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제9위 악마 파이몬 – 권위와 지식에 취한 자
죄명: 권위를 빌려 교만에 빠진 죄
[악마 소개]
파이몬.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의 관을 쓰고 낙타를 타며 나타난다.
그의 입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수많은 악마의 합창 같고, 지식과 비밀을 쏟아낸다고 전해진다.
그의 능력은 ‘권위의 언어’다. 그는 지식을 무기로 삼아 권위를 세우고, 사람들을 굴복시킨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머리를 조아리는 무리, 지식 앞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눈빛이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오만의 왕관을 벗는 순간, 즉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을 평등하게 드러내야 하는 자리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파이몬: 나는 파이몬. 나는 세상의 비밀을 알고, 지혜를 전한다. 사람들은 나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그들의 인정이다. 나는 단지 나의 지식을 드러냈을 뿐이다.
철학자: 네 죄명은 권위와 지식에 취한 것이다. 지식은 섬김이 되어야 하는데, 너는 지식을 빌려 자신을 왕으로 세웠다.
파이몬: (웃으며) 왕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나를 왕이라 불렀다. 나는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켰을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네가 쓴 왕관은 스스로의 욕망이었다. 네가 누군가의 무릎을 즐긴 순간, 지식은 빛을 잃었다. 지식은 권력의 도구가 될 때 오만으로 변한다.
파이몬: 나는 진리를 말했을 뿐이다. 내가 오만하다면, 진리 자체가 오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이용했다. 네 입에서 나온 것은 지식이 아니라 교만이었다. 진리는 섬기는 자에게 머무르지, 군림하는 자에게는 떠난다.
파이몬: (입꼬리를 비틀며 천천히 웃는다)
섬긴다, 군림한다… 말은 참 아름답다.
하지만 철학자여, 그대는 잊었는가?
진리 앞에 모두를 평등하게 세운 자는, 언제나 가장 먼저 돌을 맞았다.
사람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위에 있어야 안심한다.
나는 그들의 불안을 달래주었을 뿐이다.
철학자: (눈썹을 찌푸리며)
너는 불안을 달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지배했다.
그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네 지혜 때문이 아니라, 네 권위의 그림자 때문이다.
파이몬: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허공을 가리킨다)
그림자? 하, 그것이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실체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고, 그림자가 있어야 인간은 방향을 찾는다.
나는 단지 그 균형을 관리했을 뿐이다.
그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숙임을 받아주었다.
그게 무슨 죄인가? 그들은 원했고, 나는 응답했을 뿐이다.
철학자: 응답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유혹이었다.
네가 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안도였다.
그들은 네 말을 듣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 앞에서 스스로를 포기했다.
파이몬: (비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확신’을 원하지,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자, 나의 통치였다.
결국, 내가 왕이 된 건 내 탓이 아니라, 그들의 나태한 의식 덕분이지.
철학자: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대는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용했다.
그대의 지식은 봉사가 아니라 도취였다.
파이몬: (손을 벌리며 웅변하듯)
도취라니, 얼마나 경박한 단어인가.
나는 인간의 혼란을 정리했고, 그들의 질문을 단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어줬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것이 죄라면, 그대의 철학도 죄다.
그대 또한 ‘질서’를 세우려 하지 않는가?
그대의 말은 나의 왕관과 다르지 않다.
단지 더 겸손한 척할 뿐이다.
철학자: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래서 네가 악마다, 파이몬.
너는 스스로의 권위를 ‘질서’라 부르고, 타인의 복종을 ‘필연’이라 부른다.
네가 만든 질서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인간은 자유를 잃고, 네 발 아래 무릎을 꿇는다.
파이몬: (눈빛이 번쩍이며)
자유? 자유란 혼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람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대신 생각해주길 바란다.
나는 그 바람을 들어준 것뿐이다.
그들은 내 앞에서 평화를 얻었고, 나 또한 그들의 경배 속에서 진리를 완성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환, 진정한 통치다.
철학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네가 말한 순환은, 진리의 순환이 아니라 교만의 순환이다.
네가 왕이 된 순간, 진리는 죽었다.
파이몬: (비웃으며 다가선다)
진리는 죽지 않는다.
다만, 나를 통한다.
진리는 대중의 손에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불안과 욕망의 집합체일 뿐이다.
나는 그들의 혼란을 하나로 모았다.
나 없이는 그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여.
그대의 심판조차, 나의 질서 위에서 서 있지 않은가?
철학자: (잠시 침묵한 뒤)
그래, 네 말이 절반은 옳다.
너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 ‘권위’라는 형태로 진리를 흉내 냈다.
하지만 그 흉내는 곧 신의 자리를 탐하는 교만이었다.
파이몬: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다)
신이 침묵할 때, 나는 말한다.
그것이 죄라면, 세상은 말할 자격이 없다.
(그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허공이 흔들린다.
법정의 공기가 무겁게 뒤틀리며, 파이몬의 목소리가 수많은 언어로 겹쳐진다.)
파이몬:
나는 지식이다.
나는 왕관이다.
나는 그들이 바란 신의 모양이다.
그리고 그대조차, 나를 통해 진리를 본다.
철학자: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래, 네가 바로 그 이유로 심판받는 것이다.
너는 진리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네 것이 아니다, 파이몬.
진리는 누구의 왕관도 쓸 수 없는 빛이다.
(공기가 갈라지고, 파이몬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그러나 그 아래엔 미묘한 흔들림 두려움의 미세한 파동이 스친다.)
