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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Nov 02. 2018

극복해야 할 것이 없다 <청설>

이번에 본 영화도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설'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다. 단어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설마 '푸른 눈(靑雪)'을 뜻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푸른 바다의 전설 같은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도저히 한국어 어휘는 아닌 것 같아서 알 수 없는데 시원하게 튀는 느낌은 좋다. 혹시나 하고 보니 영화 포스터에서도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대만 원산지인 영화이기 때문에 으레 한자어일 것이란 생각은 하지만, 어림짐작 만으로는 정확하게 꿰뚫을 수 없다.


영화 오프닝 타이틀이 뜨고서야 알았다. '청설'은 '들을 청'과 '이야기설'의 합성어라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듣다'라는 단어를 한국식 한자 읽기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딱히 감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이 제목 덕분에(대만의 수많은 청춘영화가 얼마나 '청춘력'이 과잉인지는 이미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관객은 단편적으로만 감성에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그리고 '듣는다'는 행동에 집중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영화의 제목은 한국 관람객 입장에서는 영화와 딱 결합되지는 않는 모양새이다. 주인공에 이입된 관객들이 대리적으로 무엇을 듣고 느낄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감성적으로 아주 달달하게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럼 대체 <청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하는 의문만 크게 남는다. 뭔가 문화 차이가 있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 영화 <청설>은 두 가지 메인 소재를 가지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불성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설>은 '듣는다'는 행위를 소재로 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듣는 행위를 포함하여,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이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듣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 진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 사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런 청춘영화에 이런 교훈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가? 상대방의 달콤한 말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대단한 능력이나 배경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 사람이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자 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 주인공은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말이 아닌 수화로 줄곧 그녀와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 (오해이기는 하지만) 여자 주인공 역시 남자 주인공이 말을 못 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청설>은 이러한 '폴 인 러브'의 시작과 전개는 매우 성실하게 좇아가면서도, 그 이후로 주인공들이 주변과 사회의 수많은 방해와 고난을 딛고 사랑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는 거의 힘을 싣지 않는다. 그럴만한 동기를 찾지 못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한 생활적인 불편함, 혹은 사랑을 전달하는 데의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들은 상당한 초 미남 미녀이고, 자신감이 결핍되지도 않았으며,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때때로 시련은 있지만) 무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사랑하기 위한 운명적인 스펙터클이 끼어들기가 참 애매하다. 사실 그래서 이 영화는 초반까지만 열심히 만든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그러려니 싶은 행복한 결말까지도 환호성이 터지지 않는다. 단지 남녀 주인공이 예쁘고 잘생겨서 본다면 만점을 줄 수 있겠지만 그 밖의 부분들에 있어서는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도 잘 알 수가 없고 애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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