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쥴퓌 리바넬리
라라는 “이 시를 쓴 사람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에요!”라고 했다.
“그래, 모든 게 서서히 밝혀지는군. 자기 입으로 공산주의자의 계략이라고 실토하잖아.”
전 대통령은 조금씩 자신이 섬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고, 마치 경호원들에게 자기 앞에 있는 패배주의자 여성을 체포하라고 명령할 기세였다.
라라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공산주의가 나오기 몇 년 전에 죽었어요.”라고 했다.
“상관없어, 러시아인들에게는 항상 공산주의 정신이 존재했었어.”
그러고는 우리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일행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 쥴퓌 리바넬리, <마지막 섬> 중에서 -
1년 전에 이 책을 읽을 때에는 훌륭한 우화소설로 읽혔는데, 작금의 내란 사태 속에서 다시 읽으니 가슴 저미도록 현실을 잘 반영한 소설로 읽힌다. 독재자의 속성과 독재 정치의 양상이 어느 사회에서나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평화로운 섬에 어느 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가 사임한 사람이 들어온다. 전 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하고 운영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섬을 자신의 명령과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세계로 바꾸어 나간다.
자신의 손녀가 갈매기에 쫓겨 달아나다가 넘어져 다치자, “문명인은 자연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며 갈매기 소탕 작전을 벌인다. 섬의 주인을 포섭한 그는 주민들에게 쫓겨날 수 있다는 협박을 하고, 섬을 관광지로 개발하여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회유도 한다. 처음에는 그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던 주민들이 점차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
알을 보호하는 걸 포기하고 섬의 서쪽으로 날아갔던 갈매기들이 며칠 뒤 공격을 감행한다. 돌을 물고 와 사람들 집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몸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 내기도 한다. 전 대통령은 갈매기들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참호를 만든 다음 갈매기들을 쏘게 하는 한편 갈매기의 알을 훔쳐 먹을 여우들을 섬으로 데려온다.
여우들이 많아지자, 뱀을 사냥하는 갈매기가 줄어들면서 늘어난 뱀들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상황이 된다. 이에 전 대통령은 뱀을 퇴치하기 위해 육지에서 전문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여우의 개체 수를 줄여 생태계의 균형을 찾겠다며 여우 소탕 작전을 벌이기도 한다. ……
이 소설은 터키에서 일어난 두 번의 군사 쿠데타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국민적 저항은 미약했고, 그래서인지 소설이 비극적으로 끝맺는다.
소설 뒤에 ‘작가와의 질의응답’이 있는데, “정말로 민주적인 권력이 되려면, 다수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권력 분립이 완벽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이 개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자면, 사법부가 처참한 상황에 처했는데 정권을 누가 견제한단 말입니까!” 하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2025년 3월,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정치적 입김에 영향 받아 법을 농락하며 내란수괴를 풀어준 판사와 검찰, 역시나 정치적 입김에 흔들리는 재판관이 있어서 명백한 탄핵 사유에 대한 결정을 미루며 나라의 혼란을 키우고 있는 헌법재판소…….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공격 대상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무슨 짓이든 벌이는 독재자,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며 진실에는 눈을 감는 수하들, 교활한 선동에 넘어가거나 휩쓸려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로 인해 갈수록 혼돈으로 치닫는 사태의 양상에 이르기까지 2025년 대한민국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많은 소설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에서는(그리고 터키의 역사에서는) 다수가 독재자의 계략에 빠져들거나 침묵하고 소수만 저항했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다수가 불의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저항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서는 섬이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어처구니없는 자들에 의해 폐허로 될 뻔한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목 : 마지막 섬
지은이 : 쥴퓌 리바넬리
옮긴이 : 오진혁
펴낸곳 : 호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