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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an 28. 2017

매기스 플랜

아마도 관객 대부분은 예상하고 있겠지만 이 영화는 아주 행복한 결말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결말까지 오기 위한 영화의 흐름 자체도 어떤 강제된 합의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 사람 이상의 남녀가 얽힌, 그러니까 싱글맘이 되고 싶은 싱글 여성, 정자를 기증해준다는 친구, 그런데 유부남과 급 결혼, 재결합하고 싶은 전처, 결국 재결합이라는 험난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조화롭게 합의가 되고 각자의 짝을 잘 찾아 맺어져 아름답게 끝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그 방식을 주인공이 자아를 실현하고 본래 이루고 싶었던 싶었던 가족(아이)이라는 행복에 방점을 찍어 찾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이전 사람과의 관계가 빌미가 되어 인간적으로 무시하면 안 되는, 영화에서 잠깐 언급되기도 한 윤리의 문제도 고려한 듯한 '이타적 배려'에서 찾는다. 이건 <매기스 플랜>이 전달하고 싶었던 원래 메시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결혼은 원치 않지만 아이는 원하는 매기는 우연히 알게 된 유부남 소설가 존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존은 전처 조젯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매기와 함께 살게 된다. 그 하룻밤 덕분에 매기는 아이가 생기고 존은 이렇게 새 가정에서 세 자녀와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전처 조젯은 존을 잊을 수 없고, 살다 보니 생긴 존에 대한 매기의 실망과 전처 조젯의 본심이라는 각자의 감정이 이끌어낸 합의의 도출, 매기와 조젯의 공조가 이루어진다. 존은 다시 조젯에게로 돌아갈 계기가 생긴다. 존은 이러한 공조 사실을 알고 불쾌해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감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조젯에게로.



여기까지 보면 이 영화는 굉장히 복잡한 3인 이상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의외로 영화의 흐름은 상당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온다(현처와 전처가 싸우고, 전남편과 전처가 싸우고 하는 사건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복잡 다단한 이야기의 흐름을 각 상황에서 제일 이해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포커스를 바꿔가며 감정적으로는 분열된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존과 조젯이 다시 합쳐져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매기가 새로운 가족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는 결말 시점의 시퀀스들은,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인데, 주인공들이 그 이유를 주체적인 선택에서 찾지 않고 일종의 동기가 되는 외부 요인을 어떻게든 끌어들이거나 그것들을 핑계로 삼는다(등장인물들의 자녀들도 그렇게 소비된다). 그러니까 매우 이타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불장난 같았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 맺었다 끊어졌다, 다시 맺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인간관계를 다루는 영화가 어떻게 결말은 이렇게 쉽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2개의 매듭이 중간에 마구 뒤엉켜 있었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헝클어진 줄이 풀려서 각각의 2개의 리본으로 아름답게 묶일 수 있게 되었을까? 크게 어렵지는 않다. 사랑했기 때문에, 다시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그 정당성을 얻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가 다분히 페미니즘 혹은 주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제목도 마치 그럴 것 같은 암시를 준다) 사랑이라는 너무 절대적인 이유가 왠지 본래 주려고 했었던 메시지를 방해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에서 매기는 '솔직하게 사랑하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함을 추구하며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감정적 상황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맺었던 사람들 사이의 각도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랑에는 그리고 행복에는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이 영화 제목에 맞는 삶의 '플랜'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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