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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위 악마 바르바토스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8위 악마 바르바토스 – 말뿐인 연민

죄명: 말로만 연민을 가장한 죄

[악마 소개]
바르바토스.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활과 화살을 든 사냥꾼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숲 속에서 짐승과 새들의 소리를 이해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채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고, 대신 연민의 언어만을 뿌려 위로하는 척한다.
그의 능력은 ‘공허한 동정’이다. 그는 말로만 위로를 늘어놓으며, 진정한 도움을 미룬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연민을 흉내 내는 순간, 사람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사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위선의 거울이다. 그 거울은 그의 말과 행동의 괴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바르바토스: 나는 바르바토스. 나는 짐승의 울음과 새의 노래를 듣는다. 나는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애도하고, 말로 위로했다. 그것이 어찌 죄인가.

철학자: 네 죄명은 말뿐인 연민이다. 너는 고통을 알았으나 행동하지 않았다. 네 위로는 따뜻해 보였으나, 실은 공허한 거짓이었다.

바르바토스: (비웃으며) 하지만 사람들은 말로도 위로받는다. 때로는 한마디가 상처를 치유한다.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돕고 있었을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네 말은 치유가 아니라 기만이었다. 말은 행동 위에 있을 때 힘을 가지지만, 행동 없는 말은 가벼운 먼지일 뿐이다. 네가 건넨 연민은 상대를 살린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위선을 꾸민 장식이었다.

바르바토스: 나는 적어도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철학자: 알았으나 행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죄다. 진정한 연민은 손을 내미는 것이지, 입술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다.

바르바토스: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행동이라… 그대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
손을 내밀라, 발로 움직이라.
그러나 나는 안다. 사람들은 실제로 손을 내미는 자보다,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자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철학자: (눈썹을 찌푸리며)
그 사랑은 위안이 아니라 도피다.
그들은 네 말에 기대어 안심했을 뿐,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바르바토스: (혀끝을 다소 비꼬며)
그렇다면 그들의 안심은 죄인가?
나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 자에게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 말이 잠시라도 숨을 돌리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철학자: 충분하지 않다.
그 순간의 위로는 네 위선을 합리화한 대가일 뿐이다.
너는 고통을 덜어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침묵을 이용해 ‘좋은 자’로 남았을 뿐이다.

바르바토스: (미소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래, 나는 좋은 자로 보이고 싶었다.
연민을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환영받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따뜻한 자”라 불렀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말했고,
말로써 더 깊은 자처럼 보였다.

철학자: (천천히 걸으며 그의 주위를 돈다)
그러나 그 말 속에 실린 것은 연민이 아니라,
인정 욕망이었다.
너는 고통을 구경하며, ‘공감’이라는 이름의 왕좌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네가 구한 건 인간이 아니라, 너 자신의 이미지였다.

바르바토스: (입가에 미소를 되살리며)
아름답지 않은가?
사람들은 나의 언어를 통해 자기 상처를 미화했다.
그들은 나를 통해 울 수 있었고,
나는 그들의 눈물 속에서 내 존재를 확인했다.
내 말이 없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있었을 것이다.
내 위선이 세상을 덜 고요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조차 악인가?

철학자: (목소리가 낮아진다)
악이다.
왜냐하면 그 고요를 깬 건 진실이 아니라,
네 거짓된 울림이었기 때문이다.
네 말은 촛불이 아니라, 안개였다.
잠시 따뜻했으나, 곧 시야를 가렸다.

바르바토스: (고개를 젖히며 웃는다)
안개라도 좋지 않은가?
안개 속에서는 아무도 추하지 않다.
그들은 상처를 숨기고, 나는 위로를 연기한다.
모두가 서로의 거짓에 기대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이 사랑하는 연민의 형태 아닌가?

철학자: (차갑게 답한다)
그대의 연민은 가면무도회의 음악이었다.
슬픔을 춤으로 포장하고, 위로를 화장으로 덮었다.
그러나 그 무도회가 끝나면,
모두는 여전히 혼자였다.
그대의 연민은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다만 고통을 보기 좋게 장식했을 뿐이다.

바르바토스: (잠시 침묵 후, 낮은 미소)
그대도 결국, 그 무도회에 참석한 자 중 하나였다면?
그대의 철학 역시 말로만 세상을 고치는 환상 아니던가?
그대가 나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철학자여?

철학자: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말로 세상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말로 세상을 드러낸다.
그대는 말로 세상을 가렸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혀는 다시 거짓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바르바토스: (피식 웃으며 입가의 피를 훔친다)
거짓이라도… 세상을 덜 외롭게 만든다면,
그것도 죄인가?