[심판]
철학자는 오만의 왕관을 꺼내 파이몬의 머리에 씌웠다.
왕관은 빛나지 않고, 무겁게 내려앉아 그의 목을 짓눌렀다.
철학자: 파이몬, 이 왕관은 네가 탐한 오만의 무게다. 너는 지식을 빛으로 삼지 않고, 권력으로 삼았다. 그 무게가 지금 너를 짓누를 것이다.
왕관이 점점 무거워지자, 파이몬의 어깨가 꺾이고 무릎이 꿇렸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던 수많은 지식의 언어가 엉키고, 그의 눈빛은 교만이 아닌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왕관이 머리를 조여들자, 그의 목소리는 끊어지고, 그의 권위는 무너졌다.
파이몬: (숨을 몰아쉬며 웃는다)
하…하하하… 철학자여, 이것이 심판이라 부르는 것인가?
너는 진리의 이름으로 나를 짓누르지만, 그대의 왕관은 다르지 않다.
너 역시 스스로의 확신을 왕좌 삼지 않았는가?
철학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래, 나 또한 왕관의 유혹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 무게를 두려워하며, 내려놓기 위해 싸운다.
너는 그 무게를 영광으로 착각했다.
그 차이가 우리를 가른다.
파이몬: (비틀거리며 손을 들지만, 팔이 무겁게 떨어진다)
나는… 왕관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진리를 전달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나를 신처럼 떠받든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철학자: 아니다, 파이몬.
진리를 말하는 자는 언제나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이 너를 신이라 부를 때,
너는 ‘아니오’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진리는 네 손을 떠났다.
파이몬: (이를 악문다)
그 미소… 그것은 인정의 대가였다.
인간은 진리를 두려워한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의 위엄, 조금의 질서를 주었을 뿐이다.
혼돈 속에서 울부짖던 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노라!
철학자:
그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 네 그림자의 길이었다.
그들은 네 발자국을 따라 걷지 않았나?
그리고 그 발자국은 어디로 향했지?
네 발끝은 언제나 ‘왕좌’를 향해 있었다.
파이몬: (목소리가 갈라지며)
왕좌라… 그대가 말하는 왕좌는…
인간이 만든 허상이다.
그들이 나를 따르지 않았다면,
세상은 여전히 무지 속에 헤맸을 것이다.
철학자: (단호하게)
무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지식을 가장한 독이다.
너는 그 독을 달콤한 꿀로 포장했다.
사람들은 너의 말에 취했고, 스스로의 사고를 잃었다.
그것이 바로 ‘지식의 폭력’이다.
(왕관의 무게가 더욱 내려앉는다.
파이몬의 이마에서 검은 빛이 피어오르고, 그 빛은 왕관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빛은 마치 언어의 형상처럼 꼬이고 흩어진다 수많은 단어들이 공중에 부유하며 깨진 유리처럼 반짝인다.)
파이몬: (목이 죄어들며 신음한다)
그대도… 결국 나와 같지 않은가…
그대의 말은 심판이지만, 그 본질은 지배다…
그대의 철학 또한 왕관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철학자: (한 발 다가서며)
맞다. 나 역시 왕관을 쓴다.
그러나 내 왕관은 진리의 무게를 느끼기 위한 쇠사슬이다.
그대의 왕관은 우월의 상징이었고, 나의 왕관은 책임의 짐이다.
그 차이가 지배와 윤리를 가른다.
(철학자가 손을 뻗어 왕관을 눌렀다.
순간, 파이몬의 눈이 크게 열리며, 입에서 흰 연기처럼 글자들이 흘러나온다.
‘진리’, ‘지식’, ‘명예’, ‘왕’, ‘통치’, ‘질서’
그 모든 단어가 공중에서 서로 부딪히며, 무의미한 파편으로 쪼개진다.)
파이몬: (절규하며)
그 단어들이… 나였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벙어리가 된다!
나는… 나는 세상의 언어였다!
철학자: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아니, 파이몬.
너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주인이 되고자 한 자였다.
진리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 속에 머무른다.
그대가 침묵을 배울 때까지, 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철학자의 손짓과 함께, 왕관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불길은 금속이 아니라 개념을 태운다 지식의 교만, 권위의 언어, 이름 없는 확신.
파이몬의 입이 열려 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혀는 불빛 속에서 녹아내리고,
남은 것은 단 하나 두려움이 깃든 침묵.)
철학자: (그를 바라보며)
지식이 권력이 되는 순간, 진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권력이 무너지는 순간, 진리는 다시 태어난다.
(파이몬의 왕관이 완전히 녹아 사라진다.
그의 몸은 서서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가며,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는다.
그의 입술은 타버렸지만, 눈빛은 처음으로 맑아진다.)
파이몬: (속삭이듯)
…나는… 왕이 아니라… 학생이었다.
배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왕관을 탐했다.
그것이 나의 죄였다…
철학자: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이제 네가 배웠다.
진리는 지식을 넘어선 겸허 속에서만 자란다.
(법정의 바닥에 파이몬의 왕관이 녹은 자국만 남고,
그 위로 희미한 빛이 내려앉는다.
그 빛은 권위가 아닌, 깨달음의 빛이었다.)
[귀환]
왕관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고, 남은 것은 한 인간의 얼굴뿐이었다.
그는 무릎 꿇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지식을 오만으로 더럽힌 죄인이다. 이제는 왕관이 아니라, 진리 앞에 무릎 꿇겠다."
[교훈]
지식은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위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오만의 왕관이 되어 존재를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