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랑 #2

by 이룸


그날 이후 커피숍에서 얼굴을 보게 되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씩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라고 여자가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대화를 통해 여자가 30대 후반의 나이에 미혼이며 커피숍 근방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얼굴만 알던 시절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안쪽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사장이 바쁘지 않을 땐 언니라고 부르며 사장과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테이블이 여섯 개밖에 되지 않는 작은 커피숍인지라 출입문 옆의 자리에 앉는 나에게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다.


대화를 통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이 최서영이라는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간호학원을 다녔고, 간호조무사로 일했다는 것, 의사와 사귀게 되었으나 배신을 당했다는 것, 간호조무사 일을 그만두고 공무원학원을 다니며 공무원 시험을 치렀으나 연거푸 낙방했다는 것, 공무원학원의 원장이 학원에서 경리로 일하게 해주었다는 것, 원장과 사귀게 되었는데 몇 년 뒤 다시 배신을 당했다는 것(어떻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일을 그만두고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고 지냈다는 것, 그러다가 백화점에서 옷가게 종업원으로 일했고, 지금은 숙녀복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대화를 통해 여자는 내 이름이 양기호이고 40대 후반에 미혼이라는 것,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책과 관련된 일을 찾다가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다니던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 다른 출판사를 알아보다가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는 것, 늘 자리에 앉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다 보니 운동 부족을 절감하게 되어서라는 것,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인력공사에 나가 주어지는 대로 이것저것 하며 지냈다는 것, 비가 오거나 일을 얻지 못한 날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것, 한동안은 목수 한 사람을 따라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다는 것, 안정적으로 일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으나 일이 끝나면 술을 마시며 목수의 말 상대가 되어주어야 했다는 것, 그래서 점점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 나만의 사업을 찾다가 택배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근데, 여자 만난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설마 여태껏 숫총각인 건 아니죠?”


말을 주고받은 사이가 된 지 3개월 정도 흘렀을 때 여자로부터 이런 말이 건너왔다. 나는 해시시 웃어 보였다.


“그건 아닌데…… 여자 사귄 지가 오래되어서…….”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자도 커피를 마시며 나를 주시하였다, 얘기를 계속하라는 눈빛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짝사랑했던 여자애를 대학교 내에서 만났어요.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죠. 처음엔 몰라보다가 몇 초 지나서 아, 하면서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그 앤 수의학과에 입학했고,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 독서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그때껏 교과서 말고는 거의 읽은 적이 없었는데, 다양한 책을 접하게 되었죠. 그러나 내 관심사는 오로지 그 애였어요. 그 애와 가까워지기 위해 책을 읽었고 모임에 참석했죠. 자주 만나다 보니 그 애도 나를 좋아하게 돼서…… 사귀게 된 거죠. 2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고, 1년 정도 지나 휴가를 나왔을 때 그 애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함께 지낼 땐 몰랐는데 거리가 주어지니 널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넌 내용 없이 공허한 책과 같다고 하더군요. 그땐 화가 나고 미쳐버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서는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를 하고 나서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모두 처음 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더라고요. 지금부터 제대로 읽자, 하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노력할 때 저는 책을 읽으며 출판사에 들어가려고 애썼어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책의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된 사랑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요.”


여자가 샐쭉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첫사랑의 기억은 오래 가나 보네요. 그럼 그때 이후로 만난 여자…… 없어요?”


“마흔이 코앞에 닥치면서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몇 명 만났는데……. 첫 번째 여자는 직업이 좀 그렇다고 했고, 두 번째 여자는 외모를 보고 실망한 것 같았고, 세 번째 여자는 나를 마음에 들어해서 몇 번 만났는데, 말이 너무 많았어요. 친구 얘기하다가 연예인 얘기하다가 영화 얘기하다가……. 전화가 계속 왔지만 받지 않았어요. 그때 이후로 자연스러운 만남을 꿈꾸었는데…… 그런 채로 시간이 흐르고 나이만 먹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여자도 말없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내에서는 잔나비의 노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출입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 후 테이크아웃하여 나갔다. 그때, 지금이 결정적 순간이다, 하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저기…….” 몸을 앞으로 숙이며 사장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나는 입을 열었다. 여자가 창밖으로 향했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날도 좋은데 잠시…… 뒤에 있는 공원에서 산책이나 할까요?”


“그럴…… 까요?”


여자가 생긋 미소 지었다. (#3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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