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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ry

by 이룸


시는 죽었다. 오래된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물욕과 욕정과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주인공 양미자 씨는 시창작교실에서 '나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는 시간에 3살 때 언니가 자신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미자야!' 라고 부르던 기억을 말하며 운다. 어린 시절, 그 이후론 시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진 삶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손자인, 사춘기 소년의 삶의 모습이 곧 우리 시대 삶의 비시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먹고 난 다음 치울 줄도 모르고, 순간적인 쾌락에만 눈이 멀어 살고 있는. 사춘기 소년이 그렇게 사는 걸 그 소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소년은 이 시대의 습성에 고스란히 젖어 사는 것에 불과하다.


내 욕망을 우선 채우기에 급급하고,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아픔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면 돈으로 서둘러 해결하고 무마하려 드는 이 시대 사람들의 평범하고 보편적인 습성을 영화에 나오는 사춘기 소년들의 부모 세대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시를 쓴다는 것은, 시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멈추고 천천히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멈춘다는 것은, 천천히 생각한다는 것은 곧 뒤처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욕망에 쫓기는 삶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 그냥 휙휙 스쳐지나가는 관성적인 하루하루에서 벗어나 좀 더 관찰하고 좀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그냥 흘러가면 시는, 시적인 삶은 없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던 양미자 씨는 시를 쓰지 못한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양미자 씨는 비로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은 곧 내 욕망만을 투사하는 것이다. 시라는 것은 나만의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내 욕망의 투사에서 벗어나, 세상의 흐름이 부여한 관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나만의 관찰과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다.


영화의 뒷부분에 시창작교실에서 김용택 시인이 하는 말,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려운 거예요."

이 한 마디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물욕이,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지려면, 지금과 같은 삭막함에서 탈피하려면, 속도에 편승하려 애쓰는 삶에서 잠시 벗어난 순간이 필요하다.


시는 오래 전에 죽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의 시체는 우리들 마음속에 다 들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시 싹을 틀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그것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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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창동

출연 : 윤정희, 김자영, 이다윗, 김희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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