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예술가들 #4
<세상의 모든 계절>이라는 영화를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동안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이다지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 얘기라는 느낌이 강해서 그럴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개의 소제목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순탄하게 살아가는 톰과 제리 부부와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톰의 친구 켄은 먹고 술 마시는 걸로 외로움을 풀며 사는, 그래서 배가 많이 나온 남자다. 톰의 형 로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를 사별하고 자식과도 좋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거의 시체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제리의 직장 동료인 메리는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다.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마음과 부합하는 남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화목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서글픔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다정다감한 부부와 연인들을 바라보며 처량한 표정을 짓는 메리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계절>의 감독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그의 작품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작품이 <비밀과 거짓말>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진실을 찾기 위한 용기가 삶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을 비밀로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건 거짓말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타인과의 투명한 관계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거리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싹트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감의 벽은 두꺼워지고 단단해진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듯 살아가지만 양심의 가책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비밀을 속 시원히 털어놓는 용기를 내서 진실과 직면하게 되면, 우선은 충격과 고통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과 관계를 얻기 위해서는 감수해야만 하는 충격과 고통이다. 비밀을 부여안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감독은 모리스의 입을 통해 외친다. “비밀과 거짓말. 우리 모두 고통 속에 있는데 왜 함께 나누면 안 되지?” 그리고 용기를 내어 진실과 맞닥뜨리게 한 홀텐스에게 속삭인다. “넌 진실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했어. 존경스러워.”
세 번째로 본 영화는 <해피 고 럭키>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극명한 대비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는 늘 밝은 표정을 지으며 살아가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비를 이룬다. 나이가 서른이지만 늘 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초등학교 교사 포피. 그에 병치되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서점의 남자,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채 논리적이지 못한 말을 중얼거리며 사는 거지꼴의 남자. 하지만 포피는 그들을 향해서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안겨주려 한다. 결혼한 여동생은 나이 서른인데도 아무 대책 없이 철부지처럼 살아간다고 언니를 나무란다. 그래도 포피는 화 내지 않고 웃음과 농담으로 대응한다.
이 영화의 압권은 포피와 운전면허 교습 강사 스캇의 만남이다. 스캇은 자신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원리원칙만을 내세우며,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살아간다. 교습을 진행하면서 스캇은 해맑은 표정의 포피를 속으로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포피가 남자친구와 키스하는 걸 목격하게 되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과격한 행동을 한다. 분노는 결국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영화는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후로 <베라 드레이크>와 <미스터 터너>를 보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마치 20대 때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 나서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에 연이어 빠져들었지만, <폴라 X>와 <홀리 모터스>를 보고는 큰 감흥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양상이었다.
레오스 카락스 영화에서는 내용 자체보다도 강렬한 감성적인 이미지에 전염된 바가 컸다. 마이크 리 영화에서는 내용 자체가 주는 울림이 크다. 인생의 쓰디쓴 면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통찰이 엿보인다. 나의 모습을, 지금은 아니더라도 한때 그러했던 모습을, 누구나 한 번쯤 그랬을 법한 인생의 씁쓸함을 바라보게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는, 한 마디로 ‘인생 영화’다. 미남, 미녀 배우를 쓰지 않아서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지고, 이미지에 홀리지 않고 온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이크 리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