들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 그런 그가 상황이 어떻든 상처한 남편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본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순식간에 일어난 희미한 감정이라도 스스로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 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 중에서 -
후회 없이 사는 삶은 없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늘 주관에 따라 판단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매순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내 삶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시간이 흐르고 뼈아픈 후회에 잠겨서야 지나간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그런 과정이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그러나 성숙해진다고 해서 모든 게 술술 풀리진 않는다. 매순간 현재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늘 진행형이고, 진행형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보면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인간은 냉철한 이성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적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이성과 감각 사이에서 그네를 타며 살아간다.
머리는 차갑게 인식하면서도 가슴은 뜨겁게 타오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래서 아무리 강철 같은 인간도 어느 한 순간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
살아가면서 어떤 인간도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타인을 대한다면 후회할 일이 줄어들 것 같다.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잣대를, 타인에 대해서는 엄밀한 잣대를 들이댄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그것도 하나의 '투사'이다. 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그런 '투사'가 많은 사람일수록 소통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관계에 금이 갈 것이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후회뿐이다. 그러므로, 후회를 줄일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밀한 잣대를, 타인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제목 : 인생의 베일
지은이 : 서머싯 몸
옮긴이 : 황소연
펴낸곳 :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