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변영주 감독이 만든 영화.
화차(火車)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나르는 불수레라는 뜻이다.
범죄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그렇듯이,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범죄자에 대한 증오보다 연민이 생긴다.
우리는 대개 타인의 표면만을 보고 판단하며 살아간다. 매체를 통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타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과연 그 사람의 몇 퍼센트나 알고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리하여 홍상수는 이것을 제목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가정 아래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살아간다. 욕망의 작용이다. 타인이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면 좋겠다는 심리가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그리하여 욕망과 욕망이 부딪친다.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된다. 권력이 약한 사람이 알아서 굽히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가 그런 면에서는 갈등이 적다. 신분제 사회가 아니더라도 조직체에서 위계서열이 엄격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문제가 된다. 서로가 우위를 점하려는 투쟁이 전개된다. 오해와 의심과 불신이 난무한다.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면 될 것 같지만, 간단해 보이는 이치가 실제로는 쉽지 않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나의 관심사가 아니면 흘려듣는 습성 속에서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존 단의 시 구절에서처럼 누구도 온전한 개체는 아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 속에서, 좀 더 넓게 보자면 사회 전체의 영향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 태어날 때부터의 모든 기억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의식보다 무의식의 작용이 더 큰 것처럼, 누구도 스스로에 대해 백 퍼센트 이해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받아들이며 살아야 갈등이 줄어든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번뇌와 갈등은 비롯한다.
타인의 삶을 깊이 알아갈수록 좋은 면보다는 안 좋은 면을 많이 보게 된다. 서로가 자신의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수록 배신감이나 환멸감 같은 것에 사로잡힐 여지가 많이 생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들여다보면, 남는 것은 연민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도 그와 같은 안 좋은 면이 있기 마련이므로.
진정한 예술, 그리고 진정한 삶은 이러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를 너그럽게 용인해야 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범죄는 그 크기에 맞게 단죄되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 앙심을 품고 범죄를 재발하는 일이 줄어들고, 그래야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감독 : 변영주
출연 : 김민희, 이선균, 조성하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