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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매혹의 예술가들 #5

by 이룸

찰스 부코스키[1920~1994]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대표 소설로는 『우체국』 『팩토텀』 『여자들』이 있는데, 모두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헨리 치나키스’가 등장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싸구려 일자리와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며 미국 전역을 유랑했던 경험은 『팩토텀』에, 우편배달부로 일한 경험은 『우체국』에, 마흔아홉 살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의 삶의 모습은 『여자들』에 담겨 있다.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음이 두 갈래로 분해된다.

한편으로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심오하게 딱딱하거나 곱게 다듬어지거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글들을 접하다가 부코스키의 소설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기분이 시원하다. 양념하고 조리한 음식으로서의 생선만 맛보다가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물고기의 파닥거림을 만져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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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의 소설엔 꾸밈이나 가식이 없다. 거침없이 솔직하게,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얼핏 생각하면 누구나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살아온 삶을 떠올리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나 이런 식으로 쓸 수는 없다. 웬만큼 낯이 두껍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도덕이나 윤리가 두껍게 장막을 치고 있게 마련이고, 그 장막을 걷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감추고 싶은 건 감추고 내보이고 싶은 것만 내보이는 위선적인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부코스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일부러 위악적으로 쓰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도덕 감정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 감정이라는 여과 장치 없이 술술 써내려간 부코스키의 글은 그래서 통쾌함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자유롭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지만 너무 막나간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그것을 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욕은 기본이고 남녀의 성기를 지칭하는 말이나 인종을 비하하는 말 등을 거침없이 써댄다. 특히나 페미니스트라면 부코스키를 좋아하기 힘들리라. ‘아가씨, 끝내주게 한 번 박아줄 수 있는데’ 같은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써 갈긴다. 타자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거의 없으며, 간혹 있을 경우에도 자신의 기분이 내킬 때에 한해서이다.


그의 소설에 매혹되어 한참 읽다 보면 거부감이 고개를 쳐들어 책을 내려놓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잡아끄는 그의 글이 그리워지고 다시 책을 집어 든다. 매혹과 거부감, 두 갈래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면 선택해야 한다면 매혹을 선택하겠다.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고상한 사상서가 아니고 소설일 뿐이니까. 그리고 거부감이 드는 장면이 꽤 있긴 하지만, 나에게도 저런 면이 있지, 하고 생각하면 거부감이 줄어든다. 우리가 억누르거나 억누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 그는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드러내기. 그것이 부코스키의 소설이다. 인간이란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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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부코스키의 소설이 ‘재미’의 요소만 있는 건 아니다. ‘일깨움’의 요소도 크다. 데스먼드 모리스가 『인간 동물원』에서 설파했듯이 인간은 동물원의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 교육에 의해, 사회적 규범에 의해, 조직체의 방침에 의해 꼼짝없이 길들여진 우리는 ‘갇혀 있음’을 편리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야생성과 자유가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현재 누리고 있는 상태를 잃게 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과 두려움에 잡아먹히고 만다. 부코스키는 어떤 규범이나 권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부당하게 느껴지면 참지 않고 욕을 내뱉고, 그만 두라고 하면 즉각 그만두어 버린다. 언제나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야생마처럼 살아가려 한다. 부코스키의 소설에 끌리는 건 그래서이리라. 동물원에 있는 동물처럼, 새장 안의 새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술 마실 때만 잠시 야생적이 되는 우리들에게 야수 본능을 일깨우며 좀 더 자유로워지자고, 좀 더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자고 충동질하기 때문이리라.


그런 면에서 부코스키의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라는 ‘나’의 물음에 조르바는 “자유라는 거지!” 하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문명 세계에 침윤되어 딱딱하게 굳은 머리로 살아가는 ‘나’는 야생성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조르바를 만나 매혹되고 태초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신선한 활력을 얻는다. 다른 점이라면, 부코스키의 소설은 작가가 스스로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풀어낸 반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경우에는 지식인인 ‘나’가 자유인 조르바를 만나고 느낀 바를 글로 나타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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