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쉴 새 없이 마시고 쉴 새 없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말하는 사이사이에 고독과 절망의 기운이 훅 끼쳐왔고,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 또한 푹 가라앉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호탕함은 어쩌면 자신의 안에 깃든 고독감과 절망감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원만이, 그 친구는 이름 그대로 정말 원만한 성격이었소. 매사에 둥글둥글했지. 어떤 일을 하건 원만하게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였소.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그래서인 것 같소. 사업도 원만하게 굴러가고 있지 않소. 큰 모험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지. 지극히 현실적인 친구요. 안경만 해도 그렇지. 그 친구나 나나 안경을 쓰고 있지만, 그 친구는 근시고 난 원시요. 난 항상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소. 눈앞의 시시한 것들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지. 그러나 그 친구는 오직 눈앞만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갈 뿐 저 먼 곳엔 시선을 두지 않아. 어쩌면 지금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게 되어 있는가 보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그래서 근시사회라고 할 수 있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서라도 근시가 되어야 해.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흥, 그딴 성공 같은 건 진정한 성공이 아니지.”
독기 서린 눈빛으로 다시금 비약의 철학을 설파한 그가 꿀룩꿀룩 맥주를 넘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열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그가 말하지 않는 사이를 틈 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으면 또 무슨 얘기를 한정 없이 늘어놓을지 몰랐다.
그러자 그가 또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종업원을 불렀다. 나는 이번에는 서둘러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
“나이트에 갑시다!”
밖으로 나왔을 때 왕규가 비틀거리며 호기롭게 외쳤다. 웬 나이트?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아아, 돈 걱정은 마시고, 내가 다 낼 테니까.”
마치 오늘이 지나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그는 소리쳤다. 그러곤 바로 손을 들어 천천히 다가오던 택시를 잡았다.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트라니, 그것도 열일곱 살 많은 남자와 단둘이서…….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자, 어서!”
그가 택시의 뒷문을 열고 손을 치며 재촉했다. 나는 미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파라다이스 나이트클럽’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왕규는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함박웃음을 쏟아내며 싱글거렸다, 이제 드디어 원하는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운동장만한 공간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나이트가 없으면 이놈의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는 느낌들을 뿜어내고 있는 듯했다.
얼마 만에 오는 나이트인가 싶었다. 이십대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조명들, 고요함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쿵쾅쿵쾅 울려대는 음악소리, 몸에 들러붙어 있는 온갖 욕구불만과 괴로움들을 떨쳐 내기 위해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 낯설고 어색한 감정마저 마땅히 둘 곳 없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왕규는 입을 헤 벌린 채 춤추는 사람들의 물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낙원이야, 하고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나비넥타이를 매고 머리엔 스프레이를 잔뜩 바른 종업원이 다가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큰소리로 외치곤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왕규가 손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음 지었다.
“오늘은 일행도 계시네요?”
그러면서 종업원이 나에게도 구십 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나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형님을 위해 좋은 자리 마련해 놨습니다.”
종업원이 손짓을 하며 앞으로 향했고, 왕규와 나는 종업원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서 자리에 앉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음악소리가 온몸을 진동시켰고, 빛의 소용돌이가 혼을 모두 휩쓸어갔다. 종업원이 귓속말로 왕규에게 뭐라고 말하자, 왕규가 귓속말로 뭐라고 한 다음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건넸다. 그러자 종업원이 다시금 몸을 구십 도 각도로 꺾은 다음 사라졌다.
왕규가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활짝 웃음 짓는 얼굴로 뭐라고 말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들어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토테미즘이 꼭 원시부족만의 얘기는 아니구나, 싶었다. 다들 무언가를 향한 갈구의 몸짓으로 저렇듯 몸을 흔들어대는 것이리라. 그 무언가는 돈이 될 수도, 결혼이 될 수도, 권력이 될 수도…….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는 시, 또는 고려정신의 부활이 되겠고……. 그럼, 나는? 카프카? 이제 카프카는 끝났다. 그럼? ……나에게는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심란해졌다. 앞으로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지? 아, 그래서였구나. 난 왕규가 이끄는 대로 끝없이 술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내려놓고, 왕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왕규는 또 호탕하게 웃으며 종업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종업원이 다시 구십 도로 허리를 꺾고 나서 사라졌다. 나는 그와 나의 잔에 술을 따른 다음 벌컥벌컥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