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랑 #3

by 이룸


완연한 봄 날씨였다. 매화와 산수유꽃, 목련, 동백꽃, 개나리에 이르기까지 눈 부신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있었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도 보였다. 여자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나는 고심했다. 그러나 따뜻한 봄기운에 압도되어서인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여자가 매화나무 앞으로 가더니 얼굴을 꽃에 가까이 가져가며 향기를 맡았다.


“다시 봄이 왔군요.”


무슨 말이든 꺼내야겠다는 압박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향기 좋아요.”


여자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향기를 맡고 싶어요, 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입으로는 꺼낼 수가 없었다. 좀 더 멋진 표현이 없을까, 고심하며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고양이는 잽싸게 도망쳤다.


봄은 고양이로다.


내 말에 여자가 “네?” 하고 반응했다. “봄이 왜 고양이에요?”


이장희 시인의 시 제목이에요.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밤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여자가 별 감흥 없이 듣더니 손으로 벤치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벤치에 앉았고, 나도 간격을 두고 앉았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거기까지 노래를 한 다음 여자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여자를 향해 미소를 내보였다. 그때, 더이상 머뭇거리면 안 돼, 하는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영 씨,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는 몸을 틀어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일 하면서도, 책을 읽다가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서영 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오늘 이렇게 용기를 내봅니다.”


좀 더 적합한 말은, 호소력 있는 말은 뭐가 있을까 나는 궁리했다.


“저도 고민했어요.”


궁리할 여지를 주지 않고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부터 기호 씨한테 괜히 말을 건 거 아니에요. 맘에 있으니까 말을 걸었죠. 연거푸 남자들한테 배신을 당한 이후로 한동안 남자들을 멀리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이는 들어가고……. 기호 씨 처음 보았을 때부터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건, 나보다 책을 더 사랑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얘기를 나눠 보니 책도 결국 첫사랑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저 남자랑 함께 살게 되면 외롭겠구나 싶더라고요. 물론 저 또한 책을 좋아한다면야 문제될 게 없겠지만, 저는 그렇지가 않으니…….”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연루’는 범죄와 관련된 표현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잘 몰라서 나온 말을 따져서 뭐하겠는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설마 책과 첫사랑과의 관계를 싸잡아서 범죄 행위로 여기는 건 아니겠지?


오늘부터 당장 책을 끊겠습니다, 책 읽을 시간에 일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벌겠습니다, 하는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꼭 그리 해야 한단 말인가, 하는 문장들이 그 뒤를 이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데이트 즐거웠어요.”


여자가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나도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여자가 공원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태양의 고도가 낮아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책이냐 사랑이냐, 결단을 내려야 해, 하는 문장이 머릿속에 크기를 키우며 굵은 글씨로 나타났다. 왜 내 인생은 책과 사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책과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일까. 이걸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나를 꼼짝 못 하게 붙들었다. 해가 지고 서늘한 기운이 몸에 끼쳐왔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끝)……(아니,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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