철학자:
거짓으로 위로받는 자는,
언젠가 진실 앞에서 다시 무너진다.
그대의 연민은 그 무너짐을 늦춘 죄다.
결국, 고통을 지연시킨 자.
그것이 네 이름이다, 바르바토스.

(법정의 공기가 식어간다.
바르바토스의 눈빛에서 연민의 온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싸늘한 자기연민이 대신한다.)

[심판]
철학자는 위선의 거울을 꺼내 바르바토스 앞에 세웠다.
거울 속에는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얼굴은 점점 갈라지며 두 개로 나뉘었다.
하나는 연민의 말을 늘어놓는 얼굴, 다른 하나는 차갑게 방관하는 얼굴이었다.

철학자: 바르바토스, 이 거울은 네 위선의 두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네가 말로만 꾸민 연민은 거짓의 무늬일 뿐이다.

거울 속 두 얼굴은 서로 비난하며 울부짖었다.
결국 깨진 거울 조각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그의 입술을 찢고, 그의 혀를 꿰뚫었다.
말뿐인 연민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철학자: (조용히 거울 조각을 바라보며)
바르바토스, 너는 끝까지 ‘말’을 믿었다.
말이 사람을 구하고, 말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너의 말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제단 위에 놓인 향에 불과했다.
연민의 냄새를 풍기며, 타인의 고통을 장식했다.

(거울의 금이 더 깊어진다.
두 얼굴이 서로를 향해 비명을 지르며, 각자의 혀를 잡아당긴다.)

왼쪽 얼굴: 나는 그들을 위로했어!
오른쪽 얼굴: 너는 그들을 방치했어!
왼쪽 얼굴: 나는 이해했어!
오른쪽 얼굴: 너는 즐겼어!

(두 얼굴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거울은 더욱 파열된다.
파편이 공중에 흩날리며 법정의 빛을 부수듯 번쩍인다.)

철학자: (창백한 목소리로)
위선이란, 진심보다 강한 믿음이다.
너는 자신이 ‘착하다’는 신념 속에 살았다.
그 신념은 너를 고통의 동반자라 착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는 고통과 함께 걷지 않았다.
너는 그 곁을 맴돌며, 그 모습을 소비했을 뿐이다.

바르바토스: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리며 웃는다)
신념이라… 그래, 나는 믿었다.
내 말이 사람을 살린다고,
내 눈물이 누군가의 구원이 된다고.
그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의 착함을 믿고 싶었다.

철학자:
그 믿음이 너를 가뒀다.
진짜 연민은 자신을 잊을 때 싹트지만,
너의 연민은 늘 ‘너 자신’을 중심으로 돌았다.
너는 남의 고통을 위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은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고통을 이용했다.

바르바토스: (웃음을 멈추며 눈을 치켜뜬다)
그럼 너는?
너는 나를 심판하면서, 스스로의 정의를 확인하지 않나?
그대의 신념 또한 연민의 또 다른 위선 아니던가?

철학자: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래, 나도 나의 신념에 갇혀 있다.
하지만 나의 신념은 너의 것과 다르다.
나는 진리를 위해 내 신념을 부수려 하고,
너는 위로를 위해 네 신념을 지키려 했다.
그 차이가 인간을 살리고, 너를 죽인다.

(철학자가 손을 들자, 거울의 파편이 하나둘 떠올라 바르바토스를 감싼다.
그 파편 속에서 수많은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속삭인다.)

“괜찮아.”
“힘내.”
“나는 널 이해해.”
“그래도 네 탓은 아니야.”

(그 수백 개의 위로가 동시에 터져 나오며, 법정을 메운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점점 무겁게 늘어지고, 이내 끈적한 침묵으로 변한다.)

철학자: (마지막 말을 던진다)
진실은 언제나 침묵의 형태로 남는다.
그대의 말은 소리였으나, 진리는 언제나 그 소리를 가른다.
이제 네 혀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듣게 될 것이다.

(철학자가 손짓하자, 떠 있던 거울 조각들이 천천히 바르바토스의 몸에 스며든다.
그의 살결은 유리처럼 투명해지고, 안에서 수백 개의 입이 꿈틀거린다.)

바르바토스: (마지막 남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여전히… 듣고 있다…
그들의 고통을… 그들의 울음을…

철학자: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제, 네 연민은 네 안에서 썩을 것이다.

(그 순간, 바르바토스의 몸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진다.
공기 중에 남은 것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연민의 메아리뿐이었다.)

(법정의 불빛이 꺼지고, 철학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신념에 취한 연민은, 결국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귀환]
거울이 산산조각 나자, 남은 것은 말 없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낮게 말했다.
"나는 연민을 가장한 죄인이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민을 보이겠다."


[교훈]
행동 없는 연민은 공허한 위선이다.

진정한 연민은 손을 내미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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